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으로 듣기

2014-02-07     불광출판사

언제나 답답해서 물어보려고 말을 꺼낸다는 도법은 마주이야기에는 묻기가 앞서고 듣기가 뒤를 따른다고 했다. “대화는 마치 숨 쉬기와 같아요. 들숨날숨이 ‘목숨 잇기’라면, 생각 들숨날숨은 말이라 할 수 있잖아요. 무엇을 잘 모르거나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면 답답하니까 입을 열지요.” 마주이야기를 나눌 때 무엇보다 잘 묻고 잘 듣기가 가장 중요해 법문을 할 때도 묻기부터 한다는 도법. “대화로 뭘 풀어보자면서 상대가 하는 말을 믿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에요? 의심이 들면 파고들어서라도 드러내야 옳지. 대화를 하면서 상대방 말을 믿지 않고 딴죽만 건다면 대화가 아니라 염탐이지요.” 마주이야기 바탕에는 진실성과 믿음이 깔려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 세상은 귀를 거쳐 우리 안으로
독수리와 매 같은 맹금류나 사자나 표범 같은 괭이과 맹수들은 눈이 발달하고, 개과 동물은 눈보다 귀와 코가 발달했다. 고양이가 쌀쌀맞은 까닭은 눈에 의지하기 때문이고, 개가 정에 약한 까닭은 귀를 열어 제 마음을 내어 주기 때문이란다. 사람도 다르지 않아 귀가 발달한 사람은 눈이 발달한 사람보다 공격성을 덜 띠며 침착하고 돌이켜볼 줄 알고, 말하기에 앞서 귀를 기울인다. 얼 문화권인 동양에서는 귀를 앞세우고 물질 문명권인 서양에서는 눈을 앞세우는데, 우리는 눈을 거쳐 세상으로 나가고 세상은 귀를 거쳐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 나를 드러내는 눈이 냉철한 머리와 같다면, 너를 받아들여 감싸 안는 귀는 넉넉한 품이다.
불교를 대표하는 관세음보살은 말과 소리를 관觀하여 드러내는 보살이다. 소리를 꿰뚫어 드러내다니 무슨 말인가? 어렵던 시절, 나라 사람들은 힘겹다는 말조차 드러내 하지 못했다. 이를 앙다물어 참아내는 신음을 표정 없는 겉모습을 훑어 살필 수밖에 없었기에 오감을 곤두세워야 읽을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 마주이야기 할 때 우리는 제 이야기만 하기에 바빠 상대 이야기를 제대로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인디언 부족 라코타 사람들은 말 앞뒤에 오는 침묵을 소중하게 생각해 이야기를 나눌 때 서두르지 않는다. 말을 꺼내기에 앞서 생각을 거르는 고요와 말을 마치고 났을 때 참말뜻을 헤아리려는 고요는 마주이야기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예절로 여겼기 때문이다.
