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터의 삶은 수행이다

2014-02-08     불광출판사

저는 프로레슬러입니다. 수백 년 전 영국의 시장 저잣거리에서 싸움하는 것을 보여주며 구경꾼들에게 돈을 받던 것이 제가 속한 장르의 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선수들의 안전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규칙에 대한 손질을 하게 됩니다. 이어 방송국을 필두로 거대 미디어와 자본이 투입되면서 프로모터들은 지금의 경기형태를 확립시켰습니다. 이런 내용만 보자면 불교와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프로레슬링이 가진 속성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또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링에서 싸우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모든 직장인이 돈을 위해서 일하지만 오직 돈만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아니듯 파이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싸우는 이유는 자신의 노력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프로파이터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 몇 년에서 10년까지의 준비기간이 필요합니다. 삶을 유지하기 위한 경제생활도 해야 하니 기간은 더욱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과정은 ‘불교의 수행’과도 흡사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만 합니다. 특히 체중감량 시 한번이라도 계율을 어겼을 경우 그것을 복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이런 엄혹한 수련과정을 거쳐서 링 위에 올라온 이들은 그래서 서로 상대방을 존중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챔피언에 오른 이는 어찌 해야 할까요? 그래서 챔피언에게는 또 하나의 의무가 생깁니다. 그건 바로 더 높은 산 더 넓은 바다로 나아가야한다는 것이죠. 자신에게 패배했던 선수들이 자신들의 노력이 부족해서 진 것이라는 자책을 하지 않고 영혼의 안식을 취할 수 있게끔 더 큰 도전을 해야만 합니다.
저는 프로레슬러입니다. 저는 김일과 이왕표를 저의 영웅으로 삼으며 이 세계를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렸을 때 당시 창창했던 김일의 시합을 보면서 ‘스님’인 줄 알았습니다. 제 주변에 머리를 박박 민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고 그런 분들은 가끔가다가 텔레비전에서 해주는 소림사 영화나 탁발을 하러 오시는 스님 외에는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소림사에서 권법을 배워 프로레슬러가 된 것이 아닐까’라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AFKN을 통해서 서양 프로레슬링의 영웅들이었던 헐크호건, 워리어를 만나면서 점차 김일은 제 머릿속에서 지워졌지요.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저는 28살의 나이에 회사 근처에 있던 프로레슬링 도장에 입문을 결심합니다. 당시 김일 선생님은 상당히 연로하신 데다 현역시절의 부상 때문에 걷기도 힘든 상태였습니다. 데뷔 후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로 기억합니다. 관중들은 반칙도 쓰지 않고 기술도 호쾌하며 잘생긴 상대선수에게 환호를 보냈고, 기술도 미숙하고 반칙마저 사용하는 저에게 야유를 보냈습니다. 그땐 특히나 그런 것들이 상당히 민감하게 느껴질 만한 신인시절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흉기를 사용하려다가 도리어 상대가 낚아채서 절 신나게 두들겨댔고 관객들은 박수까지 보냈습니다.
패배 후 선수대기실로 돌아오는데 목구멍이 막힌 듯 너무나 갑갑하더군요. 야유와 고통 그리고 이마에 흐르는 피까지. 제 모습을 저쪽 구석에 앉아서 안쓰럽게 보시던 김일 선생님이 한 말씀하시더군요. “악역은 맞는 게 이기는 거다.” 그런데 이 말을 제 귀로 듣는 순간 갑자기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면서 그와 함께 꽉 막혔던 무언가가 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이건 마치 세상의 모든 이치를 꿰뚫는 깨달음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때 휠체어에 앉아계신 김일 선생님에게서 구도의 막바지에 다다른 아우라를 느꼈다면, 제가 너무 과장되게 말하는 것일까요? 아닐 겁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은 제가 선생님에게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작년 여름 일감 스님의 부탁으로 전라북도 김제 금산사 템플스테이에 찾아가 강연을 했습니다. 그때 일감 스님의 머리를 보면서 김일 선생님이 생각나더군요. 아마 김일 선생님이 건강하시고 달변이셨다면 일감 스님 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김일 선생님 영전에 인사라도 함 다녀와야겠네요.
 
김남훈
육체파 지식노동자. 김남훈 오피스의 대표이자 OFK 대표이사, UFC 이종격투기 해설자다. 악역에 더없이 어울리는 외모와 달리 만화캐릭터 ‘키티’를 사랑하는 감수성을 지닌 남자다. TBS 교통방송 ‘김남훈의 SNS쇼’, KBS ‘호루라기’ 등에서 진행자로 활약했으며 현재 국민TV에서 ‘김남훈의 인파이팅’을 진행 중이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인기 강사이자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공저)』, 『통하면 아프지 않다』 등을 쓴 저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