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서울 달마사 주지 호산 스님

여기 이 자리에 달마사가 있다는 것만으로

2014-02-09     불광출판사

서울 동작구 흑석동, 서달산 달마사. 참으로 절묘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민족의 젖줄 한강을 굽어보며, 앞으로는 북한산과 남산을 마주보고 뒤로는 관악산을 등지고 있다. 동쪽 옆으로는 명당 국립서울현충원에 바로 맞닿아 있다. 삼성각 위로 오르면 300도로 회전하며 서울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도심 최고의 풍광을 지닌 사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달마사는 1931년 만공 선사의 제자 유심 스님이 창건하였다. 그동안 동네 작은 절에 지나지 않았던 달마사가 완전히 새로운 도량으로 재탄생하여, 심신이 지친 도시민들의 쉼터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다. 주지 호산(53) 스님의 뚝심으로 밀어붙인 불사 원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금생의 밥값
: 서울에 이토록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사찰이 있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처음 주지로 오셨을 때 모습은 어떠했는지요?
은사이신 종림 스님(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께서 달마사 회주이신데, 제가 맏상좌예요. 2003년 봉은사에서 총무국장 소임 살고 있을 때, 대뜸 주지 맡으라고 해서 오게 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전각이 대웅전과 삼성각밖에 없었고 올라오는 길도 엉망이었어요. 아름다운 주변 경관에 비해 너무도 초라했지요. 그때 한강을 바라보며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강남에 봉은사가 있고 강북에 도선사가 있듯, 서울 서남부 지역의 대표 사찰로서 포교를 담당할 핵심 도량으로 만들어보고 싶었죠.
 
: 처음에 어떤 마음으로 불사를 시작하게 되셨나요?
제가 가진 재주가 없어요. 법문과 염불을 잘하는 것도, 수행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거든요. 세상에 태어나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데, 추진력 하나만큼은 남보다 강한 것 같아요. ‘이곳 달마사 불사가 내 금생의 밥값이다’라는 마음으로 불사 원력을 세우고 꾸준히 밀고 나갔습니다. 처음 올 때 제 몸무게가 85kg이었어요. 피부도 뽀얗죠, 덩치도 있고 풍채도 좋으니 신도들이 좋아했었어요. 그런데 불사를 시작하고 뙤약볕에 질통을 하루 200통씩 지고 나르니, 피부는 새까맣게 타고 몸무게가 20kg 빠지더라구요. 그래도 꿈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죠. 하룻밤에 수십 채씩 집을 지었다 헐었다 하며, 어떻게 하면 가장 아름다운 집을 지을까 별의별 생각을 다했습니다. 불사에 대해 반신반의하던 신도님들도 나중에는 제 뜻에 동참하여 마음을 내주셨어요.
 

달마사는 참으로 절묘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민족의 젖줄 한강을 굽어보며, 앞으로는 북한산과 남산을 마주보고 뒤로는 관악산을 등지고 있다. 삼성각 위로 오르면 300도로 회전하며 서울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 10년 가까이 불사를 진행하며 어려움도 많으셨을 텐데요?
머리 깎고 출가를 했으면 부처님법 공부하고 법대로 여법하게 살아야겠지만, 부처님법은 고사하고 속가법을 알아야겠더라구요. 이곳이 녹지 공간이라 불사에 제약이 굉장히 많아요. 흙을 조금 파더라도 공원법, 도시계획법 등을 꿰뚫고 진행해야 뒤탈이 없어요. 구청과도 갈등이 많아, 그쪽 사람들이 달마사 하면 지금도 이를 갈 겁니다.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죠. 돌 쌓아놓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세 번을 허물고 다시 쌓기도 하고, 좀더 싸고 좋은 나무를 구하기 위해 하루에 1,000km 넘는 거리를 다니기도 했습니다.
 
: 도량을 돌아보니 돌 하나, 나무 하나에도 세심한 정성이 엿보입니다. 불사가 자연 풍광과 잘 어우러져 매우 편안한 느낌을 주는데, 가장 주안점을 둔 것은 무엇입니까?
현대의 사찰 기능은 무조건적인 신앙을 강요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그래서 권위적이거나 위압감을 줄 수 있는 요소를 많이 지양하려고 했습니다. 누가 오더라도 편안하게 쉬다가 평온함을 안고 갈 수 있는 사찰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그래서 대부분의 전각에 단청을 입히지 않고 옻칠만 했습니다. 고택 같은 편안함을 주고 싶었어요. 달마사는 현충원 바로 옆에 있어 굉장히 조용해요. 언젠가는 등산객들이 지나가며 “여긴 진짜 절간같이 조용하다”라고 해서 큰소리로 웃었던 적도 있습니다. 주민들에게도 편안한 쉼터 역할을 하려고 하니, 절을 찾는 횟수가 많아지고 불교문화에도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는 것 같아요. 신도 가정 수도 많이 늘어, 10년 전 900가정에서 현재 5,000가정에 이릅니다.
 