마주이야기는 말로 문제를 풀려고 만나는 자리이기에 도법은 진실하고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진실과 믿음이 깔려 있다면 말솜씨가 모자라더라도 많은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봐요. 그런데 이쪽은 이쪽대로 저쪽은 저쪽대로 제 몫만 챙기려고 드니 복잡하게 엉키지요. 그러나 가슴을 열고 다가서면 얘기가 아주 간단해요.” 그리만 한다면 무슨 문제가 있으랴마는 양쪽 다 제 잇속만 채우려 들거나 한쪽이 가슴을 열고 다가가도 다른 한쪽이 꿈쩍도 하지 않아 얘기가 겉돌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간디는 대화로만 문제를 풀지는 않았어요. 이를테면 애써 농사지은 곡식을 지주가 너무 수탈해가서 견디지 못하겠다고 어떤 농부가 민원을 넣었어요. 그럴 때 간디는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살펴요. 농부들이 게을러서 그럴 수도 있잖아요. 알짬을 바로 아는 것이 문제를 풀어가는 출발이에요. 간디는 농부들이 게을러서 일어난 문제라면 거기다 대고 뭐라고 하고, 지주 욕심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면 법이나 여론에 호소를 했어요. 또는 지주 잘못이 7할, 농부 잘못이 3할이면 그에 따라 조치를 하고요.” 어떤 문제든지 제대로 풀려면 먼저 참모습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 목숨 앞에 서는 가치는 없다
남북문제도 복잡하게 얽혀 있는 듯하지만, 같은 겨레란 공통분모를 앞세우면 풀 수 있다는 것이 도법 생각이다. “편을 가르기보다는 우린 한겨레이니 더불어 살려면 서로 도와야 한다고 생각을 가다듬으면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서로 상대방이 무릎 꿇고 들어와야 한다고 힘겨루기를 하잖아요. 남과 북보다 한겨레라는 보다 큰 가치를 놓고 ‘이건 북쪽이 조금 물러나고, 저건 남쪽이 좀 더 물러서면 되겠네.’ 그러면 되는데 자꾸만 너한테 더 이롭나 나한테 더 이롭나만 짚으니까 힘이 들죠. 부처님은 물싸움 현장에 가서 물보다 앞서는 가치가 뭐냐고 물으면서 문제를 푸셨잖아요.”
2,600년 전 인도 카필라국과 콜리야국 사이를 가로질러 흐르는 로히니 강은 두 나라 사람에게 더없이 소중한 농업용수였다. 어느 해, 가뭄이 들어 물이 모자라자 물을 더 차지하려는 농부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급기야 중무장한 두 나라 군대가 작은 강을 사이에 두고 맞서 일촉즉발, 팽팽하게 긴장이 감도는 바로 그때 강둑을 거슬러 한 비구가 걸어 들어왔다. 고타마 붓다. 시위를 팽팽히 당겼던 궁수들이 활을 내려놓고 길 위에 엎드렸다. 휘몰아 치던 함성과 먼지가 가라앉고, 자초지종을 듣고 난 붓다는 옛 우화를 몇 가지 들어가며 말씀했다.
아득한 옛날 검은 사자 한 마리가 큰 나무 아래 누워 조는데, 바람이 불어 가랑잎 한 닢이 사자 어깨에 떨어졌다. 바스락 소리에 잠이 깬 사자는 속으로 별렀다. 복수를 하고 말겠다고. 마침 수레를 만들려고 나무를 하러 온 목수에게 다가간 사자는 “수레바퀴에는 이 나무가 좋다.”고 일러줬다. 그러자 나무는 그 앙갚음으로 목수에게 “검은 사자 가죽을 벗겨 수레바퀴에 대면 아주 튼튼하다.”고 속삭였다. 결국 작은 다툼으로 둘 다 소중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서 붓다가 물었다. “물과 사람 목숨, 무엇이 더 소중합니까?” “그야, 사람 목숨이 훨씬 소중하지요.” “그런데 물 때문에 피가 강물처럼 흘러서야 되겠어요?” 고타마 붓다는 전쟁은 또 다른 전쟁을 낳는 씨앗 뿌리는 일일뿐 어떤 문제도 풀지 못한다, 눈을 부릅뜨고 참모습을 보라면서 거슬러 올라가면 피붙이인 두 나라 사람에게 일렀다.
“피를 나눈 형제끼리 살갑게 보듬어야 합니다. 저 히말라야 숲을 보세요. 모질고 거센 바람이 불어도 수많은 푸나무 덤불과 바위가 서로 뒤엉켜 받쳐주기 때문에 무엇 하나 다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들판에 홀로 선 나무는 굵은 가지에 잎이 우거졌어도 태풍이 휩쓸고 가면 뿌리째 뽑히고 맙니다. 감정이 없는 푸나무도 함께 어울려야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아는데,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서로 으르렁대다가 거칠고 드센 나라가 쳐 들어오면 두 나라가 다 무너지고 맙니다. 도타이 손을 마주잡고 평화를 일궈가세요.”
