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길은 먼데 눈이 내린다 갈 길이 있고 눈은 내렸다

혜가단비 慧可斷臂

2014-02-08     불광출판사
갈 길은 먼데 눈이 내린다 갈 길이 있고 눈은 내렸다

혜가단비 慧可斷臂





“제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니, 스님께서 편안하게 해주소서.”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편안하게 해주리라.”
“마음을 찾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나는 이미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중국인의 입장에서 보리달마는 외국인이다. 그의 침묵은 언어소통의 어려움에서 비롯됐을 확률이 높다. 평소의 행보에 비춰보면, 대인관계 자체에 회의를 느꼈던 인물로도 짐작된다. “세간에서 기리는 보석의 광명은 상대할 것이 못 된다”던 핀잔엔, 인류 일반의 셈법에 대한 혐오가 곧추섰다. 친부의 죽음 앞에서도 무덤덤했으니, 억조창생 어떤일이 그를 흔들 수 있겠나 싶다. 양무제와의 결별에선 권력에 대한 공포감을 상쇄할 만큼, 속물에 대한 경멸감이 크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소림사가 절이 아니라 아예 굴窟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희망은 망상일 뿐”이라는 자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점을 치러 올 이는 드물다. 으레 권장되는 ‘열린’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멀쩡한 마음이어서, 자꾸 재고 망설이며 번복한다. 완전히 부서지고 찢겨진 마음만이 순수한 연민을 유발하는 법이다. 혜가慧可는 달마의 오랜 벽관을 깬 사람이다. 스스로 팔을 자르는 고통을 감수함으로써, 스승의 마음을 기어이 움직였다. 폭설이 내리는 날이었고 그에겐 되돌아갈 길이 없었다. 새하얀 눈밭에 시뻘건 피를 뿌리며 펄떡거리는 팔뚝에, 달마는 비로소 입을 뗐다. 소림사에 들어온 지 7년 만이다. 마음의 평화를 얻겠다고 몸의 평화를 제 손으로 파괴한 희대의 벽창우를, 어떻게든 달래주어야 했다. 역사에 남은 중국에서의 첫 설법은 역사적인 자해에서 비롯된 셈이다. 혜가가 달마에게 왼팔을 끊어 바치며 법문을 구하는 장면은 ‘혜가단비도慧可斷臂圖’란 수묵화로 곧잘 그려졌다. ‘단비’는 아무리 심한 육체적 고통도 정신적 고통만 못 하다는 절절한 심경의 표현이다. 육신을 내던질 만큼의 지극한 구도행이 단비의 표면적인 명분이다. 단,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이념은 순결하나 현실에선 대부분 말 못하거나 말로 다 못할 사연 하나쯤은 갖고 있게 마련이다. 끔찍한 절망의 연원은 불투명하다. 어쩌면 충동조절장애 증후군을 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혜가의 아명은 광광光光인데, 친모가 태몽에서 ‘기묘한 빛’을 보고 지어준 이름이라고 전한다. 일찍이 유학과 도학을 섭렵하고 32세에 대소승大小乘 모든 불법에 대한 공부를 마쳤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광광’은 천재의 암시다. 이후 40세가 된 어느 날 선정에 든 가운데 신인神人을 만나 “대도大道는 멀리 있지 않으니 남쪽으로 가라”는 계시를 받고 이름을 신광神光이라 고쳤다. 이상하게도 그날부터 머리가 빠개질 듯 아팠다는 일화를 고려하면, ‘신광’은 신병神病의 징후다. 남쪽엔 소림사가 있었고 대도는 달마였다. 혜가의 남행은 극심한 두통과 원인불명의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한 길이었다. 세상의 이치를 너무 빨리 알아버린 자의 상실감이거나 또는 깨달음에 대한 관심에 중독됐거나. 향학열도 따지고 보면 지독한 욕망이다. 식욕이나 성욕처럼 볼썽사납거나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아, 정체가 쉽게 드러나지 않을 따름이다. 무언가를 애타도록 알고 싶다는 마음은, 모른다는 것을 미치도록 못 견디는 마음이다. 게다가 설경雪景은 정신착란을 일으키기에 좋은 소재다. 먼 길을 걸어왔으니 몸은 지치고, 별안간 큰 눈이 내려 머리는 멍하고, 절실히 그리던 사람은 도대체 말이 없고…. 외려 돌지 않는 게 이상한 상황이다. 아무튼 혜가는 마음의 병을 무럭무럭 키웠는데, 한편으론 이것이 달마가 원했던 시나리오다. 종기가 클수록 짤 때의 쾌감이 큰 법이다. 달마는 깨달음을 성취한 신광의 이름을 혜가로 바꿔주고 2조祖의 지위를 부여했다. 그런데 “마음을 찾아도 찾을 수 없다”는 호소와 “나는 이미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주었다”는 대응은 서로 계면쩍다. 물론 마음의 실체가 따로 없다는 인식은 합리적이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들썩이는 마음의 현상에 대해선 설명해주지 못한다. 마음은어디에도 없지만, 언제나 아프다. 