| 대장경 전산본 봉안과 민주열사 추모재
: 달마사는 고려대장경 전산화본을 유일하게 봉안하고 있는 ‘장경藏經 도량’이기도 한데요. 그 인연은 어떻게 되나요?
해인사 강원 학인 시절, 우리스님(종림 스님)이 부르시더니 “나랑 일 좀 하자”고 하시는 거예요. 그때부터 팔만대장경 전산화 작업이 시작된 거죠. 스님이나 저나 고생 많이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대장경 전산화에 대한 인식이 부재한 시절이었죠. 어른스님께 “대장경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전산화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가, “성스러운 경전을 뭐 어떻게 한다고?”라며 주장자가 날아왔어요. 숱한 어려움을 딛고 올해 어느덧 고려대장경연구소 법인 창립 20주년이 되었습니다. 대장경 속 이체자만 2만5천 자였는데, 폰트 작업으로 그 글자를 다 만들어가며 팔만대장경을 컴퓨터에 입력해 전산화시켰죠. 대장경 전산화가 완성된 후, 전산화본 108권을 책으로 만들어 이곳 달마사에 봉안하고 있습니다. 대장경이 조성된 지 천년이 지났고, 달마사가 현대인들의 아픔을 보듬고 소통하며 그 ‘천년의 지혜’가 다음 천년으로 전해지도록 교량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달마사에서 2004년부터 매년 민주화 열사들의 천도재를 봉행하는데,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달마사 바로 옆이 현충원이잖아요. 그곳에 묻힌 분들은 나라를 위해 헌신한 훌륭한 분들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이 땅의 민주화와 평화 통일을 위해 치열하게 사셨던 분들도 많아요. 그분들의 삶과 업적을 기리고 세상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매년 천도재를 봉행해 왔습니다. 지난해에도 목우 스님, 지산 스님, 여익구, 안희대, 김영근 등 스물한 분의 합동천도재를 봉행했습니다. 그동안 불사하느라 위패 모실 만한 장소가 없어 미뤄뒀는데, 조만간 명부전이나 지장전에 민주열사들의 위패를 모시려고 합니다.
 
: 지난 해 달마사 봉안당이 전통사찰 중에서는 국내 최초로 납골당 공식인가를 받기도 했는데요. 봉안당을 조성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앞으로 종교의 역할이 많이 변화할 거라고 생각해요. 사찰이 기도 수행 도량으로만 자리잡았는데, 이제는 도심 사찰을 중심으로 생활 속에서 생로병사 문제를 함께 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점점 핵가족화되어 가는 가정의 부담을 줄여줄 수 있다고 봐요. 절에서 장사를 한다는 차원으로 비춰질까 염려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몇 년 후 재계약하는 조건이 아니라, 처음부터 영구 봉안 계약을 하고 성심성의껏 모시고 있습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전통사찰의 편안한 유택幽宅에 모셔져, 자손들이 늘 가까이 찾을 수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죽음에 대한 축제를 열어볼 생각입니다. 죽음을 주제로 공연 및 전시 등을 통해, ‘죽음이란 게 끝이냐 시작이냐, 아니면 망각이냐’를 깊이 성찰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을 것 같아요.
 
| 스스로 찾아와 스스로 깨우쳐가는 사찰
: 아랫녘부터 봄꽃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봄꽃 축제를 준비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진행됩니까?
삼성각 위에 두 개의 거북바위가 있는데, 일 년에 두 번 한강에 내려가 목욕하고 올라온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요. 그리고 달마사 소림굴 안에는 차가운 물이 솟는 영천이 있는데, 예로부터 용왕상을 모셔놓고 용왕제를 지냈던 곳입니다. 음력 삼월삼짓날을 기해서 거북바위에 차 올리는 다례재를 지내고, 한강에서 수륙재를 봉행할 예정입니다.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시기라 이즈음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면 좋을 것 같아, 4월 6일부터 12일까지 봄꽃 축제를 개최합니다. 서달산에는 거리에 피는 왕벚과 달리 산벚이 피는데, 꽃잎이 작지만 굉장히 아름답고 꽃비가 날릴 때는 장관을 연출합니다. 그리고 진달래를 비롯해 야생화를 곳곳에 많이 심어, 꽃이 만개하면 그야말로 볼 만할 겁니다. 화사한 봄꽃만 구경할 것이 아니라, 절에서 좀더 오래 머물며 마음을 쉬었다 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 위해 축제 분위기를 내보려 합니다. 프로그램으로는 단청, 지화, 연등 만들기 등 불교문화 체험행사, 석주・일타・종림 스님의 서화 및 현대불교미술 전시, 불서전시회, 어린이 사생대회, 노인 위안 잔치, 오케스트라 음악회 등이 열릴 예정입니다.
 
: 마지막으로, 달마사를 어떤 도량으로 만들어가고 싶으신지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서울 서남부 지역의 대표적인 포교 중심 도량으로 만들어나갈 생각입니다. 이제 불사도 거의 마무리 단계로 대웅전만 남았으니 포교에 매진할 수 있을 거예요. 무엇보다 누구라도 거부감 없이 찾아와 편안히 머물다 갈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서의 사찰이 되어야겠지요. 심신이 지친 현대인들과 같이 호흡하고 발걸음을 맞춰가며, 강요와 주입이 아닌 스스로 느끼고 깨우쳐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어요. 그리고 아랫마을이 재개발되고 불사에 집중하느라 중단했던 어린이불교학교와 불교대학을 다시 잘 꾸려 활성화시킬 생각입니다. 보셔서 알겠지만 달마사는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가지고 있어요.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녘 하늘의 노을은 단연 압권입니다. 또 어떤 이는 트윈픽스에서 바라보는 샌프란시스코 야경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야경이 훨씬 멋지다고 합니다. 괴롭고 힘든 이들에게 여기 이 자리에 달마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과 힘을 줄 수 있도록, 그들이 스스로 찾아오는 사찰로 잘 가꿔보겠습니다.
 
 
호산 스님
1991년 해인사로 출가했으며 해인사 승가대학을 졸업했다. 해인사 보존국장, 월간 「해인」 출판부장, 봉은사 포교국장 및 총무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로 있다. 2004년부터 서달산 달마사 주지를 맡으며 서울 서남부 지역의 대표적인 포교 사찰로 거듭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