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당시에도 그렇고 오늘에도 그런 것

2014-02-09     불광출판사

각묵 스님
1978년 화엄사에서 도광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1982년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이후 제방선원에서 7년간 정진한 뒤, 인도로 유학하여 10여 년간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를 배우면서 베다 문헌과 초기불전을 공부하였다. 인도 푸나대학교에서 산스크리트어과 석·박사 과정을 마쳤으며, 역·저서로는 『금강경 역해』, 『아비담마 길라잡이』, 『네 가지 마음 챙기는 공부』, 『디가 니까야』, 『쌍윳따 니까야』 등이 있다. 2012년에 대원상 출가부문 포교대상을 수상했다. 현재 실상사에 주석하며 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소임을 맡고 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초기불교에서 부처님이 하신 말씀의 기본주제는 행복입니다. 행복에는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 그리고 궁극적인 행복이 있는데, 금생에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세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기술을 익히라는 것입니다. “정말 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나?” 의문이 들 수도 있는 대목입니다. 정확하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기술을 뜻하는 시빠sippa와 학문을 뜻하는 니짜nijja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혀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 금생에 행복하려면 기술을 배우고 익히라
우리 어릴 적 ‘국민교육헌장’에 나오는 이야기하고 똑같습니다. 초기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입니까? 합리성입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에 현대교육의 이념과 똑같은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들어서는 여기에 두 글자를 더 집어넣지요. 바로 ‘전문’입니다. 자기가 소질 있는 분야의 전문적인 기술이나 전문적인 지식을 배워가지고 그걸 통해서 이 사회에 기여하고, 그 대가로 월급을 받든지 이윤을 창출하든지 해서 금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전문적인 기술이나 학문만을 가지고 그 사람이 행복하게 되느냐, 부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현대에서도 그 예를 들어 볼 수가 있습니다. 컴퓨터가 발달하고 인터넷이 발달하니 스팸메일, 바이러스 등을 유포시키는 사람들이 있고 세계 질서에 큰 혼란을 줍니다. 이 사람들은 컴퓨터 천재들이지만 인성이 계발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봉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 초기경에 어디를 봐도 봉사라는 단어는 안 나오던데?’라는 생각이 드시죠? 제가 봉사라고 옮긴 말은 초기경에서는 다나dana라고 나와 있는데 중국에서는 이를 보시라고 옮겼습니다. 보시가 뭡니까? 요새 말로 하면 이게 봉사입니다.
보시는 보통 ‘베푼다’라고 표현을 하는데 저는 이 말이 썩 좋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왠지 위에서 아래로 간다는 느낌이잖아요? 내가 뭔가를 많이 갖고 있어서 나보다 못한 사람한테 준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저는 베푼다는 말보다는 ‘봉사하는 삶’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습니다.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그 사람이 행복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봉사, 혹은 보시를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초기경 도처에 나오는 단어가 바로 이겁니다. 내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쌍윳따 니까야 에 보면 제자가 아파서 누워 있는데 부처님이 직접 가셔서 수발을 들고 간병을 하시지 않습니까? 삼계의 대도사이신 부처님께서도 봉사를 하시는 겁니다. 직접 솔선수범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더 이상 복 지을 게 뭐가 있습니까? 우리 삶의 행복은 봉사에서 온다는 겁니다.
그 다음으로는 도덕적인 삶을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작년까지는 건전한 삶이라고 주로 이야기했는데, 이 말로는 좀 부족한 것 같습니다. 도덕이라는 말이 좀 들어가야 될 것 같아요. ‘도덕’ 하면 좀 거부반응이 옵니다만, 부처님께서는 도덕적인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이것을 지계持戒라고 하지요. 원어로는 실라sila라고 합니다. 우리가 도덕을 무시해 버리고 건전한 삶을 무시해 버리면 그 순간에는 쾌락을 얻고 이익을 볼지 모르지만, 한 사람의 전체 인생으로 보았을 때에는 행복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남에게 베풀지 못하고 봉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당장은 많이 가져서 이익을 볼지 모르지만 서로 서로 얽혀서 살아가는 이상, 그런 사람의 삶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충만한 사람의 삶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 ‘봉사하는 삶’은 부처님의 명령이다
다음으로 ‘내생에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입니다. 보통 철학적으로 깊이 들어가는 분들은 부처님이 내생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저는 이것이 불교를 호도하는 이야기라고 봅니다. 초기경에는 내생에 관한 언급이 수없이 나옵니다. 다만 아라한에게는 내생이 없어요.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모든 종교가 내생을 이야기하고 있고, 불교도 하나의 종교체계로서 존재합니다. 저는 초기경을 읽으면서 내생은 반드시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생에 내생의 행복도 준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생이 존재하는 근본이유는 ‘업’입니다. 각각의 중생들이 지은 의도적 행위가 원인이 되어서 그 과보로 내생에 태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윤회의 고리를 끊으려면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고 실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생에 행복해지려면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말한 ‘봉사하는 삶’, ‘도덕적인 삶’입니다. 사회와 내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우린 너무나 잘 압니다. 출가한 저도 그렇습니다. 남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좋은 일을 했다 싶으면 그 얼마나 행복합니까? 경험으로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계를 지키고 도덕적인 삶을 산 사람이 천상에 태어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이 행복은 금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원인이 되고 업이 되어서 그 업의 과보로 내생에 행복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윤회의 과정에서 보자면 천상과 인간이라는 선처에 태어난다는 것이고, 그 이후에 삶의 전개과정에서도 괴로움보다는 행복이라는 결과를 더 많이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이야기이지요. 저는 초기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다 보니 부처님 가르침을 ‘명령’으로 받아들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봉사하라고 명령하신 겁니다.
육바라밀의 첫째가 보시이고, 둘째가 지계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교 2,600년사에서 모든 불교가 이구동성으로 봉사하는 삶, 도덕적인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도 그렇고, 부처님의 제자와 그 제자로 오랜 세월 이어져온 불교에서도 그렇습니다.
 
