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나하나 생명의 씨앗

경북 예천 용문사 <화장찰해도>

2014-02-08     불광출판사


01 02
용문사 <화창찰해도>(조선 후기, 마본채색, 230x297cm).
우리가 살고 있는 연화장세계를 하나의 화폭에 펼쳐 보여주고 있는 불화. 거대한 연꽃이 만개하였고 그 안에는 ‘불성’이라는 씨앗이 가득하다.
 
경북 예천 용문사로 가는 길은 하얀 사과꽃으로 끝없는 밭을 이루었습니다. 좁고 긴 국도 양쪽으로 향기로운 꽃바다의 물결이었습니다. 시간이 멈춘 듯한 따사로운 한가득 햇살 속에서 벌들은 꽃 사이를 붕붕 오가며 분주했습니다. 이제 곧 꽃송이는 수정하여 생명을 품고 열매를 맺고, 열매 속 씨앗은 다시 대자연과 합일하여 생명의 분화를 거듭하겠지요.
 
 
| ‘불성佛性’이라는 씨앗
예천 용문사에는 이러한 생명 탄생의 비밀을 간직한 <화장찰해도>라는 불화가 있습니다.(도판01, 도판02) 거대한 연꽃이 활짝 피었고 그 안에는 생명의 씨앗이 가득합니다. 이 동그란 씨앗 안에는 부처님이 그려져 있기도 하고, 대신 부처님의 이름이 쓰여 있기도 합니다.(도판03~07) 바로 ‘불성佛性’이라는 씨앗의 표현입니다.
 
“세상의 모든 중생들이여, 온 우주에 두루 비치는 찬란한 빛의 세계 씨앗(世界種) 속에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부처님 세계가 있다. 그 속에는 다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무수한 넓고 큰 세계가 있어 각각으로 의지하여 머무르기도 하고, 각각의 형상과 각각의 체성과 각각의 방면과 각각의 들고 남과 각각의 장엄과 각각의 경계와 각각의 행렬과 각각의 무차별과 각각의 힘으로 서로 더해 유지하며 두루 에워싸고 있느니라.”
-『화엄경』 「화장세계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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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한가운데 금빛 여의주 속에는 지권인의 비로자나부처님이 앉아 계시다. 지권의 손 모양은 ‘삼라만상은 모두 하나의 바탕에서 나왔다’는 뜻.



04 05
연화장세계의 구성. 세계의 맨 아래에는 바람 소용돌이인 풍륜, 그 위에 끝없는 바다인 향수해, 그 바다에 떠 있는 거대한 연꽃. 연꽃은 금강산이 둘렀고, 그 안에 연화장세계가 펼쳐진다. 각 세계에는 20중으로 중첩된 세계가 다시 중중무진의 세계를 품었다.
 
| 끝없어라, 중중무진의 세계
작품 속에는 이 ‘찬란한 빛의 씨앗’이라고 하는 ‘세계종世界種’의 이름이, 빨강, 검정, 노랑, 녹색, 파랑, 분홍 등의 영롱한 여의주 안에 쓰여 있습니다.(도판06) 세계종은 바로 부처님의 명호이기도 한데, 정주륜(淨珠輪, 청정 보배 구슬)・불광명(佛光明, 부처님 광명)・금월안영락(金月眼瓔珞, 금빛달 눈동자 구슬)・비로자나변화행(毘盧遮那變化行, 온누리에 비추는 빛의 작용)・광명편만(光明徧滿, 빛이 두루 가득함)・청정행장엄(淸淨行莊嚴, 청정함으로 장엄 ) 등의 이름들이 크고 작은 마니보주 씨앗 속에 정갈하게 쓰여 있습니다.(도판07) 금 글씨 또는 붉은 글씨로 세계종인 부처님 명호가 쓰여 있거나, 아니면 직접 부처님이 여의주 속에 앉아 계시기도 합니다.(도판09) 아! 연화장세계의 중중무진한 모습을 한 폭의 그림으로 완성한 작품입니다.
그림 한가운데에는 금빛 여의주 속에 지권인智拳印 을 한 비로자나 부처님이 앉아 계십니다.(도판03) 문수・보현보살과 아난・가섭 존자를 거느리고 계시네요. 그리고 주변은 열 분의 부처님 구슬이 둘렀는데, 지권인・설법인說法印・촉지인觸地印을 번갈아 하고 계십니다.(도판02) 그러니 비로자나・노사나・석가모니의 삼신三身입니다. 한가운데의 금빛 여의주 속 비로자나 부처님은 지권인의 손 모양을 결하고 계십니다. 이 모든 불성의 씨앗(세계종)이, 법계에 충만한 부처님들이, 연화장세계의 삼라만상이 ‘모두 하나’라는 뜻입니다. 모두 하나의 바탕에서 나왔다는 의미입니다.
 