 
| 상식이 들고나는 사회
하나하나 짚어서 참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마주이야기이고 상식이라는 도법. 얼마 전 광주에서 학생들과 ‘행복은 어디서 올까?’를 가지고 말씀을 나눴다. “어떻게 해야 하나? 감이 잡히지 않아 고민하다가 먼저 물었어요. 행복은 어디서 오는지 생각나는 대로 얘기해보자고. 대부분 마음에서 온다고 얘기를 하더군요. 나는 마음이란 말이 영 마뜩지 않아요. 마음이란 이때 다르고 저때 다르고 종잡을 수 없고 아리송하잖아요.”
사람들에게 돈과 물, 무엇이 더 중요하냐고 물으면 현대 사람들은 거개가 돈을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참다운 상식을 바탕으로 알짬을 짚어보면 물이 있어야 사람이 먹고 살고 꽃도 피어나듯이 물은 목숨과 바로 이어진다. 그렇지만 돈이 없다고 해서 꽃이 피지 않거나 숨을 쉬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오래도록 세상을 이끌어온 상식이 모두 뒤엎어졌다. 스스로 존재가치를 잘 헤아리는 일과 마주선 상대를 잘 헤아리는 일이 중요하다는 상식, 알짬을 되짚어 일으켜 세워야 한다. 스스로를 잘 헤아리면 자존감이 서고, 너를 잘 헤아려 짚어보면 소중한 이와 함께한다는 생각에 뿌듯하다. “만족스럽고 뿌듯하면 행복이 아니냐? 그러니 행복은 상식에서 온다.” 마땅한 일을 마땅하다고 여기고, 마땅한 일을 마땅하게 하는 것이 상식이며 알짬이라는 도법.
생명평화순례길에 올라 울산을 지날 때 초등학교 4, 5, 6학년과 이야기 나눴다. 만나자마자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렇다고 입 모아 외쳤다.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훌륭한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무엇이 훌륭한 일이냐고 되받아 묻는 도법에게 아이들은 “의사” “판사” “선생님”을 외쳤다. “세상에 중요하고 훌륭한 일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 일은 목숨을 살리는 일이다. 목숨을 살리는 일은 어떤 것이 있을까?”를 묻고 답하고 또 묻기를 여러 차례 한 끝에, 목숨붙이는 누구라도 먹어야 목숨을 이어갈 수 있다, 먹고 살아야 의사든 판사든 선생이든 대통령이든 할 수 있다, 그러니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일이 가장 훌륭한 일이라고 의견이 모였다. 그런데 먹을거리는 어디서 누가 생산하느냐는 도법 물음에 아이들은 농촌과 농부라고 답을 했다. “봐라,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일은 농사짓는 일이고 농부가 가장 훌륭한 사람이다. 그런데 너희는 커서 무엇이 되려느냐?”
곁에서 이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동화작가 박기범은 이렇게 썼다. “스님은 어떤 논리 비약도 없이 아이들과 있는 사실을 그대로 하나하나 짚으며 가장 훌륭한 사람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다, 너희도 커서 훌륭한 농부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을 이것’이라고 말했을 뿐인데, 내게 충격으로 다가온 까닭은 그동안 우리가 ‘이것을 저것’이라고 말하는 데 길들여 있던 탓이 아닐까.”
상식이 들고나는 누리 만들기, 마주이야기가 이끈다.
 
 
변택주
1953년 잿더미가 된 서울에서 누리 빛을 보다. 20세기 사람을 부추긴 속담이 “개천에서 용 난다”였다. 개천에 사는 송사리나 미꾸라지가 다 용이 되려면 지구별이 몇 개나 더 있어야 할지, 이를 새기면서 저마다 저 생긴 대로 정情을 가르며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모심’을 화두삼아 소통을 연구하며 서울시가 지원하는 창업자 코칭을 한다. 펴낸 책으로 『법정스님 숨결』과 『법정, 나를 물들이다』, 『가슴이 부르는 만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