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불・목건련의 열반과 붓다의 슬픔

2014-02-09     자현 스님

한국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붓다를 존상이나 회화로 모실 때, 그 좌우의 제자로 마하가섭과 아난을 배치한다. 이는 중국불교의 선종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전수받아 전개한 법의 상속자로서 이분들을 꼽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방불교나 티벳불교에서는 좌우의 제자로 사리불과 목건련을 모신다. 이는 붓다 재세시의 역할을 더 크게 본 것이다. 
 
| 붓다의 으뜸가는 제자와 관점 차이
불교에는 진리의 상속과 전개라는 법통法統의 시간성과, 붓다와 함께한 공간성에 대한 인식차이라는 이중성이 존재한다. 예컨대, 조선으로 말하자면 세종이나 영·정조와 같은 흐름을 우선으로 볼 것이냐, 정도전이나 이방원과 같은 개국공신을 높게 볼 것이냐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필자에게 붓다의 제자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을 두 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사리불과 아난을 든다. 사리불이 교단의 총리로 비유될 수 있다면, 아난은 비서실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사리불은 붓다와 함께 교단의 주축을 완성한 영웅 중의 영웅이다. 그래서 사리불을 ‘진리의 장수(法將)’라고 하는 것이다. 또 아난과 같은 경우는 붓다의 25년 시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붓다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교단의 확장과 안정을 위해서 주력한다. 때문에 『잡아함경』 권23의 「아육왕경」에는, 아소카왕이 기원정사에서 제자들의 부도를 참배할 때 사리불·목건련·마하가섭의 부도에는 10만 냥으로 공양했으나, 아난에게만은 유독 100억 냥을 공양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올바른 가르침의 홍포를 높이 산 것이다.
실제로 이 기록에는 깨달아 아라한이 되고도, 다른 이를 위해서 단 한 차례도 설법하지 않은 박구라 존자의 부도에 대해서도 나온다. 여기에 아소카왕은 단지 1전만을 공양한다. 이를 보고 신하들이 동일한 깨달음을 얻은 분인데 왜 그렇게 하냐고 묻자, 왕은 “이 분이 세상에 무슨 이익이 있는가?”라고 대답한다. 이는 불교의 사회포교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전달한다. 개인의 수행과 이익만을 위한 불교는 불교가 아닌 것이다.
 

대수투파 나란다의 사리불 수투파 
 
| “내 교단이 텅 빈 것 같다”
사리불과 목건련이 살아계실 때, 마하가섭과 아난은 이분들에게 결코 비견될 수 없다. 때문에 붓다는 이 분들이 돌아가시자, 그 직후의 설법에서 “내 교단이 텅 빈 것 같다.”(『잡아함경』 권24)는 슬픔을 토로하셨다. 또 『증일아함경』 권19에는 붓다께서 사리불의 화장한 사리를 사리불의 제자인 균두사미에게 받고는, 제자들에게 “나는 (폭풍 속에서) 가지가 꺾인 큰 나무와 같다.”고 깊이 탄식하신다.
필자는 이 말들이 불교경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서글프고 비통한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남은 제자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일상적이지 않은 언사는, 붓다의 당시 심정이 얼마나 비감했는지를 잘 나타내준다는 점에서 읽는 이를 더욱 애달프게 한다.
그런데 공자 또한 수제자인 안회가 32세에 요절하자,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天喪予 天喪予].”라며 오열했다고 『논어』는 전한다. 또 벗과 같이 가장 친밀했던 제자 자로가 죽자, 『춘추공양전』에는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天祝予].”라고 크게 탄식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인도와 중국의 두 성인은, 불교와 유교라는 서로 다름 속에서도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은 꼭 같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목건련의 열반
목건련의 최후는 대단히 비극적이다. 평소에 신통을 떨치며 다른 종교나 철학자들을 굴복시키곤 했던 목건련에게는 많은 적이 있었다. 이들 중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는 수행자[執杖梵志]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계략에 의해 목건련은 타살되고 만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를 계몽했으나, 논파 당한 이들의 앙심에 의해서 결국 독배를 마시게 된다. 이 같은 상황이 목건련에게도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증일아함경』 권18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목건련은 타살되면서도 평생의 지음知音자였던 사리불에게, 자신의 마지막을 알리고자 일종의 유체이탈로 사리불을 찾아온다. 그러자 사리불은 깜짝 놀라면서 왜 신통으로 빠져나오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목건련은 숙업이 이미 무르익어서 신통을 전개할 수 없었다고 답한다. 제아무리 뛰어난 신통이라도 이미 정해진 인과법을 초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현대의 우리에게 많은 생각점의 화두를 부여한다. 이렇게 목건련은 순교로 열반에 들게 된다.
경전에는 목건련의 열반이 이때 이루어지지 않고, 치료된 후 사리불의 열반 뒤에 이루어진 것으로 적고 있다. 그러나 전후의 관계나 내용들을 고려해본다면, 목건련은 이때 열반한 것이 맞다. 다만 신통제일 목건련이 타살당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어, 후대에 종교적인 윤색이 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천을 이긴 영웅 아킬레스도 시절 인연이 익으면 허무하게 죽는 것처럼, 목건련 역시 숙업을 피하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마치 천상의 신들도 인과에 의한 최후는 피하지 못하는 것처럼….
붓다라는 행복을 만나 평생을 붓다께 헌신하며 교단발전을 위해서 노력한 목건련은, 결국 그 열정만큼이나 강력한 순교로 태양풍과도 같은 강렬한 생을 마감하게 된다.
 