 
| 나는 하나의 모래알
“온갖 세계종이 산의 형상을 짓기도 하고, 강과 하천의 형상을 짓기도 하고, 나무와 숲의 형상을 짓기도 하고, 누각의 형상을 짓기도 하고, 태胎의 형상을 짓기도 하고, 연꽃의 형상을 짓기도 하고, 중생들의 몸 형상을 짓기도 하고, 구름 형상을 짓기도 하고, 부처님 상호의 형상을 짓기도 하고, 빛의 형상을 짓기도 하고, 모든 장엄거리의 형상을 지으니 이와 같은 것이 세계 바다 미진수의 형상으로 있느니라.”
-『화엄경』 「화장세계품」
 
이러한 불성佛性들이 모였다 흩어지고 들고 나며 임시적으로 형상을 지은 것이 (나를 포함한) 삼라만상이구나! 불성은 수많은 ‘세계종(세계의 씨앗)’으로 묘사되어 ‘부처님’의 이름이 하나하나 붙여졌습니다. 신묘한 에너지로 충만한 씨앗은 ‘여의주’ 또는 ‘마니보주’ 또는 신령한 ‘보배구슬’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모두 ‘불성’을 표현하는 같은 말입니다. 화엄경을 읽다 보면, 이 거대하고도 아득한 망망대해 같은 우주 속에 ‘나는 하나의 모래알’임을 문득 알게 됩니다. 아마도 참선의 끝에서 보게 되는 것은, 애초 나를 잉태했던 ‘빛의 씨앗’이겠지요. 거기서 더 나아간다면, 광활한 진리의 바다 속으로 풍덩 녹아들어 버리겠지요.
 


06 07
정주륜(청정 보배구슬)・불광명(부처님 광명)・금월안영락(금빛달 눈동자 구슬)・비로자나변화행(온누리에 비추는 빛의 작용)・광명편만(빛이 두루 가득함) 등 오색 빛깔의 여의주 안에는 ‘불성의 씨앗’이라고 하는 ‘세계종世界種’의 부처님 이름이 쓰여 있다. 세계종(빛의 씨앗)은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또는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실체를 말해주고 있다. 우주는 이러한 불성의 입자들로 구성되었다. 또한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 그리고 우리 몸 속의 무수한 세포도 마찬가지이다.
 
| 연화장세계의 의미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padma garbha loka dhātu)란 무엇일까요? 산스크리트어 어원을 보니, 파드마padma는 ‘연꽃’이고, 가르바garbha는 ‘생명을 품은 태胎’입니다. 우주를 탄생시키는 원천을 ‘생명을 품고 있는 자궁’에 비유하였습니다. 연화장蓮華藏은 여래장如來藏과도 상통합니다. 여래는 하얀 연꽃에 비유되고, 이는 무한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에너지를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특징은 ‘청정’과 ‘광명’입니다.
『화엄경』의 「연화장세계품」(또는 「화장세계품」)을 보면, 먼저 세계의 맨 아래에 미진수의 풍륜風輪(바람의 소용돌이)이 있고, 그 위에 향수해香水海라는 미진수의 바다가 있고, 그 위에 거대한 하얀 연꽃이 있고, 주변을 금강륜산金剛輪山이 둘렀고, 그 안에 세계의 씨앗(世界種)이 있어 이를 연화장세계라고 한다고 합니다.(도판03) 이 세계에는 티끌 수보다 많은 세계가 20중으로 중첩된 중앙세계를 형성하고, 다시 111개의 세계가 그물과 같이 둘러있어 세계망世界網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세계에서는 미진수의 부처님이 출현하시고, 또 중생도 그 가운데에 충만하다고 합니다. 아, 방대한 우주 탄생과 현상 과정을 따라가자니 읽는 도중 머리가 핑핑 돌 지경입니다.
이러한 광대무변한 세계를 본 작품 <화장찰해도>에서는 한 화폭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지를 아름답고도 간결하게 구성해내고 있습니다. 경전에서는 불가사의할 정도로 다채로운 표현들로 연화장세계의 구성을 말하고 있는데, 풍륜・향수해・세계종・중층의 세계・세계망 등은, 모두 보배 구슬(여의주)의 입자들로 구성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작품에서는 이러한 세계종(불성의 씨앗)을 하나하나 영롱한 여의주로 표현해 내고 있습니다.
 
