진실과 사실의 틈새에서 깨어있기

서울대학교 수의학과 우희종 교수

2014-02-09     불광출판사
진실과 사실의 틈새에서 깨어있기

서울대학교 수의학과 우희종 교수




쇠고기 수입 논란, 광우병, 구제역 등이 사회적 이슈가 될 때마다 언론의 조명을 받는 과학자가 있다. 바로 우희종(56)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다. 그는 전공 분야인 면역학과 광우병 연구 활동 외에도, 활발한 사회활동을 통해 일상생활이 곧 수행이라며 소외된 계층을 위한 현장중심의 불교적 실천을 강조한다. 얼마 전 불광연구원이 개최한 ‘현대사회, 불교에 길을 묻다’ 강좌에서 그의 강의를 듣고, 새삼 불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 전환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를 독자 여러분과 나누며 불자로서의 삶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 삶으로부터 자유로워지다 
: 미국 유학 시절 세례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불교와의 인연은 언제 맺어졌습니까?
사춘기 때 ‘왜 사는가’라는 문제가 절실하게 다가왔어요. 그 답을 얻기 위해 고등학교 불교반에 들어가면서 불교를 접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경전이나 의식을 통해서만 불교 공부를 하려 했기에 참된 불교를 맛보지 못하고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시절에 교회를 찾았고, 유학시절에는 한인 미국장로교회에서 세례까지 받았죠. 그러나 거기서도 제가 원하던 답은 찾지 못했어요. 제가 불교를 제대로 공부하게 된 건 10여 년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30대 중반에 ‘내가 누구인가’라는 진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부터입니다. 당시 송광사 유나로 계시던 현전 스님의 지도로 ‘무無’자 화두를 받아 죽자사자 간화선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 2년 화두를 들다보니 나름대로 작은 체험 과정을 거치면서, 답을 찾을 수 있었고 삶이 충만해지며 자유로워졌습니다. 물론, 간화선을 통한 당시의 체험을 체화하고 일상의 삶에서 녹여내는 것에는 대략 5년에서 10년은 걸린 것 같습니다.
:  간화선을 한 후 생겨난 삶의 변화는 무엇입니까?
좀 더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넓어진 것 같아요. 예전엔 옳고 그른 것을 규정해놓고 ‘옳은 것을 위해서 살아야지’ 하는 확신이자 일종의 강박관념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는 낮과 밤이 있고 빛과 그림자가 있듯, 우리 삶에도 생로병사라는 모습이 늘 펼쳐지면서 선과 악이 같이 있다는 걸 인지하게 된 거죠. 우리 삶이 불필요한 고통이 없는, 보다 바람직한 형태로 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이것을 딱 바꿔서 고통이 없는 세계를 만들겠다는 오만한 생각을 버리게 됐어요. 개체로서의 나라는 존재도 인연을 따라 만들어졌다가 흩어진다는 것을 철저하게 알게 되다보니, 나 하나의 만족, 나 하나의 생과 사에 대해 그렇게 집착하지 않게 됐어요. 그런 면에서 굉장히 편안해지고 충만해지는 삶이 된 것 같습니다.