| 사리불의 열반과 미스터리
사리불은 목건련이 열반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붓다께 고향에 돌아가 열반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한다. 붓다는 이를 말리려고 했으나, 인연의 고리는 언제나 인정人情을 넘어서는 법이다. 평생의 지기인 목건련이 입적하자 사리불도 이를 따라 열반한다는 것은, 자기의 음악을 알아준 종자기가 죽자 거문고의 명인 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백아절현伯牙絶絃의 고사를 생각하게 한다.
사리불은 균두사미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약한 질병 속에 열반에 든다. 임종을 지킨 균두사미는 사리불을 화장한 사리와 가사 및 발우를 가지고, 붓다의 교단으로 돌아와 이를 붓다께 올린다. 그러자 붓다는 길게 탄식하며, 탑을 세워서 공양할 것을 지시한다.
사실 사리불과 목건련의 최후와 관련해서는 석연치 않은 미묘함이 있다. 목건련의 타살도 그렇거니와 사리불의 최후를 균두사미만이 지켰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많은 제자들을 두어 제2의 붓다로까지 칭송받던 사리불의 쓸쓸한 최후는, 당시 교단에 있었던 어떤 난기류에 대한 측면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것은 행간에 있고 또 여백 속에서만 살펴질 뿐이다.
 
| 불교탑의 건립 주체
화장은 유목민의 문화다. 유목민들은 농경민과 달리 풀을 따라 이동하기 때문에 무덤을 지키며 기릴 수가 없다. 때문에 화장을 하고 이 과정에서 죽은 영혼은 연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유목의 화장문화가 인도의 농경문화와 습합되면서, 탑이라는 망자에 대한 기념물을 만드는 쪽으로 변모하게 된다. 무덤과 같은 망자를 상징하는 기념물은 정주라는 농경문화에 의한 것이다. 이 같은 농경의 기념물이 화장이라는 유목문화와 만나면서 습합되어, 문화적인 적절점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 바로 탑이다.
붓다 당시는 인도문화에서 탑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이다. 그래서 탑을 세울 수 있는 대상에 대한 판단이 일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다자탑전반분좌多子塔前半分座’에서의 다자탑처럼, 아들을 많이 낳아서 집안이 잘 된 경우의 일반인도 탑의 건립대상이 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탑의 대상을 붓다·벽지불·아라한·전륜성왕이라는 성자聖者와 성군聖君으로만 제한한다.
 
| 불교 사리탑의 시작
불교탑의 시작은 붓다의 손톱과 머리카락을 모신 조발탑爪髮塔이다. 그러나 사리탑의 최초기록은 사리불과 목건련의 열반과 관련된 『사분율』 「잡건도雜揵度」 등에서 살펴진다. 이때 붓다는 탑의 위치와 관련해서 시내의 사거리와 같은 번화한 곳을 비정한다. 이는 불교탑이 단순히 무덤의 역할뿐만 아니라 기념물의 관점을 강하게 내포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불교에서 탑을 세울 수 있는 주체가 일반적인 범부가 아니어야 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또 탑의 형태와 관련해서는 4각과 원형 및 8각을 말씀하신다. 이는 현재 불교탑의 형태에 두루 수용되어 있다. 그리고 재료로는 돌이나 벽돌 및 나무를 사용하고, 그 이음새는 진흙을 사용해 마감할 것을 지시하신다. 또 난간을 만들고 장엄용 깃발과 일산을 두고, 꽃과 향으로 장엄하는 것에 대해서도 가르침을 주신다.
후일 사리불의 탑 중 고향과 가까운 나란타에 건립된 탑은, 수많은 수행자들을 불러 모으게 된다. 이는 진리의 법향法響은 소리 없이도 군중을 끌어 모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또 이와 더불어 많은 국왕의 존숭에 의해, 결국 이 탑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 최대의 사원인 나란타사가 완성된다. 이는 올바른 스승의 그늘 속에서 수행하고자 하는, 중생들의 소박한 바람의 결과라고 하겠다.
 
 
자현 스님
동국대 철학과・불교학과를 졸업했으며, 동국대 불교학과 석사(중국불교),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석사(인도불교), 동양철학과 박사(율장), 동국대 미술사학과 박사(건축), 고려대 철학과 박사(한국불교)를 수료했다. 현재 동국대 강의교수, 울산 영평선원 원장, 월정사부산포교원 원장, 월정사 교무국장, 대한불교조계종 교수아사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사찰의 상징세계 , 조금 특별한 불교 이야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