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향한 정신적 아우성 혹은 몸부림

공덕 功德

2014-02-08     불광출판사
 

양무제 짐朕이 즉위한 이래 절을 짓고 경經을 쓰고 스님을 기른 것이 셀 수가 없다. 어떤 공덕功德이 있겠는가.
보리달마 전혀 공덕이 없다.
양무제 왜 그런가.
보리달마 인간과 하늘이 베푼 작은 결실일 뿐 끝내 번뇌의 씨앗이다.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는 것과 같으니 헛되고 헛되다.
양무제 진정한 공덕이란 무엇인가.
보리달마 청정한 지혜는 오묘하고 원만한데, 비어 있으며 고요하다. 세상의 알음알이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양무제 어떤 것이 성스러움인가.
보리달마 그런 것 없다.
양무제 짐을 대하고 있는 그대는 누구인가.
보리달마 모르겠다.
『벽암록』 제1칙 ‘확연무성廓然無聖’
 
마음은 몸에 얹혀산다. 질병과 갈등에 평생을 시달려야 하는 게 몸이다. 넘어지기 일쑤에 욕먹기 십상인 몸을, 마음이 돕고 달랜다. 하여, 마음은 숨통이 막히는 날까지 괴롭고 불안하다. 사람의 탈을 쓴 생명은 말끝마다 희망과 핑계를 생산해내며, 위기를 면하고 기회를 탐한다. 죽음에 대한 의도적 망각도 전략 가운데 하나. 그러나 삶의 원형은 죽음이며, 순서와 형식에 차이가 있을 뿐 어떤 식으로든 공평하게 파국을 맞는다. 더구나 원하는 만큼의 복을 누리기엔, 가뜩이나 좁은 아랫목에 남의 뱃살들만 가득하다. 통재라. 뾰족한 수가 없음을 알면서도 마음은 칼을 갈거나 기도를 한다.
중국의 중심은 중원中原이다. 남으로는 양자강, 북으로는 요하에 이르는 화북華北 지방을 가리키며, 황하黃河가 가로지른다. 중국문명의 발생지로, 중원을 지배하는 자가 곧 대륙의 주인이었다. 양자강 이남의 국가는 아무리 드넓은 영토를 가졌더라도 열등감을 느꼈다. 남북조南北朝 시대는 사상 최초로 한족漢族이 이민족에게 중원을 빼앗겼던 시절이다. 서기 432년부터 589년까지 북조는 다섯 오랑캐가 열여섯의 나라를 쌓고 허물었으며, 남조는 송宋, 제帝, 양梁, 진陳의 순서로 국호와 태조가 바뀌었다.
남조의 양을 건국하고 무제武帝로 등극한 소연(蕭衍, 464~549)은 중국 역사상 가장 불심이 깊었던 황제다. 본래 유교와 도교에 흥미를 느꼈으나 불교를 만난 뒤에는 곁을 주지 않았다. 불사면 불사, 경학이면 경학, 계율이면 계율에서 끝장의 모범을 보여준 동북아의 전륜성왕轉輪聖王. 신神에 필적하는 오만과 쾌락과 사치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청정한 생활은 고승대덕을 무색케 했다. 교단과 국민들은 황제보살 또는 보살천자라고 떠받들었다. 그가 재위한 48년 동안 중국인들은 펄펄 살아 숨 쉬는 불국토를 봤다.
전국에 지은 절만 3,000여 개다. 스스로 보살계를 수지하면서 권속과 백관百官은 물론 일반서민들까지 계를 받게 했다. 동태사同泰寺 『반야심경』 강설법회에는 외국의 사신까지 끌어다 앉혔으며, 14일간 계속된 법회의 참여인원은 30만 명이었다. 친히 절에 머물며 청소를 하고 스님들의 옷을 빨기가 수차례였다. 술과 고기를 끊고 일일일식一日一食을 실천했으며, 밥상엔 콩과 간장뿐이었다. ‘단주육문斷酒肉文’을 공포해 제사 때 산 목숨을 죽이는 것을 금하고, 과일과 채소로 대신하게 했다. 전국의 도관을 폐쇄하고 도사를 환속시키며 불교와 경쟁했던 도교의 씨를 말렸다. 교리에도 밝아 경전의 소(疏, 주석서)가 수백 권에 이른다. 피치 못하게 사형에 처해야 할 때는 펑펑 울었다.
원활한 통치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눈가림이라 깎아내리기엔, 신앙이 너무나 저돌적이다. 양무제가 불교에 이토록 열광하게 된 이유는 뚜렷치 않다. 다만 『벽암록』에 따르면 공덕功德에 대한 관심이 상당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부처님을 위해 이 정도로 ‘쐈으면’, 살아서의 태평성대는 떼어 놓은 당상이요 죽어서의 영생 역시 온당한 요구라는 확신이 엿보인다. 성스러운 부처님의 땅에서 온 큰스님이라니, 확답을 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의례적인 격려 한 마디나 뱉어주면 어물쩍 끝날 자리다. 그러나 달마는 맞장구를 향한 그의 기대를 단칼에 잘라냈다. 무더기로 쌓은 선업善業이 부질없는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핀잔. 하기야 역대 최강의 선인善人이 되겠다는 꿍꿍이에 국고를 탕진하고 민초들에게서 ‘사는 재미’를 빼앗았으니, 무턱대고 박수를 쳐주기도 난감한 노릇이다.
