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청년 자연 속에 깃들다

연극배우 안병찬의 하동 쌍계사 템플스테이

2014-02-08     불광출판사

어렸을 때 아버지 따라 집에서 가까운 구리 망우산을 종종 올랐었다. 그런데 오르는 길에 무덤이 하도 많아 가기 싫다고 떼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자연스레 산과는 멀어졌다. 산에 가지 않으니 절과의 인연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절에 가본 것은 고등학교 수학여행으로 경주 불국사를 다녀온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렇게 십몇 년이 흘렀고 20대의 마지막 봄, 사찰문화를 제대로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절에 가는 길, 눈부시도록 환한 햇살을 받은 푸른 나무들 사이로 쌍계사가 보인다.
 
 | 차나무 시배지에서 차맛을 알게 되다
쌍계사에서의 첫 인상은 청량하고 상큼한 공기로 다가왔다. 잠시 걸음을 멈춰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빌딩 숲 사이로 사람들에게 치여 가며 들이마시고 내뱉었던 서울의 그것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눈을 뜨니 쌍계사가 더욱 평온한 모습으로 나를 받아준다. 적잖게 장난치기 좋아하고 까불거리는 나지만 가만히 입을 닫고 몸가짐도 차분해졌다. 저절로 겸손해지는 느낌이다. 거기에 회색 수련복으로 갈아입으니, 비로소 모든 것을 비우고 절에서 지낼 채비를 마쳤다. 그런데 모든 게 어리둥절하다. 처음 가본 장소, 처음 입어본 옷, 게다가 사찰 예법도 모르는지라 마치 방금 자대 배치 받은 이등병이 된 기분이다. 그때 스님께서 손짓하며 부르신다.
쌍계사는 차로 유명하다. 삼신산 기슭에는 12km나 되는 차나무 시배지가 있다. 막 올해 햇차가 나오는 시점이어서 차에 관련된 많은 행사가 하동에서 진행 중이었고, 쌍계사에서도 다도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다맥 전수 대법회와 108헌다례’에 참여하며 템플스테이가 시작되었다. 깨끗하고 연한 초록빛 가득한 차가 찻잔에서 찰랑거린다. 어쩜 색이 이리도 곱고 예쁠까. 한 모금 들이마시니,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차가 있었나 싶다. 따뜻한 온기에 쌉싸름하며 달짝지근 부드러운 차맛이 일품이다. 차를 삼켰어도 목에서 차향이 다시 올라와 입과 코를 간질인다.
차향을 음미하며 한 모금 더 마시는데, 불현듯 얼마 전 거금 들여 구입한 원두커피 핸드드립 세트가 떠오른다. 이전까지 차라고는 뜨거운 물에 티백 넣어서 먹어본 녹차밖에 없었다. 깊은 차맛을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도, 차를 우려 마실 수 있는 차도구가 핸드드립 세트를 대신했을 텐데…. 연거푸 몇 잔을 더 마시며 스님께 이것저것 여쭈니, 하동차문화센터에서 차 만드는 법을 체험해보면 차가 뭔지 제대로 알 수 있다고 한다. 쌍계사를 둘러보는 것은 잠시 미루고 차를 배우러 발걸음을 옮긴다.
쌍계사 지역의 차는 남부의 따뜻한 기후를 바탕으로 지리산의 비옥한 토양에서 맑은 물을 먹고 자란 차나무에서 시작한다. 어린 찻잎을 따 250~300도로 달궈진 무쇠솥에서 잘 덖는다. 덖은 잎을 멍석에 놓고 손으로 비벼 통풍이 잘 되는 곳에 건조시킨다. 덖고 비비기를 몇 번 더 반복하고 나면 비로소 차가 완성된다. 직접 덖기와 비비기를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스님과 함께 담소를 나누며 뜨거운 솥에서 차를 정성스레 덖었다. 덖은 잎을 멍석에 펼쳐놓고 힘을 조절해가며 비비니, 차가 동그랗게 말리면서 제법 모양새를 갖추었다. 차를 제대로 알기에는 한참 멀었지만, 차와의 첫 만남치고는 훌륭한 출발이었다.
 