“사실의 세계가 전부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고통이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과 사실의 틈새에 대해서 깨어있어야 하지요. 삶의 본질은 과학이 발전하기 전이나 지금이나 그다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 간화선 체험 후 불교 활동은 어떻게 이어오셨나요?
참선 중에는 책도 읽지 말라던 은사스님께서 처음 허락해준 게, ‘아는 스님이 몸이 아프니 법회 가서 도와줘라’였습니다. 그 절이 마침 서울대 앞 녹두거리 고시촌에 있는 정혜사였기에, 스님 대신 법회 주관도 하고 자연스럽게 고시 공부하는 젊은이들을 모아 마음공부 모임도 시작했어요. 이 후에는 일반인 대상으로 역삼동 쪽에서 마음공부 모임을 갖기도 했고요. 이명박 정부 들어 제 전공과 관련되어 바쁜 일들이 많아져서 마음공부 모임을 쉬었는데, 올해 안에 선방 모임을 마음공부 형태로 다시 가질 예정입니다. 그러고 보니 소년원 불교반에서 한 달에 한두 차례 자원봉사를 해온 것도 15년쯤 된 것 같네요.
| 포스트 성철 시대를 위하여 
: 종종 불교계를 향해 쓴 소리를 내놓기도 하십니다. 종단과 이해관계가 없다보니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계시는데, 한국불교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개인적인 관점입니다만, 종단이 너무 파편화되어 치우쳐 있는 것 같아요. 불교가 지향하는 것은 결국 ‘상구보리 하화중생’으로서, 승가는 사회 속에서 무명無明의 삶으로부터 깨달음의 삶으로 이끌어가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선 종단이 힘을 모아 일반 대중의 삶에 유용하게 접근할 수 있는 실천적인 활동을 고민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아직 힘이 미흡한 것이죠. 사부대중이 아닌 스님 위주의 불교가 된 한국불교는 문중이나 계파 형태로 나눠져 있어서 종단이 실제적인 힘을 발휘하는 데에는 유명무실합니다. 종단의 모습이 이렇다보니 잘못한 스님들의 행태에 유효한 대책도 없고, 일반인들에 대한 현실적인 포교활동은 형식적이 되어버렸죠. 종교집단이라면 대표성을 지닌 종단에 힘을 실어 그 위상을 강화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유명한 스님 위주의 흩어진 신행활동이 아니라, 이들이 모두 종단 차원에서의 활동으로 수렴되어야 할 것입니다. 늘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십니다. 
: 불교가 일상적인 삶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우선 불교의 건강한 세속화가 필요합니다. 일반인들에게 불교에서의 깨달음 가치가 요즘처럼 자리 잡은 건 성철 스님의 영향이 큽니다. 숭유억불의 조선시대, 일본불교, 이승만 정권의 불교탄압 등 일련의 시대 흐름 속에서 부유하던 한국불교는 성철 스님에 의해 깨달음의 세계가 있다는 걸 명확하게 보여주며 한국불교의 위상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척박했던 그 당시 상황에서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과정이라면, 이제는 깨달음이 우리 일상의 삶 속에 녹아들어 생활화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한국불교계는 이 차안此岸을 떠나서 도달해야 될 깨달음의 세계라는 그 어떤 아름다운 피안彼岸 제시에 정신이 없는 것 같아요.
이제 포스트 성철 시대가 와야 된다고 봅니다. 성철 스님께서 사표師表로서 한국불교의 위상을 높였다면, 그것을 이어받아서 우리 사회에 되돌려주는 역할을 이제 스님들과 불자들이 해야 합니다. 이런 일상 속의 불교를 성철 스님도 강조하셨습니다. 불교가 일상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점점 관념적이 되어, 우리 사회와 격리되고 소수화되며 힘을 잃어가게 됩니다. 요즘 서양사회에서 불교가 환영받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이 일상 삶의 자기 성찰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을 ‘각자覺者’라고 하지, 깨달을 ‘오悟’를 써서 ‘오자悟者’라고 하지 않습니다. 한국불교에서 그동안 깨달음을 강조한 것은 충분합니다. 깨어있음[覺]을 위한 깨달음[悟]임을 분명히 해야 하지요. 독화살의 비유가 있듯이 관념적인 가르침으로부터 이제 일상 삶 속의 깨어있음을 강조하는 원래의 모습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입니다. 
: ‘깨어있음’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내 삶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만,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연기실상에 대한 통찰이기도 하고, 조금 돌려서 말한다면 사실과 진실의 틈새를 알아차리는 힘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처럼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하지 않아 우리가 수용하고 삶이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진실’이라면, 과학이나 사회기준처럼 특정 집단이나 문화권에서 다수가 믿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과학도 끊임없이 발전하는 것처럼 사실이란 시대와 문화에 따라 언제든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의 안이비설신의라는 육근六根을 통해 만들어지는 사실로 이루어져 있죠. 그러한 사실의 세계가 전부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고통이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과 사실의 틈새에 대해서 깨어있어야 하지요. 삶의 본질은 과학이 발전하기 전이나 지금이나 그다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하지 않는 우리들 삶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런 자신의 삶을 부처님의 진실된 가르침에 따라 보지 않고,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하는 시각, 예를 들자면 과학문명이나 자본주의적 사실의 관점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니 스스로의 삶 속에 갈등과 고통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지요. 진실이 필요한 삶을 사실로만 바라볼 때 스스로 행복하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울고 웃는 평상심이 도라는 것처럼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하지 않고 우리들의 삶 속에 늘 있는, 오욕칠정과 생로병사라는 일상의 범사에 감사하면서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진정 제대로 된 불자라면 있지도 않는 도를 닦는다면서 산속을 헤매는 관념적 불교로부터, 일상생활로 돌아와 나와 내 가족의 이해관계를 떠나 남을 위한 작은 일 한 가지만이라도 평소의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수행입니다. 제가 강조하는 ‘불자 한 사람이 한 가지 선행하기’입니다. 그러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생기고 자신과 남을 들여다볼 수 있는 습관이 만들어져, 업이 바뀌고 삶이 변화될 것입니다. 그것이 깨어있는 삶이라고 봅니다.