그러나 달마의 이 한 마디에 혜가는 절대적인 평안을 획득했다. 마음의 잡다한 현상이 곧 마음의 순수한 본질이니, 너무 괘념치 말라는 지적이다. 무심無心이 곧 안심安心이란 가르침은 ‘어디에도 마음을 쓰지 말라’는 권고인 동시에 ‘어디에나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는 삶을 달갑게 받아들이라’는 격려다. 마음은 왜 아픈가. 몸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불안하다는 건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생명으로선 어찌할 수 없는 도리다. 그리고 불안을 흔쾌히 인정하고서야 참다운 안정이 찾아온다. 마음에 표백제를 섞거나 외딴 병원에 맡기지 말고, 그때그때의 흐름을 따라 그대로 나아갈 것. “악을 보고도 질색하지 않고, 선을 보고도 애쓰지 않는다. 지혜를 저버리고 어리석음과 가까이 하지 않되, 미혹을 떠나 깨달음에 나아가지도 않는다.”는 안심법문에서, 달마의 자정自淨은 정화가 아니라 무화無化임을 읽을 수 있다. 산다는 건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난 외길이며, 외길에 꽃을 심어봐야 새로운 길은 나지 않는다.
2조와 3조의 만남은 더 극적이다. 승찬僧璨은 문둥이였고, 그는 괴질怪疾의 통증과 함께 천형天刑이란 걱정에 더 우는 인간이었다. “죄를 씻어 달라”는 승찬의 애원에, 혜가는 달마와 똑같은 방식으로 문답을 이끌었다. “죄를 찾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대의 죄는 이미 참회되었다.” 천형이란 스스로를 업신여기는 자신과, 거기에 들떠 기꺼이업신여겨주는 남들의 작당이 빚어낸 편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신기하게도 이후 승찬의 풍병은 크게 호전되었다고 한다. 무심無心과 무병無病의 병리학적 상관관계는 진지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다. 단지 이제 썩어문드러진 몸은, 언젠가는 썩어 문드러질 몸이었다는 통찰! 혜가는 폐쇄적이었던 달마와는 달리 천성이 꽤나 활달했던 듯싶다. 승찬을 들이고 이후 문중을 완성한 뒤, 그는 철저한 소시민으로 말년을 보냈다. “술집에도 들르고 고깃간도 찾고 거리의 잡담을 익히고 품팔이도 하는(『전등록』)” 스승을, 제자들은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스님께서는 도인이신데 왜 이렇게 사십니까?” 그러나 혜가는 “내 마음을 내가 길들이고 있는 중인데 너희들이 웬 참견이냐”며 물렸다. 일설에는 북주北周의 무제가 일으킨 중국역사상 두 번째 법난(574년)에, 만신창이가 된 승단에 대한 비유라고 이른다. 아울러 실제로는 팔도 ‘자른’ 게 아니라 난리 통에 ‘잘렸다’는 것이다. 파국은 부처라 해서 봐주지 않는다. 역사적 배경을 제쳐둔다면, 혜가의 ‘몰락’은 자발적이다. 내 마음 내가 길들인다 … 그의 순심順心은 바깥 경계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마음에 아무런 푯말과 깃발을 세우지 않음으로써, 망념에 휘둘리거나 시달리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산다는 건 이러나저러나 산다는 것’일뿐이라는 알맹이에 도달하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라는 절망과 상대할 필요가 없게 된다. ‘특별하다’는 껍데기와 ‘괴상하다’는 지청구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므로 ‘무심’은 최악의 상황을 견딜 수 있는 각오이자 저력이기도 하다.
“초인超人이란 몰락을 자청하는 인간”이라는 니체 Nietzsche의 잠언과 겹치는 지점이다. 달마가 줄곧 강조한 본성本性이란, 마음 속 깊은 곳의 보물 같은 게 아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뜻하며, 이번 생에 주어져 있는 몸뚱이 외에는 별달리 진실이라 말할 것이 없다는 확신이다. ‘누구 아들’, ‘어디 소속’, ‘나의 한계’, ‘남의 허물’ 따위의 거품을 걷어낸 뒤에 남는 최후의 자아는, 단출하지만 단단하다. 얼핏 요란하고 비열한 현실에선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힘이지만, 현실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힘이라는 점에서는 일견 요긴하다. ‘다들, 개와 소의 일이다. 신경 쓰지 말라.’는 한없이 차갑고 투명한 미소는 “갈 길은 먼데 눈이 내린다”는 문장을 “갈 길이 있고 눈은 내렸다”는 문장으로 바꿔놓는 마력을 지녔다. 다시 걸음으로써, 다만 걸음으로써, 나는 나의 마음을 편안
하게 해주었다.

장영섭
집필노동자.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불교신문사에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눈부시지만, 가짜』, 『길 위의 절』, 『공부하지 마라』, 『그냥, 살라』,『떠나면 그만인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