 


장난기가 다분한 나지만 쌍계사에 들어선 후 몸가짐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저절로 겸손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모든 게 처음인 어리둥절한 상황, 때마침 스님이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스님이 내주는 차 한 잔에 쌍계사서의 적응이 시작됐다.
 


편안하다. 항상 붕 뜬 기분에 불안하기만 하던 마음이 앙금처럼 가라앉아 한결 맑아진 기분이다. 쏘는 법만 알았지 장전하는 법을 몰랐던 나를 돌이켜볼 수 있었다.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 쏘는 법만 알았지 장전하는 법을 몰랐다
쌍계사로 다시 올라와 도량 이곳저곳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대웅전에 들어가 부처님도 뵙고 시원한 마룻바닥을 손으로 쓰다듬어 보기도 했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 옆에서 멍하니 앉아도 있었다. 지금은 개방되어 있지만, 스님들이 여름과 겨울 3개월씩 들어가 안거할 때는 일반인 출입이 제한되는 금당에도 들어갔다. 바가지로 한 움큼 받아 벌컥벌컥 마시는 약수에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듯하다. 내가 하고 있는 일, 내가 해야 할 일, 내 삶부터 시작하여 안병찬이라는 이름까지도 모두 내려놓고 쌍계사라는 공간 속에 익숙해져 간다.
이런 편안함을 느낀 게 얼마 만인가. 항상 떠있고 불안해하던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으며 한층 맑아진 기분을 느낀다. 나에게 선물하는 진정한 휴식과 이완이다. 그동안 닥치는 대로 연극공연을 하며 쉴 틈 없이 앞만 바라보며 달려왔다. 호흡이 갑갑할 때면 담배 한 모금 태우며 가라앉히고, 마음이 답답할 때면 술 한 잔 기울이며 다스리곤 했다. 머리를 식히고 싶으면 가벼운 영화 한 편 보고 몸이 힘들 때면 침대에서 나오질 않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방법들이었다. 쏘는 법만 알았지 장전하는 법을 몰랐다. 미소가 지어졌다. 작지만 하나 깨달은 것이다. 다시 약수를 한 바가지 떠서 마시니 물맛이 달랐다. 처음보다 훨씬 상쾌하고 달다.
오후 5시가 되어 공양간으로 향했다. 전부 채식이다.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식단이었다. 내 식성은 고기가 없으면 아예 숟가락도 들지 않고, 한 그릇에 담는 게 싫어 비빔밥도 잘 먹지 않는 성향이다. 그런데 그런 내가 대접에 밥과 반찬을 모두 담아 비빔밥을 만들어 먹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아주 맛있게 말이다. 한 그릇을 싹싹 긁어 비운 후 다시 한 그릇을 더 비웠다. 어머니가 보셨다면 참으로 믿지 못할 풍경일 것이다. 그토록 생전 처음 먹어보는 절밥이 맛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는 이해가 안 가지만, 다시 또 맛보고 싶은 자연의 맛이다.
저녁공양을 마친 후 예불시간이다. 엄숙함 속에 예불이 시작되었는데, 알아들을 수 있던 말은 관세음보살뿐이었다. 절과 합장을 반복하며 예불의식을 따라 해보았지만 너무도 어색해 108배를 올리기 시작했다. 몸이 뻐근하고 다리 근육 아파오는 거야 그렇다 치고 숫자 세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방금 전에 50이라고 셌는데 다음 절을 하는 순간 50인지 49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108, 마지막 숫자를 세며 절을 끝냈지만, 솔직히 말하면 120배를 했는지도 모른다. 간절함보다는 의무적으로 108배를 마친 것 같다. 그런데 예불과 108배를 하고 대웅전을 나서는데 알 수 없는 뿌듯함과 맑은 기운이 내 몸을 감쌌다. 운동이다 생각하고 올렸는데 운동을 끝냈을 때의 기분이 아닌 묘한 뭔가가 있었다. 취침 시간, 그 묘한 것이 무엇인가 누워서 한참을 고민하다 촬촬 흐르는 계곡물 소리를 자장가 삼아 어느새 잠이 들었다.
 