양무제의 치세는 화려했으나 말년은 비참했다. 북조를 지배했던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분열됐으며, 후경侯景이란 자는 동위의 군벌이었다. 나라의 실세가 바뀌고 숙청의 기운을 감지하자, 곧장 군사들을 이끌고 양으로 투항했다. 그런데 별안간 양무제가 자신의 모국과 화친을 맺으려 한다는 소식에, 지레 겁먹어 반란을 일으켰다(548년 후경의 난). 황궁에서 쫓겨난 양무제는 감시와 곤궁 속에서 이듬해 생을 마감했다. 필생의 역작으로 가꾼 제국 또한 순식간에 고꾸라졌다. 투철하고 염결했던 신행信行과 어이없는 말로와의 개연성은 확실치 않다. 여하튼 공덕은 없었다. 인간이라는 ‘추종’과 하늘이라는 ‘행운’의 교묘한 조합이 빚어낸 업적은, 기어이 번뇌의 씨앗이라는 본모습을 되찾아 쪼그라들었다.
『자비도량참법慈悲道場懺法』. 먼저 간 황후의 극락왕생을 빌 요량에, 양무제가 손수 엮은 기도서祈禱書라 전한다. 간밤의 꿈에 구렁이가 되어 나타난 아내가, 천벌을 받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에 남편은 영험하다는 제문祭文을 가려 뽑아, 생전의 고약한 성질머리에서 비롯된 그녀의 죄업을 씻어주었다. 자비도량참법기도는 오늘날 국내 사찰에서도 자기위안과 기복을 목적으로 유행 중이다. 뭍과 바다에 떠도는 넋들을 달래준다는 수륙재水陸齋 역시 양무제가 고안했다는 일설이다. 망자의 울화통을 어루만져주는 행위의 뒤춤에선, 현세의 안녕과 내세의 본전치기 이상을 보장받겠다는 그늘의 의도가 곧잘 발견된다. 공덕을 향한 양무제의 헐떡임은, 사람의 얼굴과 형편을 바꿔가며 대대로 전승되고 있다.
생명의 목적은 생명이다. 운깨나 풀린다 싶으면 권력을 구하고, 신세가 변변치 않을 때는 연명에 만족한다. 좋은 옷을 걸치고 달콤한 말만 듣는 신분을 얻으려면, 일단 몸뚱이부터 건사하는 게 먼저다. 결국 복락의 출발이자 기반은 안정인 셈이다. 몸의 안전을 위해 마음은 줄기차게 ‘마음’을 내고 골머리를 앓으며 초월을 꿈꾼다. 커다란 실패 앞에는 변명을, 거듭되는 실패 앞에는 순리를 가져다 덧댄다. 어떻게든 자신自身의 정당성을 유지하고, 지속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신적 아우성과 몸부림. 삶 속에서 건질 수 있는 물건이란, 그저 생각의 누더기다.
물론 인생이란 슬기로운 ‘자기기만’과 합리적인 ‘자기합리화’의 연속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회피하거나 왜곡함으로써, 생계에 쥐구멍을 트고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게 마련이다. 믿음은 무지의 소치라지만, 진통제이자 마취제로서의 기능이 만만치 않다. 속임과 꾸밈은 간사하지만, 간사한 것들에 저항할 무기가 된다는 점에서 유효하다. 단, 아무리 속이고 꾸미고 믿어봐야 근원적인 목마름은 해소할 수 없다는 게 심리적 약물들의 한계다. 살아있는 것들이 목마른 이유는, 어리석거나 가난해서가 아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화근인 것이다. 요컨대 망상과 질곡으로서의 삶에서 벗어나는 궁극의 해법은, 살아있다는 사실을 각인시키는 미련과 회한을 덜어내는 일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 선가禪家의 오랜 충고다. “문자를 세우지 말라”는 건 일견 온갖 의미와 가치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삶에 대해 평가하지 말고 해석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것’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거나 덫이 있다. 공덕이란 상상의 산물이거나 헛된 연금술이거나 입에 발린 상혼에 불과하다. 심지어 무심無心일 때는 삶조차 발생하지 않는다. 바깥으로만 싸돌아다니던 마음, 헛것과 손을 잡고 몸을 섞던 마음을 수거해 밥을 먹이고 잠을 재운다.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란 ‘깨끗하다’보다는 ‘허허롭다’는 느낌에 가깝다. 좀체 사는 것 같지가 않아, 비로소 편안하다. “성스럽다는 것은 화려하고 비싼 것”이라는 달마의 독해讀解를 공감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장영섭
집필노동자.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불교신문사에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눈부시지만, 가짜』, 『길 위의 절』, 『공부하지 마라』, 『그냥, 살라』, 『떠나면 그만인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