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거나 혹은 채우거나

2014-02-08     불광출판사
동양화에서의 여백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누구든 비워진 여백 안에서 무궁무진한 상상의 나래를 펼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화가 오관진의 여백은 ‘비움과 채움’이다. 그릇 위에 띄워 놓은 사물들은 보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비움과 채움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비워야 채울 수 있고, 채워야 다시 비울 수 있다는 비움과 채움의 선순환. 그에게 ‘비움’은 무엇이고 ‘채움’은 무엇일까.




한국화가 오관진

| 담기 위한 비움, 비우기 위한 채움
막사발 위에 빨간 체리 한 알이 떠 있다. 체리를 담을까? 아니면 그대로 둘까? 금방이라도 떨어져 그릇에 담길 것 같지만 중력의 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듯 체리는 공중에 가볍게 몸을 띄운 채, 보는 이들에게 ‘비움’과 ‘채움’을 생각하게 한다. 그냥 그대로 비워둘 것인지, 아니면 채울 것인지. 이 것이 그의 작품 앞에서 쉽게 발을 떼지 못하고 오래 머물게 되는 이유다.
“그릇을 비워 둘 것인지 채울 것인지는 모두 관람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것은 그릇은 만들어지면서 이미 담을 수 있는 크기가 정해져 있다는 겁니다. 작은 그릇에 많은 것을 담으려고 하면 흘러넘치는 것처럼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담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가 정해져 있는데 자신의 그릇을 생각하지 못하고 남과 비교하며 더 큰 것을 담으려고 욕심을 부리면 반드시 탈이 나기 때문이죠.”
담아야 할 만큼의 크기. 그리고 그 안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에 대한 생각. 그가 도자기 그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이런 깨달음을 얻고 난 이후부터다. 그릇이 작으면 작은 만큼 크면 큰 만큼, 일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욕심들을 버리며 살고 싶다는 그는 그렇게 도자기 그림으로 세상과 조우하기 시작했다.
“그릇이란 무언가를 담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늘 사람들의 욕심이 문제죠. 내가 담을 수 있는 만큼의 양을 담아야 한다는 걸 깨닫고 나면, 그 다음은 그 안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중요한 건 새로운 것을 담기 위해선 먼저 비워야 한다는 걸 알아야 한다는 거예요. 비우고 채우고 다시 비우고 결국 모든 것은 비움과 채움의 순환인 셈이죠.”
이처럼 비워야 채울 수 있고, 채워야 다시 비울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고스란히 도자기 그림 속으로 스며들었고 달항아리, 막사발, 분청사기를 통해 ‘비움과 채움’ 시리즈를 만들어 냈다.




비움과채움




비우과채움(호접지몽)

| 한국화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짜 맞춤’ 기법
그림의 맑은 색채와 사유思惟하게 만드는 여백. 군더더기 없이 단아한 그의 작품 안에서 사실 ‘비움’과 ‘채움’의 의미를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표현하고 있는 ‘비우기’와 ‘채우기’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회화이면서도 반 부조浮彫의 형태를 하고 있는 그의 작품들은 파
내고(비움) 조각내서 끼워 넣는(채움) ‘짜 맞춤’의 방법을 사용해 서양화의 명암법과 동양화의 공기원근법을 혼합했다. 이처럼 지금까지 한국화에서 볼 수 없었던 그만의 독특한 표현기법은 그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비움’과 ‘채움’뿐만 아니라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란 새로운 회화 영역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동양화에서 보여줄 수 있는 여백과 선의 아름다움을 서양화의 명암법을 이용하면 작품을 더욱 간결하고 선명한 이미지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먼저 한지 위에 먹선 대신 그릇과 탁자가 들어갈 자리와 체리나 사과 같은 열매가 올라갈 자리를 조각하듯 칼로 파내고, 그 홈과 똑같은 크기로 그릇과 열매를 그려 파낸 자리에 퍼즐을 맞추듯 끼워 넣는 거죠. 이렇게 작업을 하다보면 이미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파내는 비움과 끼워 넣는 채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짜 맞춤’ 기법은 도자기의 상감기법(도자기 표면에 무늬를 새긴 후 그 속에 금, 은, 보석, 뼈, 자개 등을 박아 넣는 기법)을 이용한 것으로 달항아리가 올라가 있는 탁자는 한지를 파내고 진짜 나무를 끼워 넣었고, 막사발 역시 돌가루와 안료를 혼합해 유약을 바른 것처럼 그릇을 완성한 후 그림을 바탕에 끼워 넣어 입체감을 살렸다. 그리고 또 하나 그의 그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선명하게 표현된 도자기의 균열이다. 뜨거운 가마 안에서 고열을 견디고 세상에 나온 도자기 표면의 갈라진 균열들을 그는 실사에 가깝도록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도자기의 균열을 손으로 정교하게 그리다 보면 손에 심한 통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가끔 그림과 하나가 되어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무아지경에 빠질 때가 있어요. 그 순간이 되면 손의 통증이 사라지면서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죠. 그렇게 몇 시간에 걸쳐 작품에 몰입하고 난 뒤 완성된 달항아리를 보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하고 감사해요.”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집중력으로 몇 번의 무아지경을 경험하면서 그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일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그는 모든 붓에 ‘늘 감사해요’라는 문구를 새겨 넣었다.




흐르다




비움과 채움

그의 그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선명하게 표현된 도자기의 균열이다. 뜨거운 가마 안에서 고열을 견디고 세상에 나온 도자기 표면의 갈라진 균열들을 그는 실사에 가깝도록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 그림이 들려주는 도자기의 공명
“아무 것도 채우지 않은 도자기를 두드려보면 맑은 소리가 납니다. 도자기 그림을 그리면서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바로 비워진 도자기의 그 맑은 울림입니다. 사람도 마음 비우기를 하면 텅 빈 도자기처럼 맑은 울림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성철 스님과 법정스님에게서 맑은 울림을 느낄 수 있었던 건 그 분
들이 모든 것을 비워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맑은 울림’을 전달하고 싶다는 그의 ‘마음 비우기’는 현재 다양한 ‘재능 나눔’으로 진행 중이다. 작품 경매 수익금의 일부는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고, 청소년들을 위한 미술교육 무료 강좌와 거리 벽화작업에 동참하는 공공미술활동까지 나눔과 봉사는 이미 그의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한때 습지 보호운동에도 앞장섰었고, 태안기름유출사고 때는 중학생 아들의 손을 잡고 태안으로 내려가 기름때를 닦아냈다. 만약 그의 달항아리를 보면서 잠시라도 그림이 주는 맑은 공명을 느꼈다면 비우고 채우고 다시 나누는 그의 삶이 그의 작품에 그대로 투영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품어 줄 것만 같은 풍만한 달항아리, 그릇의 질감이 살아있는 수수하고 질박한 막사발과 매끈하게 빛나는 청화백자까지 그의 작품이 말하고 있는 ‘비움과 채움’의 본질은 결국 비우고 채우고 다시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세상의 이치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 같다. 나를 위해 비우거나 혹은 타인을 위해 채우거나.

오관진
달항아리, 분청사기, 막사발과 같이 한국의 정서가 배어 있는 도자기를 그리는 한국화가 오관진은 홍익대 미술대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1년부터 개인전 23회 그룹전 160회에 참여했으며 대한민국미술대전, 한국미술대전, 아시아 미술대전 등에서 수상했다. ‘비움과 채움’을 주제로 서양화의 명암법과 동양화의 공기원근법을 혼용한 초현실적인 화면에 도자기를 재현함으로써 기존 한국화의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며 주목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