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절에 가는날

절은 한국불교의 지난 시간이 오롯이 기록된 공간이다.

2014-02-07     정하중

늘 대중과 함께 호흡해온 치열한 구도의 공간

절은 한국불교의 지난 시간이 오롯이 기록된 공간이다. 서기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시기 이 땅에 불교가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 1,600여 년. 곳곳에 절이 생겼고, 그곳으로 사람이 찾아오고 또 떠나가면서 절은 이 땅의 역사, 그 일부분이 되어 왔다. 오랜 시간의 더께가 켜켜이 쌓인 그곳. 우리 곁에서 멀지 않은, 하지만 우리 사는 곳과는 전혀 다른 세계인 것만 같은 그곳이 바로 전통사찰이다.

 

| 고풍스러운 전각들이 만들어낸 부처님 세계

전통사찰에서 맞이하는 새벽은 늘 푸른 기억으로 남는다. 그곳에선 새벽 3시에 잠을 깬다. 어김없이 들려오는 목탁소리 때문이다. 이 시간의 목탁소리는 세상 만물을 깨우는 도량석 소리다. 간단히 세수를 하고 옷을 챙겨 입을 즈음이면 어느덧 천지를 울리는 범종소리가 넉넉히 퍼져나간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종종걸음으로 범종각을 지날 때면 항상 발걸음을 멈추고 넋을 잃는다. 사물四物이 울림의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동안 저 멀리 푸른 새벽이 열리기 때문이다.

산사의 새벽은 늘 그렇게 푸른 기억으로 새겨져 있다. 전통사찰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말이 ‘역사’와 ‘전통’이다. 한국에는 그런 전통사찰이 수없이 많다. 그렇다면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사찰로 어디를 손꼽을 수 있을까. 발 닿는 곳마다 눈 돌린 곳마다 수많은 절들이 자리를 틀고 있지만, 유독 머릿속을 맴돌던 곳은 양산 통도사였다.

통도사는 합천 해인사, 순천 송광사와 더불어 ‘삼보종찰’로 불린다. 팔만대장경이 모셔져 있는 ‘법보종찰’ 해인사, 한국불교 승단의 맥을 이어 주고 있는 ‘승보종찰’ 송광사와 함께 통도사는 ‘불보종찰’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사리와 가사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통도사를 품에 안고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에는 영축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영축산은 본래 인도 마가다국의 왕사성 동쪽에 있던 산이다.

통도사를 세우고 산문을 열어젖힌 자장 율사가 이곳에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고 절 이름을 통도사라고 붙인 이유는 “이 산의 모습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此山之形 通於印度靈鷲山形)”라는 문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누군가는 지친 마음을 쉬고자, 누군가는 스님의 법문을 듣고자, 또 다른 누군가는 유별난 이유 없이 그저 이곳에 절이 있어 왔을 뿐이라고 했다. 전통사찰은 이처럼 현대인들이 언제고 찾아올 수 있는 휴식처이자 삶의 방향을 짚어줄 나침반이었다.

KTX 울산역에서 내려 통도사로 들어가는 길. 크고 작은 건물과 찌뿌둥한 하늘을 뒤로 흘려보낸다. 산 아래에서 들어서면 그 길목부터 산 밑의 사바세계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풍경들이 펼쳐져 있다. 그리 길지 않은 굽이길을 거쳐 들어가면 곳곳에 자리잡은 가람의 전각들이 제법 고풍스럽다. 통도사 옆구리로 솟아오른 산등을 따라 올라가면 통도사의 가람 배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기와지붕을 세어보면 이곳이 우리 역사에서 차지했던 비중을 쉽게 알 수 있다.

통도사는 신라・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왕실과 대중의 비호 속에 한국불교의 구심체와 같은 역할을 해왔다. “승려라면 모름지기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둔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아야 한다.”는 말은 통도사의 역할과 그 무게를 보여주는 또 다른 증언이다. 휴식의 공간. 통도사는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세간의 찌든 때를 잠시나마 덜어낼 수 있는 그런 공간이었다. 언제나 그래왔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재밌는 것은 한없이 너그러운 품을 지닌 공간이 절이지만, 실상은 치열하기 짝이 없는 곳이라는 점이다.

절이라는 공간은 수행자들이 바늘 끝 같은 낭떠러지 위에서 목숨을 건 수행을 이어가는 뜨거운 구도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느끼는 그 너그러움은, 생사의 경계를 넘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바로 본 수행자들이 내면의 평안을 나눠주는 기운이리라. 누군가는 지친 마음을 쉬고자, 누군가는 스님의 법문을 듣고자, 또 다른 누군가는 유별난 이유 없이 그저 이곳에 절이 있어왔을 뿐이라고 했다. 전통사찰은 이처럼 현대인들이 언제고 찾아올 수 있는 휴식처이자 삶의 방향을 짚어줄 나침반이었다.