템플스테이는 내가 미처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체험이었다. 한 장면 한 장면 가슴 속에 각인시켰더니, 그 이미지뿐 아니라 쌍계사에서의 모든 감각들이 오는 길 내내 온 몸에서 피어올랐다.
 
| 자연의 일부로 맞아주는 산풍山風과 차향茶香
산사의 아침은 고요함 속에 분주했다. 다시금 108배로 몸과 마음을 깨우고 아침공양으로 두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러시아워가 없는 산사, 그 자체로 평온했다. 절 마당으로 나와 도량 청소 운력이 시작됐다. 흐트러진 마음을 쓰는 것 같았다. 마땅히 청소하며 치울 것은 없었다. 다만 어지러진 흙들을 다른 흙들과 잘 어우러지게 쓸어내는 것뿐이었다. 또 스님들과 나란히 서서 비질을 하며 마당에 정갈한 결을 내는 것도 인상 깊었다.
아침 해가 산 위로 불쑥 고개를 내밀며 하늘 위로 솟아오른다. 포행하기에 좋은 날씨다. 수건을 목에 두르고 밀짚모자를 눌러쓴 후 스님과 포행길에 나섰다. 쌍계사에서 한 시간 정도 걸어올라 도착한 곳은 불일암이었다. 불일암 산행은 쌍계사 템플스테이의 하이라이트다. 지리산의 굽이진 절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웅장함과 푸르름에 넋을 잃고 한참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힌다. 왜 이렇게 모르고 살았을까, 뭘 얼마나 대단한 것을 한다고 그렇게 안간힘을 썼을까. 스님께서 눈빛으로 내 마음을 다독이며 차를 내주신다.
지리산을 바라보며 마신 그 차맛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차는 나를 자연 속으로 깃들도록 안내했다. 산을 에워싸는 시원한 바람과 향긋한 차향이 나를 자연의 일부로 맞아준다. 지리산 10경 중 하나인 불일폭포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내려가기 싫은 마음을 겨우 추스르고 다시 쌍계사로 내려왔다.
입고 왔던 옷으로 갈아입고 스님들께 감사의 작별인사를 전했지만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겠지요”라는 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터미널 근처 찻집에서 다양한 차를 골라 담았다. 차의 매력에 푹 빠진 것도 있거니와, 혹시나 이 차를 마시면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다시금 쌍계사의 향취를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템플스테이는 내가 미처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체험이었다. 한 장면 한 장면 가슴 속에 각인시켰더니, 그 이미지뿐 아니라 쌍계사에서의 모든 감각들이 오는 길 내내 온 몸에서 피어올랐다.
도시에서의 삶, 무엇엔가 떠밀려 살다보면 가끔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막상 쉬는 시간을 모처럼 갖게 되면, 집에서 홀로 뒹굴거리며 그동안 못 봤던 드라마나 예능 프로를 보거나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는 것이 휴식의 전부다. 처음 해본 템플스테이는 정말 값진 휴식이었다. 고즈넉한 절집에서 하루 머물며 경건한 예불을, 맑고 푸른 자연을, 마음을 다스리는 차를, 맛있는 공양을 만나보면 한층 풍요롭고 여유로워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쌍계사에서의 아름다운 1박 2일을 그리워하며, 북적거리는 카페 테라스에 앉아 보온병에 담아온 쌉싸름한 녹차 한 잔을 입에 머금는다. 그리고 다음 템플스테이 사찰을 떠올려본다.
 
 
안병찬
고등학교 1학년 때, 자신이 즐기며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다가 배우의 길을 걷게 됐다. 이후 오는 작품을 마다하지 않으며, 자신이 하는 작품이 최고요 자신이 맡은 인물이 최고의 배역이라는 생각으로 항상 즐겁게 작품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를 졸업했으며, 출연 작품으로는 영화 ‘결혼의 기원’, 연극 ‘두 인간’, ‘열여덟 번째 낙타’, ‘풍선’, 뮤지컬 ‘의순공주’ 등이 있다. 현재 청소년의 치열한 고민과 삶을 레슬링으로 유쾌하게 풀어낸 ‘레슬링 시즌’(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과 폭소범죄심리추리극 ‘쉬어 매드니스’(대학로 문화공간 필링2관)를 공연하고 있다.
 
쌍계사 템플스테이 안내

일정 | 연중 상시
문의 | 055)883-1901,
www.ssanggyesa.net
<우리 절에 안기다>는 한국불교문화사업단과 함께 만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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