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변하지 않을 아름다움을 담아

발우 명인 김을생

2014-02-08     불광출판사


발우 명인 김을생
  
이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참으로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삼아 깨달음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 「오관게」
 
| 목기 산지의 옻칠 장인
흔히 발우공양을,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가장 친환경적인 식사법이라고들 말한다. 발우공양은 내가 먹는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부터 시작한다. 식사 과정에서 음식 한 점의 맛조차 놓치지 않고 행위와 마음에 집중하기 때문에 발우공양은 그 자체로 수행이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식사를 하면 그릇이야 무슨 상관 있을까마는 실제로 발우공양을 할 때는 특별한 그릇을 사용한다. 이른바 ‘바리때’라고 불리는 ‘발우鉢盂’다.
한국불교에서 사용하는 발우는 전통적으로 목기를 사용해왔다. 갈수록 플라스틱 발우가 범람하고 있는 현실이지만 요즘도 목기 발우가 생산되고 있다. 목기 발우를 만들고 있는 사람은 아직도 여럿이 거론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 바로 남원의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3호 옻칠장 김을생 씨다.
김 씨가 운영하고 있는 금호공예는 남원 실상사로 올라가는 길목인 산내면에 위치해 있다. 산내면이라는 명칭은 지리산 속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 예전부터 이곳은 목기의 산지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목기 장인들이 그 근방에 모여 각종 목기를 생산하고 있다.
“예전에는 실상사에 사는 대중이 1,000명이 넘었다고 해요. 당연히 발우가 많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겠죠. 그렇게 유명한 남원목기도 그 옛날 스님들의 발우를 만들면서 시작됐다고 추정하고 있어요. 예전에는 이 동네에 농토도 별로 없어서 사람들이 목기를 만들어 먹고 살았죠. 이곳 주민의 60%가 목기로 생계를 유지했으니까요.”
산내면이 고향인 김을생 씨는 남원목기의 역사와 향토사에 대해 무척이나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김 씨의 말마따나 예전에는 남원목기가 전국적인 명성을 떨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예전에는 사람들이 생활도구로써 목기를 상당히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해방 즈음에는 아예 목기만으로 생활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전쟁을 위해 일제가 각 가정의 쇠라는 쇠는 죄다 쓸어갔기 때문이다. 김 씨는 그때가 남원목기의 전성기였다고 말한다.
“시대적인 배경이 그랬으니 내가 목기를 배우게 된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해방 후인 1949년에 뜻있는 분들이 100여 평 되는 공장을 인수해서 목기 학교를 세웠어요. 우여곡절 끝에 학교가 개교한 게 1951년 3월이었죠. 나도 6・25동란시절 중학교 2학년까지 마치고 자연스럽게 목기 학교에 편입을 했어요. 그때부터 목기와 인연을 쌓기 시작한 거죠.”
김 씨는 그곳에서 목기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이후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군대를 갔다. 공군장교로 10년간 복무했는데 제대 후 돌아와 보니 목기 시장이 많이 죽어있었다고 한다. 1957년경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한 플라스틱 때문이다. 군대에 있을 당시 김 씨는 종종 일본책들을 보고는 했는데, 가업을 이어가는 그네들의 모습이 그렇게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제대 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가업을 잇기로 했다.
 
