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세월을 두고 일을 성취하련다

법사노트

2007-06-17     관리자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는 세상이라 그런지 모르지만 저마다  '빨리 빨리' 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수행하겠다는 사람이나 포교하겠다는 사람도 예외는 아니어서 꾸준히 하려고 하기 보다는 빨리 끝내버리고 싶어하기 때문에 어려운 수행이나 일은 기피하고 쉬운 수행이나 일만을 선호한다.

   사람은 있는지 조차도 잊어버릴 때가 있게 마련이듯이 모든 일이 순조롭게만 진행되면 자기의 인생 가운데 어려움이 닥치지 않을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조그마한 장애에 부딪쳐도 극복하지 못한 채 좌절하고 만다.   그래서 [보왕삼매론] 에 이르기를  "일을 계획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풀리면 뜻이 경솔해지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많은 세월을 두고 일을 성취하라."고 하였나 보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모 대학 불교학생회에서 지도법사로 추대하기에 흔쾌히 승락하고 첫 법회를 갖는데 십여 명이 된다던 회원은 고작 네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기독교계 학교에서 어려움을 극복해가며 애쓰는 모습이 그저 좋아 여기저기 쫓아 다니면서 자료와 책을 구해다 주고 법회에 빠지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

   법회를 주관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창립기념행사로 수련대회를 갖기로 하였다.   법회를 활성화 시키기 위하여 재학생들에게 홍보하고 졸업한 선배들의 동참도 권유하였더니 이십여 명이 동참하겠다고 하였다.   사찰 섭외와 자료집 준비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정작 수련대회를 갖기로 한 날 만나기로 한 시간에 한 명도 사찰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공양주 보살님은 점심 공양을 준비해 놓고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오는 데 대답이 궁색했다.   길을 잘못 찾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어 산아래 절입구 정류장에 내려가 보았더니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학교에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되어 학교로 가보았더니 법당은 텅비어 있었다.   참으로 난감했다.   길이 엇갈린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다시 사찰로 올라 갔더니 약속한 시간에서 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한 명도 없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잠깐 망설이다가 공양주 보살님께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려는데 산아래에서 낑낑대며 올라오는 사람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학생회 회장이 배낭을 메고 스님과 공양주 보살님께 드릴 선물을 양손 가득히 들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일행도 없이 혼자였던 것이다.   약속장소에서 기다렸는데도 아무도 오지 않아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법사님이 걱정하실 것 같아 늦게라도 올라왔다는 것이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또 들고 산길따라 한 시간을 걸어오느라 애쓴 회장을 보는 순간 치밀어 올랐던 짜증이 사라지면서 오히려 신뢰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수련대회를 계획대로 진행해야겠다는 생각에서 회장에게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법사님만 괜찮으시다면 계획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의욕을 잃은 채 착잡했었는데 저절로 힘이 솟는 것이었다.

   대중도 없는데 또박또박 식순대로 진행하는 것을 보니 회장도 그런 것 같았다.   우리 둘은 주거니 받거니 화답해가며 삼귀의, 반야심경, 청법가, 입재법문을 마치고 오백배 정근. 참선 수행을 차례대로 해나갔다.   저녁이 되니 졸업한 선배 세 명이 올라왔는데 기가 막히기도 하고 대단하다는 묘한 웃음을 띄는 것이었다.

   밤늦게 선배 두 명이 떠나간 뒤에도 우리 세 명은 이틀간의 수련대회를 차질없이 회향하였다.

   그 뒤 학생회에는 한 명 두 명 회원이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이 모든 것은 회장의 꾸준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 또한 이러한 경험이 오늘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고 있다.

   구정 선사는 수행자 시절에 은사님의 분부대로 솥을 아홉번이나 고쳐 거는 데도 불평 한마디 없었다고 하니 우리들의 사표가 되고도 남을 만하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듯이 기다림은 우주의 질서이다.   한겨울 산사의 뜨락을 거닐다 보면 눈밭 속에서 이름모를 파란 싹이 찬란한 생명을 안고 조용히 자기의 날을 기다리며 차가운 바람을 이겨내는데, 이러한 기다림의 아름다움을 보고 놀라기도 한다.    이제 우리 모두 '빨리병' 에서 벗어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