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을 내 뜻에 맞추려 말고 나를 부처님 뜻에 맞추자

2014-02-07     불광출판사
부처님을 내 뜻에 맞추려 말고 나를 부처님 뜻에 맞추자




위사카 부인은 녹자모강당을 지어 부처님께 기증한 재가불자다. 어느 날 그녀가 절에 다니며 재일齋日을 지키는 여인들을 대상으로 질문하였다. 먼저 나이 많은 여인들에게질문하였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절에 다니며 재일을 지킵니까?” 

|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나이 많은 여인들이 답했다. “네, 그저 자손들이 잘 되고, 저 또한 죽어서 좋은 곳에 나기 위해서입니다.” 다음에 중년여인들에게 물으니, “남편이 잘 되고, 아이들 공부 잘 하라고 다닙니다.” 젊은 여인들에게 물으니, “아이를 빨리 임신하고 싶어서 다닙니다.” 이어서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들에게 물으니, “네, 좋은 직장과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자 합니다.”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이를 부처님께 전해드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윤회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히려 다시 태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는구나!” 그리고 게송을 읊으셨다.

소치는 아이가 막대기로 소떼를 몰고 풀밭으로 가듯이 
늙음과 죽음이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다.
-『법구경』 135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윤회로부터의 해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은 더욱 더 윤회하지 못해 안달이다. 더욱 더 좋은 집에서 멋진 배우자와 아이들, 그리고 맛난 것을 먹고 마시며 좋은 구경하는 데 몰두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소원을 성취케 해달라고 부처님께 빌고 또 빈다. 하지만 어쩌랴? 부처님의 진정한 바람은 이러한 것들과는 초점이 다른 것을!

| 만족은 짧고 고통은 길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 한 비구가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아버지가 죽었다. 아버지는 이 비구 앞으로 유산 100냥을 남겼다. 비구는 처음에는 그 돈이 필요 없다고 했으나, 시간이 지나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탁발해서 생활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100냥이면 충분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속인으로 되돌아가야겠다.’ 이런 생각이 일어나자 출가생활이 짜증으로 변했다. 그는 경전도 외우지 않고 수행도 하지 않고 몸은 마치 황달에 걸린 사람처럼 핼쑥해졌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그의 스승은 그를 부처님께 데려갔다. 부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네가 출가생활이 싫어졌다는 말이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부처님.”
“왜 이렇게 되었느냐? 세속에 돌아가면 생계를 유지할 좋은 수단이 생겼느냐?”
“그렇습니다. 부처님.”
“너의 재산이 얼마나 되느냐?”
“100냥입니다. 부처님.”
“좋다. 그러면 가서 그릇 몇 개를 가져오너라. 그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한번 계산해보자.”
비구가 그릇들을 가져오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자, 음식과 음료들을 사는 데 50냥, 두 마리 소를 사는 데 24냥, 씨앗을 사는 데 24냥, 두 마리 소가 이끄는 쟁기를 사는 데 24냥, 삽과 도끼 등 생활도구를 사는 데 24냥이 들어간다.”
이로써 100냥의 돈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비구여, 네가 가지고 있는 돈은 아주 작은 돈이다. 그 작은 돈으로 어떻게 네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겠느냐? 과거에 세상을 지배하며 살았던 전륜왕은 왼손으로 주먹을 쥐고 오른손을 때리면 하늘에서 보석이 비 오듯이 쏟아져 허리까지 쌓였다. 그는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았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수명 또한 길어 오랫동안 세상을 통치하며 살았어도, 그가 죽을 때는 욕망을 다 충족하지 못하고 피곤과 권태 속에 죽어갔다.”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두 게송을 읊으셨다.

황금이 소나기처럼 퍼붓는다 해도
끝없는 욕망을 채우지 못한다.
지혜로운 이는 이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안다.
만족은 짧고 고통은 길다는 것을
-『법구경』 186

스스로 바르게 깨달으신 님의 제자는
하늘의 영광도 즐거워하지 않고
갈애의 소멸을 즐거워한다.
-『법구경』 187

부처님의 제자라면 현실의 부귀영화는 물론 하늘의 영광조차 즐거워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 모두 만족은 짧고 고통은 길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하늘에 태어나 영광을 누리더라도 그 또한 일시적인 것이요, 결국 윤회해야 한다. 그러므로 보다 중요한 것은 애착의 소멸이다. 애착의 소멸이야말로 우리를 궁극적으로 만족시켜주며 윤회에서 해탈시켜주기 때문이다.

| ‘해주세요’가 아닌, 오직 ‘하겠습니다’
위와 같은 사례들은 결국 ‘부처님을 내 뜻에 맞추려 말고 나를 부처님 뜻에 맞추어야 한다’는 점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이것은 마음가짐을 ‘해주세요’가 아니라 ‘하겠습니다’로 전환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해달라고 하는 것은 나의 뜻에 부처님을 맞추려 하는 것이며, 무언가를 하겠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 뜻에 나를 맞추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 뜻에 나를 맞추어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전형적인 사례가 바로 『화엄경』 「보현보살 행원품」에 나오는 보현보살의 10대 행원行願이다.

그때에 보현보살 마하살은 부처님의 크신 공덕 찬탄하고 보살들과 선재에게 말하였다.
선남자여, 부처님의 공덕은 시방세계 부처님이 미진수의 겁 동안에 계속해서 말하여도 끝내 다함 없으리니, 그와 같은 공덕문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열 가지의 큰 행원을 닦아야만 하느니라. 열 가지의 행원 행원이란,
1. 부처님을 예배하고 공경함이 그 하나요
2. 부처님을 우러르고 찬탄함이 그 둘이며
3. 부처님께 공양함이 그 셋이요
4. 업장을 참회함이 그 넷이며
5. 남의공덕 기뻐함이 다섯이요
6. 설법해 주시기를 청하는 것 여섯이며
7.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래 머묾 청하는 것 일곱이요
8. 한결같이 부처님을 따라 배움 여덟이며
9. 중생들을 수순함이 아홉이요
10. 모두 다 회향함이 열이니라.
이 열 가지의 행원 어디에도 ‘해주세요’란 표현은 없다. 오직 ‘하겠습니다’로 일관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대단한 원이라도 ‘해주세요’로 끝난다면 구걸일 뿐이다. 구걸은 바로 내 뜻에 부처님을 맞추고자 하는 것이다. 비록 사소한 원일지라도 ‘하겠습니다’로 맺어야 진정한 서원이자 행원이다. 나를 부처님 뜻에 맞추고자 하는 것이다.

부처님을 내 뜻에 맞추려 말고
나를 부처님 뜻에 맞추자.
이것은 ‘해주세요’가 아니라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월호 스님
행불선원 선원장. 동국대 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쌍계사 조실 고산 큰스님 문하로 출가하였다. 쌍계사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제방 선원에서 정진하였으며, 고산 큰스님으로부터 강맥을 전수받았다. 현재 조계종 교수아사리 및 쌍계사 승가대학 교수 소임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삶이 값진 것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 『당신이 주인공입니다』, 『언젠가 이 세상에 없을 당신을 사랑합니다』, 『문 안의 수행 문 밖의 수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