| 더덕더덕 손으로 칠한 것이 우리의 옻칠
김을생 씨가 본격적으로 목기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1971년부터다. 그때부터 발우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만 해도 발우에 화학 도료인 니스를 칠해 만드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김 씨는 그 모습을 보고 화학 도료가 몸에 좋을 리 없으니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해가면서 옻칠을 배웠다. 어렵게 배운 옻칠로 한 달에 10벌 정도 발우를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스님들이 인정을 안 해줬다. 그래서 만든 발우를 짊어지고 다니면서 “한 달 동안 써보고 냄새 나고 색이 변하면 돈을 안 받겠소.”라고 외치며 스님들에게 발우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스님들 사이에 호평을 받기 시작하고 인기를 끌게 된 것은 물론이다.
“옻칠을 하면 목기가 잘 썩지 않고 멸균 효과가 있어 밥이 잘 쉬지 않아요. 우리의 칠이 그만큼 좋은 거죠. 세계적으로도 한국 칠이 좋다는 건 일본이 우리의 칠을 배워갔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그 맥이 거의 다 끊겨버렸죠. 안타까운 현실이에요.”
김을생 씨는 우리의 칠이 가진 특징에 대해 한참을 설명했다. 그중에서도 한국의 옻칠은 지금 처럼 균일하게 반질반질한 형태가 아니라는 말은 무척 인상 깊었다. 본래는 소꼬리로 만든 붓으로 칠을 묻히고 손으로 넓게 펴 발라서 칠이 더덕더덕 묻어있는 형태라는 것이다. 그것이 쓰면 쓸수록 반질반질해지고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깊은 미감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현재의 정교하고 반질반질한 칠은 전적으로 일본의 영향이란다.
나무로 만드는 다른 제품들처럼 발우를 만드는 과정 역시 꽤나 지난하다. 원목을 절단해서 초갈이(초벌깎기)를 한다. 그리고 음지에서 말린 후 다시 재갈이(재벌깎기). 마지막이 옻칠하기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발우는 밥, 국, 찬, 청수를 담는 4합 발우를 기본으로 종종 장류를 덜어먹기 위한 5합 발우가 사용되기도 한다. 물론 7합, 10합, 15합 발우를 만들기도 하지만 이것은 실사용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작품에 더 가깝다. 문득 좋은 발우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전통이 사양길에 접어드는 것도 막을 수 없는 흐름이겠지요. 하지만 나라가 잘 되기 위해서는 전통문화를 이어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수없는 위기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얼을 계승해왔기 때문이에요. 부디 젊은이들이 전통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계승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이 나라를 지탱할 수 있는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 전통문화가 살아야 우리가 산다
“좋은 발우라는 게 뭐 따로 있을까. 거의 대동소이하죠. 다만 몇 가지 기준은 있어요. 첫째 재질은 은행목이 좋아요. 발우는 겹쳐진 상태에서 잘 돌아가야 해요. 그런데 다른 나무는 습기에 민감해서 비만 오면 변형이 오기 십상이거든. 그러면 겹쳐진 상태에서 잘 안 돌아가요. 그런데 은행나무는 그런 게 없어요. 그래서 발우를 만드는 데 아주 좋은 재료라는 거죠. 둘째, 발우는 옆에서 볼 때 아름다운 선이 있어요. 그런데 그 선을 찾아내는 게 보통 일이 아니죠. 그래서 나무 깎는 사람의 기술이 중요해요. 마지막이 칠이죠. 칠이 잘 돼 있어야 발우를 오래 쓸 수 있으니까.”
김을생 씨가 만든 발우에는 은행나무 이파리그림과 함께 ‘을생乙生’이라는 글씨가 새겨진다. 김을생이라는 장인이 만들었다는 징표다. 자기의 작품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징표가 새겨진 물건은 죽는 날까지 고쳐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나이도 어느덧 팔순을 바라보고 있다. 이제는 외아들인 연수 씨가 그의 뒤를 잇고 있다.
남원 발우의 명성을 만방에 떨친 노장은 이제 별 욕심 없이 산다면서도 한 가지 바람을 내비쳤다. 이제는 죽어버린 목기시장을 되살리기 위한 바람이자 우리 사는 세상을 위한 부탁이었다. 발우에 칠을 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내내 그의 그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전통이 사양길에 접어드는 것도 막을 수 없는 흐름이겠지요. 하지만 나라가 잘 되기 위해서는 전통문화를 이어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수없는 위기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얼을 계승해왔기 때문이에요. 부디 젊은이들이 전통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계승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이 나라를 지탱할 수 있는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발우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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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36-35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