| 연꽃, 생명 탄생의 통로
‘바다(물) → 연꽃 → 세계의 탄생’이라는 연화장세계 출현의 순차적 과정을 보면, 고대 인도문명의 창조 신화와 유사한 면이 발견됩니다. 절대 진리인 비슈누 신이 바다에 누워 세계를 생성코자 명상에 들어가니, 그의 배꼽에서 광명의 연꽃이 피어났고, 거기서 창조신인 브라만이 나타나 자신의 분신들로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것입니다. 브라만은 ‘다자多者인 동시에 일자一者’라고 정의되는 무한 불변의 최고신입니다. 브라만은 트리무르티(삼신일체, 三神一體)를 통해 현신함으로써 세상일에 관여하는 살아있는 실체가 된다고 합니다. 비로자나와 삼신의 개념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이 세상에 나오는 원리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연꽃’은 ‘절대 진리’와 ‘그것의 화생化生’ 사이에 연결 또는 통로가 되는 매체 역할을 합니다.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들은 연꽃 위에 앉아 계시거나 서 계시는데, 연꽃의 의미는 사뭇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화생의 통로로서의 연꽃, 원천에 생명을 더해 현현시키는 신성한 힘의 상징으로서의 연꽃임을 알 수 있습니다.
 


08 09
진진찰찰법왕신塵塵刹刹法王身. 온 세상이 부처님 몸 아님이 없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중중무진 사사무애의 세계 속 한 알의 씨앗과도 같다.
 
| 사사무애, 차별없는 세상
『화엄경』의 「연화장세계품」을 읽다보면, 우리는 불성이 분화되어 만들어진 피조물임을 알게 됩니다. 본래 신적인 실체의 현현 또는 응신으로서의 삼라만상 그리고 나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당연히 내 안에는 신이 내재해 있겠지요. 절대 존재의 자기표현으로서의 나이니, 나 역시 절대 존재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중생에게는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이 있다는 것은 지당한 말씀입니다.
연화장세계란 개념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관점을 돌려놓습니다. 우리는 모두 저 세상에서 튀어나온 하나의 물방울 또는 씨앗들입니다. 세상은 이 다채로운 생명의 씨앗들이 노닐다 가는 곳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커다란 바탕 위에서 ‘생명’이라는 활동을 하다가, 다시 이 바탕으로 돌아가는, 그랬다가 (조건이 마련되면) 다시 나오곤 하는, 그런 들락날락하는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개개인은 하나의 꽃이며, 또 생명을 품고 있는 씨앗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온 세상이 부처님 몸 아님이 없군요(塵塵刹刹法王身). 일본의 한 원로 불교학자는 화엄경 사상을 한 단어로 ‘조화’라고 했습니다. 이제야 그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세상은 다채로운 생명의 씨앗들이 조화롭게 지내다가 가는 곳입니다. 우리들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이 생명을 존중하며 서로 조화롭게 지내는 일뿐입니다.
화엄의 세계를 중중무진 사사무애라고도 표현합니다. 사사무애事事無碍란 사건 사건마다 사람 사람마다 물건 물건마다 아무런 걸림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속세는 사사건건, 무애(無碍, 장애 없음)가 아니고 유애(有碍, 장애 있음) 투성이입니다. 실제로는 사사무애인데, 우리는 중생심(분별심)으로 사사유애를 만들고 있는 것뿐입니다. 화엄사상으로 보면, 개개인은 불성의 다채로운 표현일 뿐입니다. 우리는 돈, 신분, 출신, 성별, 학벌, 결핍, 관습적 차별과 분별심으로, 생명의 활동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세상을 단박에 지옥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연화장세계는 거짓 번뇌에 휘둘리지 말고 진짜 세상을 보라고, 다채로운 꽃과 같은 이 세상을 보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계종世界種의 낱낱 다양한 문이 불가사의하여 다함이 없네 이와 같이 시방세계에 온통 가득하니 광대무변한 장엄이 신력으로 나타났네 시방세계에 있는 광대한 세계가 이 세계종 안에 다 들어오니 비록 시방세계가 그 속에 들어옴을 보나 실은 들어옴도 없고 들어감도 없네 한 세계종이 일체에 들어가며 일체가 하나에 들어가되 남음이 없으니 체상體相은 본래대로 차별이 없음이라 짝도 없고 한량없어 온 누리에 두루하도다
-『화엄경』 「화장세계품」
 
 
강소연(불교미술사학자)
일본 교토대학에서 「일본소재 조선전기 왕실발원 불교회화」 연구로 박사, 서울대 대학원에서 「조선 시대의 칠성탱화」로 석사, 고려대 인문대학과 런던 대학(SOAS)에서 「고려시대 극락도: 관경16관변상도」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교토대학 책임연구원를 비롯해 동아시아학술원 학술연구원, 동국대학 연구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을 역임했고, 조선일보 (주)디지틀조선 신문기자와 가나아트 미술기자로 활동했다. 일본 미술문화계 최고권위 학술상인 ‘국화상’ 장려상과 한국불교소장학자 ‘우수논문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홍익대학 겸임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