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세상에 울려퍼지는 음성공양

부천 부처님마을 주지 보현 스님

2014-02-07     불광출판사

지금은 대중에게 잊혀진 이름 ‘이경미’. 그녀는 80년대 초중반 최고의 광고모델이자 인기가수였다. ‘오란C’를 비롯한 음료, 화장품, 제약회사 제품의 광고모델을 했고, 1984년 ‘개미들의 행렬’로 KBS 가요대상 후보에 올랐으며, 당대 최고 인기드라마였던 ‘사모곡’의 주제가를 불렀다. 1986년 ‘100분 쇼’ 생방송 도중 돌연 잠적했던 그녀가 지난 3월부터 다시 브라운관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승복을 입고 삭발한 모습, 보현 스님이다. 스님은 왜 화려한 스타의 삶을 떨쳐내고 수행자의 길을 선택한 것일까? 스님이 걸어온,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의 발자취를 따라가본다. 서울 서초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청아한 음성으로 회심곡과 천수경 독송을 녹음하고 있는 보현 스님을 만났다.
  
| 인기가수에서 ‘비구니 엄마’가 되기까지
: 인기가수로 승승장구하던 시절, 돈과 인기를 모두 내려놓고 출가를 결행하셨습니다. 연예계 입문과 출가의 계기가 궁금합니다.
1981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남산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광고업계 관계자의 눈에 띄어 갑작스럽게 음료광고 모델을 하게 됐어요. 그 광고가 의외로 반응이 좋아 여러 편의 광고를 찍게 되었고, 가수로도 데뷔하여 나름대로 돈도 많이 벌고 인기도 얻게 되었지요. 그런데 연예계 생활이 저하고는 안 맞았던 것 같아요. 돈과 인기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고, 꽉 짜여진 스케줄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방송하며 야간업소에서 노래할 때는 회의감도 많이 들었죠.
시간이 갈수록 머릿속은 그러한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고 본래의 나를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어요. 사실 저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출가의 원을 세운 사람입니다. 제가 살고 있던 동네에 절이 있었는데, 부처님 상호를 보고 있노라면 그렇게 마음이 평온해질 수 없었어요. 연예계 활동을 하면서도 승복 입은 스님만 봐도 환희심이 나는 거예요. 그런 느낌이 온 것 자체가 부처님의 가피가 아닌가 생각되네요. 그래서 내가 가진 모든 걸 홀가분하게 버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여러 차례 출가를 시도했지만, 완전히 출가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출가하는 것도 제 마음대로 안 되더라구요. 출가하려고 절에 가있으면 속가 부모님이 어떻게든 찾아내 끌고 오셨죠. 그래도 제가 뜻을 굽히지 않으니, 도깨비에 홀렸다며 병원에 입원시키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미국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부모님을 공항에서 따돌린 후 지리산으로 숨은 적도 있어요. 천신만고 끝에 1987년 수덕사 견성암으로 출가하였습니다.
 

서초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회심곡과 천수경 독송을 녹음하고 있는 보현 스님. 스님은 대중들이 부처님 가르침에 쉽고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자신이 가진 재능을 살려 음성공양으로 보시한다.
 
 
 
: 오랜 세월 장애인들을 돌보며 살아오셨습니다. 천안에 계실 때는 폐교에서 15명의 장애인들과 함께 사셨는데요. 그들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승가대학 3학년 여름방학 때였어요. 계룡산 신흥암에 가서 기도를 하는데, 제 뒤에서 누군가 열심히 절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아주 왜소한 아이였어요. 부처님을 좋아해 매일 절에 오는 아이였는데, 안타깝게도 너무도 일찍 세상을 떠났고 제가 49재를 지내줬습니다. 그 아이와의 아련한 인연 때문인지, 장애를 앓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자꾸 마음이 쓰이는 거예요. 제가 가야 할 길이 정해진 거죠. 이후 수원 성불원에서 장애인들을 돌보며 5년간 봉사활동을 했고, 1998년 천안의 폐교에 ‘부처님마을’을 열고 아이들을 보듬고 살게 됐습니다.
 
