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이 필요 없는 것이 진정한 힐링이다

2014-02-08     불광출판사
지도무난至道無難이니 유혐간택唯嫌揀擇이라. 단막증애但莫憎愛하면 통연명백洞然明白하리라.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다. 증오하거나 애착하지만 않는다면, 툭 트여 명백하리라.
-『신심명』
 
| 지극한 도는 어렵지가 않다
도 닦기가 어렵다고 말하는데, 사실 어려운 것은 아니다. 오직 간택을 꺼릴 뿐이다. 간택이라는 것은 분간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단지 증오하거나 애착하지만 않는다면, 툭 트여서 명백하다. 결국 지극한 도를 깨치려면, 증오심과 애착심만 쉬면 된다. 그래서 “쉬는 것이 깨달음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깨달음이라는 게 뭘 새로 얻는 게 아니라는 거다. 깨달음은 얻는 게 아니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얻으면 그것이 얻는 것이지만,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그렇다. 우리는 자성, 불성, 공성을 이미 가지고 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또 얻는가? 얻을 수가 없다. 왜 그런가? 온 세상에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충만해 있고 남에게도 충만해 있고 우주에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우주가 거기서 나왔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얻겠는가? 그것은 마치 바다 속에 있는 물고기가 바다를 얻으려고 하는 것과 똑같고, 허공을 날아다니는 새가 허공을 얻으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허공에서 태어나 허공에서 날다가 허공에서 죽는데, 허공이라는 게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바다 속에 사는 물고기가 바다라는 게 뭔지를 찾아다니는 것과 똑같다. 왜 그런가? 우리는 성품자리에서 일어나서 성품 속에서 살다가 성품자리에서 죽는다.
죽든 살든 상관없이 누구나 다 이미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얻는 게 아니라 쉬어주기만 하면 된다! 고정관념을 쉬어주기만 하면 되는데, 그 고정관념 중에 제일 큰 것이 증오하거나 애착하는 것이다.
 
| 증오와 애착의 정체는?
증오와 애착을 쉬려면 우선 정체를 파악해야 한다. 증오심의 정체가 무엇일까? 증오심은 게스트guest다. 주인이 아니라 손님인 것이다. 증오심이나 애착심이나 결국 뿌리는 똑같다. 손바닥을 위로 놓으면 증오심이고 아래로 놓으면 애착심이다. 마음을 당기는 데 쓰느냐, 미는 데 쓰느냐, 그 차이일 뿐이다.
증오와 애착의 감정이 일어나면, 얼른 알아차리고 닉네임을 붙여줘야 한다. 자기 닉네임(법명이나 별명)을 붙여서, “OOO가 누구를 미워하고 있구나.” “OOO이 누구를 애착하고 있구나.” 하면서, 카메라맨과 내레이터가 동시에 되는 것이다. 마치 영화 찍듯이, 연극 보듯이,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닉네임을 붙여서 표현을 해주어야 동일시가 사라지고 객관화가 가능해진다.
이것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관찰할 때 몸과 마음은 ‘닉네임의 몸과 마음’이 된다. ‘닉네임의 몸과 마음’은 ‘내’가 아니다. 닉네임의 몸과 마음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허망하다. 하지만 닉네임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관찰자’는 변화하지 않는다. 허망하지 않다.
 