| ‘게으른 마을’을 꿈꾸며 
: 세상이 워낙 급변하며 다양한 가치관이 존재해, 때때로 중심 잡기가 힘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불교적 삶이란 무엇일까요?
부처님 말씀을 요약한다면 ‘생명존중과 비폭력, 그리고 수행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결국 관계에 대한 철저한 재인식입니다. 부처님은 내가 보고 듣고 느낀 세계는 허상이거나 감각기관에서 만들어진 것뿐이니 나의 원래 모습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비폭력을 알기 위해선 먼저 폭력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모든 존재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폭력이란 관계의 단절과 왜곡을 가져오는 것을 지칭합니다. 나의 근원적인 본래 모습을 들여다보면, 모두 상의상존하는 비폭력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 그 자체와 이들의 삶이 서로 상의상존하는 비폭력의 모습임을 알아차리고 체화하도록 하는 것이 수행이고요.
부처님이 강조하신 수행 또한, 무명으로 인해 단절되고 왜곡된 나의 원래 모습을 되찾으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의 본래면목을 되찾는 것이 수행이자 동시에 비폭력의 실천입니다. 다만 무명이라는 폭력을 극복하기 위해 수행이라는 비폭력의 행위를 자신만이 아닌 뭇 중생으로까지 범위를 확대시킨 것이 부처님이듯이, 우리 각 개인의 수행을 자연스럽게 자신이 속한 집단, 사회, 전 인류에 확대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각자의 위치나 상황에 따라서는, 가족을 비롯해 자신이 속한 집단과 사회 구성원이 왜곡된 구조나 문화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면, 이들을 위해 작은 것 하나 실천하는 것이 곧 비폭력의 삶이자 수행입니다. 서로가 상의상존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면서 일상 속에서 먹고 자고 노동한다면, 그 삶 자체가 수행이자 깨어있음이지요. 그것이 바로 불교적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우리 시대 삶이 버거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는 말씀 부탁드립니다.
지금의 나의 모습은 내 과거 습관의 결과입니다. 물론 나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고 내가 속한 사회와 문화의 공동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지금의 삶으로 나타날 뿐이고 지금의 삶을 만든 주체는 나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이 때 자기 자신과 밖을 향해 비난만 하면 힘든 상황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앞으로의 삶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지금의 살아가는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힘든 상황을 부정하지 않고 직면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가질 때 변화는 시작됩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공으로서 새롭게 만들어가겠다는 긍정적 문제의식이 중요한 것이죠. 그러한 긍정적 사고를 갖고 생활한다면 자연스럽게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은 분명히 변화합니다. 다만 이 때 서두르지 말 것을 당부 드리고 싶습니다. 급한 마음으로 서두르면 그 자체가 욕심이 되어 장애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서 문제의식을 분명히 지니되 서두르지 말고 실천하는 것, 비록 화살을 멀리 보고 쏘느냐 가까이 보고 쏘느냐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간화선 수행과 다르지 않습니다. 힘들거나 잘 나가거나 일상 삶의 현장이야말로 수행하는 장소입니다.
: 앞으로의 계획이나 꿈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특별한 계획이나 꿈보다는 주어진 내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늘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만 내 삶의 변화를 확실하게 해준 것이 불교이므로, 부처님 말씀을 통해 얻은 이 자유와 평안을 남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당장은 제 전공 상 침묵할 수 없었던 사회문제로 바빠진 내 생활 반경 내에서 잠시 중단했던 소규모 마음공부 모임을 활성화시키는 것이고요. 또 다른 분들과 함께 경남 거창에 땅을 마련하고 현재 건물 하나만 달랑 지어진 상태인데, 언젠가 틱낫한 스님의 플럼빌리지 같은 형태의 마음공부 공동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고요. 그곳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잠깐 모여 같이 나누는 시간을 갖고, 나머지 시간은 각자 게을러지기를 하는 것이죠. 자신과 연관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는 ‘게으른 마을’입니다. 인생, 서둘러 살 것 없습니다. 우린 좀 더 게을러질 필요가 있어요.

우희종
서울대 수의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대에서 생명약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펜실베이니아대 의과대학 박사 후 연구원, 미국 하버드대 의과대학 강사, 보스턴대 의과대학 조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 수의학과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재 법무부 보호소년 지도위원, 조계종 중앙신도회 대의원, 서울대학교 교수불자모임 불이회 부회장, 조계종 자정과 개혁을 위한 혁신위원회 위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며 불교적 삶을 실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