| 행복에 이르는 길, ‘해체’해서 바라보기
그런데 여기까지만 하고 끝나버리면 불교를 만난 진정한 행복을 모르고 가는 거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불교가 아니라도 다른 종교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건 당연해요. 물론 보시와 지계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불자들이 추구해야 할 행복 가운데 세 번째는 바로 궁극적 행복입니다. 원어로는 빠라마 수카parama-sukha입니다. 어떤 분들은 왜 자꾸 어려운 용어를 쓰느냐고도 하십니다. 뭐라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만, 이 모두가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궁극적 행복은 다른 말로는 열반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열반을 실현할 것인가 이게 중요합니다. 불교에서는 깨달음, 깨달음 하는데 어떻게 해서 깨달음을 얻는가, 이런 문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을 하셨을까요. 초기불교의 방대한 경전을 번역하고 정리해 보니 그 답은 네 가지였습니다. 우선 사성제의 통찰입니다. 사성제四聖諦는 무엇인가요? 부처님께서는 “나는 알아야 할 것을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닦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렸다.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붓다, 즉 깨달은 사람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사성제에 대한 말씀입니다.
다음으로는 팔정도八正道를 깨닫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불교를 말할 때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중도가 무엇인가 하면 바로 팔정도입니다.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팔정도의 여덟 가지 덕목을 우리가 깊이 새기고, 사유하고, 음미하고, 실현하고, 완성해낼 때 그 사람이 진정한 부처님 제자라고 저는 그렇게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오온과 십이처와 십팔계, 다시 말해 존재 일반의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를 통찰함을 통해서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연기緣起의 순관・역관을 통해서라고 하셨습니다.
이 네 가지 방법들은 하나의 진리를 설명하는 다른 길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맞물고 있는 구조입니다. 초기불교의 핵심은 이렇게 모든 요소를 ‘해체해서 보기’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궁극적인 행복에 이르신 방법입니다. 금생과 내생의 행복, 그리고 궁극적인 행복에 이르는 길에 대해 깊이 사유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불자님들께서 늘 행복하고 건강하길 기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