| 모든 고통 사라지는 진언
『반야심경』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 행할 때에, 몸과 마음 텅 비었음 살펴보고 모든 고통 사라졌다.”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한다는 것은 무아법을 통찰하는 것이다. 그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가 없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무아법을 철두철미하게 사무쳐 깨달음을 얻으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 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사무치게 깨닫지 못 했으면, 이 육근의 무더기가 여전히 ‘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있으므로 나의 고통도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닉네임을 붙여 관찰해도 객관화가 안 되고 동일시가 되는 것이다. ‘육근의 무더기가 증오하고 있구나.’ 하면 되는데, ‘육근의 무더기인 내가 증오하고 있구나.’ 하는 것이다. 육근의 무더기를 ‘나’라고 여기니 당연히 증오가 남아있고, 애착이 남아있게 된다.
이런 때를 당해서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진언이 바로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쌍가떼 보디 쓰와하’이다. ‘가자. 가자. 건너가자. 완전하게 건너가자. 깨달음을 성취하자.’는 뜻을 지닌 이 진언이야말로 크게 밝은 주문이며, 위가 없는 주문이며, 동등함이 없는 주문인 것이다. 약간 응용해서 ‘가자. 가자. 건너가자. 완전하게 건너가자. 입자에서 파동으로!’라고 외우면 더욱 큰 효과를 체험하게 된다.
이것을 자꾸 연습해야 한다. 모든 고통 사라지는 진언! 이 주문을 계속 외우면 고통이 사라진다. 왜 사라질까? 입자의 삶에서 파동의 삶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입자는 ‘내’가 애착하거나 ‘내’가 증오한다. 파동은 ‘애착’만 있고 ‘증오’만 있다. ‘내가 애착’하는 게 아니고 ‘애착’만 있고, ‘내가 증오’하는 게 아니라 ‘증오’만 있을 뿐이다. 애착과 증오의 뿌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뿌리가 사라지니까, 현상이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입자에서 파동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꾸 스스로를 파동으로 만드는 연습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립자는 입자라고 생각하면 입자로 나타나고, 파동으로 생각하면 파동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관찰자 효과’다.
‘가자. 가자. 건너가자. 완전하게 건너가자. 입자에서 파동으로!’ 이렇게 자꾸 연습하다보면 어느덧 존재 자체가 파동이 되어버린다. 파동이 되어서 애착은 있더라도, 애착의 뿌리가 사라진다. 증오는 남더라도, 증오의 뿌리가 사라진다.
 
| 더 이상 힐링은 필요 없다.
결국 애착과 증오를 쉬는 근본적인 방법은 첫째, 이것들은 다 게스트, 즉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라고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다 닉네임을 붙여서 ‘OOO, 또는 육근의 무더기가 애착하고 있구나.’ 하고 관찰한다. 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쌍가떼 보디 쓰와하’ 즉 ‘가자. 가자. 건너가자. 완전하게 건너가자. 입자에서 파동으로!’라는 최상의 주문을 외우면 된다.
이 역시 주문을 외우고 있는 육근의 무더기를 닉네임을 붙여 관찰해야 한다. ‘아무개가 모든 고통 사라지는 주문을 외우고 있구나!’ 하고 관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꾸준히 연습하다보면 어느덧 관찰자의 입장에서 몸과 마음을 관찰하게 된다. 성품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본래 성품자리는 고통이 없는 자리이다. 공空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과 마음은 한 생각 분별심을 일으켜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아프다. 몸은 ‘생·로· 병·사’하고 마음은 ‘생·주·이·멸’한다. 몸과 마음은 변화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일정하게 멈출 수가 없다. 그리고 치유가 필요하다. 하지만 성품은 여여부동하다. 그리고 치유 또한 필요 없다. 오염되거나 병들지 않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은 아무리 치유하더라도 다시 바뀐다. 끊임없는 치유가 필요하다. 아무리 잘 치유해도 결국은 늙고 병들어 죽고 만다. 하지만 성품은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다. 이 성품의 입장, 즉 관찰자의 입장이 되어 더 이상 아무런 힐링이 필요 없음을 터득하는 것이 진정한 힐링이다.
 
 
월호 스님
행불선원 선원장. 동국대 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쌍계사 조실 고산 큰스님 문하로 출가하였다. 쌍계사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제방 선원에서 정진하였으며, 고산 큰스님으로부터 강맥을 전수받았다. 현재 조계종 교수아사리 및 쌍계사 승가대학 교수 소임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당신이 주인공입니다』, 『언젠가 이 세상에 없을 당신을 사랑합니다』, 『문 안의 수행 문 밖의 수행』, 『할! 바람도 없는데 물결이 일어났도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