: 장애아 15명과 함께 사는 일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요. ‘비구니 엄마’로 사시면서 힘든 점은 없었나요?
늘 응급실 같은 상황이었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항상 아이들한테서 눈을 뗄 수가 없어요. 부처님의 원력을 느끼면서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니 초능력 같은 신비로운 힘이 생겨 난 듯해요. 밥을 하면서도 뒤에 눈이 달린 것처럼 누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감각만으로도 알게 되는 거죠.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나도 위험한 상황인지 아닌지 느낌이 오는 겁니다. 그러한 직감과 보이지 않는 부처님의 기운으로 해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봉사단체를 비롯해 늘 자기 일처럼 도와주는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죠. 가까이에 있는 수녀님과 목사님도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수녀님은 미술치료, 목사님은 봉사활동에 힘을 보태주셨습니다.
 
| 아름다운 음성공양으로 펼쳐지는 문화포교
: 그동안 ‘수미산’, ‘실타래’, ‘무생화’ 등 불교음반을 꾸준히 내시고, 베스트셀러 소설 『타래』를 비롯해 여러 권의 책을 출판하셨으며, 그림에도 만능이십니다. 예술적 재능을 타고 나신 것 같은데요.
천안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 때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려웠어요. 그래서 제가 가진 재능을 방편 삼아 음반도 내고 음악회도 열며, 그 후원금으로 부처님마을을 꾸려갈 수 있었지요. 그리고 매일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일지에 기록하다보니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아이들이 다음 생에는 온전한 몸으로 태어나기를 서원하며 아이들 얼굴을 많이 그려줬는데 동자승 그림을 사람들이 좋아하더라구요.
 
: 지난 해 경기도 부천에 포교원 부처님마을을 여셨습니다. 수도권에 포교원을 여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 혼자 힘으로 천안의 부처님마을을 운영하기에는 재정적으로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복지시설로 아이들을 떠나보내야 했지요.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건 불교계에선 아이들을 받아줄 곳이 부족해 이웃종교의 복지시설로 보내게 된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너무도 미안했지요. 다시 원력을 세우고 아이들을 데려올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 포교의 꿈을 안고 도심으로 들어오게 됐어요. 제가 가진 재능을 살려서 문화포교를 활력 넘치게 한다면 머지않아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바라며, 방송을 비롯해 보다 활발한 활동을 이어갈생각입니다.
 
: 부천 부처님마을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요?
부처님마을엔 음악이 있어요. 신도님들과 함께 흥겨운 노래로 소통하며, 불교는 접근하기 어렵다는 인식을 깨주려고 합니다. 그리고 천수경, 반야심경, 법화경, 금강경, 자비도량참법을 우리말로 독송하며 불교를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기도와 명상을 통해 마음공부로 이끌고, 이를 바탕으로 보살행과 이타행을 실천하기 위해 봉사로서 사회에 회향하는 것이죠. 그래서 지역의 어렵고 힘든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빛이 되어드리고자 지역포교에 힘쓰고 있어요.
 
: 직접 경험해본 연예계와 출가 생활을 비교해보면 어떻습니까?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시다면?
연예인 생활은 무대 뒤로 내려가면 짙은 쓸쓸함이 찾아오듯, 겉은 화려하지만 늘 적막함을 느끼며 허망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꽃이 확 폈다 지면 다시 소생할 수 없지만, 수행자의 길은 부처님의 영원한 생명, 즉 생과 사가 둘이 아님을 여실히 보고 뒤따르기에 살아있는 나를 볼 수 있어요. 앞으로의 계획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헤어진 아이들을 다시 불러 함께 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제가 가진 재능을 사회에 회향하고, 불교계 복지활동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미력하나마 힘을 보탤 생각입니다. 그리고 음악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치유하고 소통할 수 있는 음성공양의 장을 많이 마련하려고 해요. 그 첫 번째로 오는 10월 25일 부천시민회관에서 이상벽 씨의 사회로 ‘아름다운 음악회’ 공연이 개최됩니다. 음악에 재능있는 스님들과 함께, 불교음악은 물론 다양한 장르의 노래도 부를 예정이니 많이 오셔서 스트레스도 풀고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보현 스님
불교계 연예인 1호 스님. ‘이경미’라는 이름으로 80년대 초중반 광고모델 및 인기가수로 활동하다, 1987년 수덕사 견성암으로 출가했다. 일찍이 장애인 복지에 뜻을 두고 천안 부처님마을에서 15명의 장애아들을 돌보며 생활했다. 지난 해 부천에 부처님마을 포교원을 개원하고 음성공양을 통한 문화포교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저서로는 『타래』, 『너는 부처해라 나는 중생할테니』 등이 있고, ‘수미산’, ‘실타래’, ‘무생화’ 등의 불교음반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