 

| 찾아오는 사람들, 손 내미는 사찰

통도사 경내를 돌아다니는 동안 ‘총림叢林’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총림은 참선수행기관인 선원, 경전교육기관인 강원, 계율교육기관인 율원이 모두 갖춰진 사찰을 일컫는 말이다.

현재 한국불교에는 여덟 군데의 총림이 있으며 해인총림 해인사, 조계총림 송광사, 영축총림 통도사, 고불총림 백양사, 덕숭총림 수덕사, 금정총림 범어사, 팔공총림 동화사, 쌍계총림 쌍계사가 바로 그곳이다. 통도사와 같은 전통사찰을 찾으면 옛사람들의 미학을 살필 수 있어 즐겁다.

박물관이 아닌 곳에서 예전 우리의 문화를 만날 수 있는 곳이 과연 얼마나 남아 있는가. 전통사찰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소리와 우리의 미술과 우리의 건축을 만날 수 있다. 삶 속에서 만들어진 문화예술은 종교와한 길에서 마주했다. 명부전의 ‘수궁도 벽화’가 그렇고 용화전 마당의 ‘석조봉발’이 그렇다. 용화전 내부의 ‘서유기 벽화’는 또 어떤가. ‘용선접인도벽화’에서 읽히는 옛사람들의 염원은 또 얼마나 담백하면서도 간절한가.

대웅전의 자태는 세월이 빚어낸 위엄 그 자체다. 우리의 지난 삶과 문화가 그 안에 살아있기에 세계 어디에 내놔도 돋보이는공간이며, 유구했던 역사와 문화를 생생히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전통사찰들은 그 자체로 문화재이자 수많은 유・무형 문화재를 간직한 공간이다. 통도사 교무국장 진응 스님의 설명에서 전통사찰이 가진 의미를 읽어낼 수 있었다.

“전통사찰은 우리 문화가 모여들어 종합 문화 예술이 실현되던 공간이었습니다. ‘야단법석野壇法席’이라는 의식만 해도 그렇습니다. 너른 들판에서 큰 괘불을 모셔놓고 각종 문화예술이 펼쳐집니다. 또 동시에 설법이라는 형태를 통해 당대의 민중들에게 새로운 사상을 주입시키기도 했던 자리였습니다. 오락의 장소이기도 하고 대중의 아픔을 보듬어주기도 하던 공간이 절인 셈이죠. 그래서 우리 몸속에는 전통사찰을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DNA가 있는 것 아닐까요?”

평일 이른 시간에도 절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다. 이곳을 찾은 이유도 가지각색이다. 누군가는 지친 마음을 쉬고자, 누군가는 스님의 법문을 듣고자, 또 다른 누군가는 유별난 이유 없이 그저 이곳에 절이 있어 왔을 뿐이라고 했다. 전통사찰이 여타의 종교시설이나 문화재에 그치지 않는다는 반증이리라. 전통사찰은 이처럼 현대인들이 언제고 찾아올 수 있는 휴식처이자 삶의방향을 짚어줄 나침반이었다. 자연을 정복하던 인간은 이제 자연과 공존하는 법을 승가의 삶속에서 찾고 있다.

정신적 속도와 물질에 지친 사람들은 절을 찾아 ‘템플스테이’라는 양식으로 스스로를 껴안아 보듬는 법을 배우기도 한다. 이러저러한 자료들을 살펴보자니 전에 보지 못한 전통사찰의 모습이 읽힌다.

전통사찰이 복지기관을 설립하고 영농조합 법인을 운영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모습은 여타의 전통사찰들에서도쉽게 찾아볼 수 있는 요즘의 변화다. 분명 이런 모습은 대중에게 좀 더 다가가기 위해 내딛은 한 발이다. 더 이상 대중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어 거칠고 척박한 그 손을 잡아주겠다는 의미다. 한겨울 싸늘한 산중을 뜨겁게 달궜던 ‘화엄산림법회’ 역시 이런 노력의 일환이다.

구도의 공간이자 우리 문화의 정수가 모인 종합예술의 공간, 또 늘 그 자리에 앉아 중생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던 전통사찰은 지금도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전통을.살린.새로운.불교가.필요하다.

“절이라는 공간은 늘 그 시대에 맞춰 변화해왔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는 절이 좀 더 세분화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염불과 기도의 문화는 쉽게 사라지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하지만 공간 구성의 측면에서 일반인들이 머물면서 수행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이 필요해지겠죠. 현재 예측할 수 있는 선까지만 고려해서 생각해보자면 핵심은 이겁니다. 전통은 살리되, 변화된 현대인들에게 걸맞는 새로운 불교가 필요하다는 것. 이 숙제를 잘 풀어야 할 것 같습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본사인 통도사 주지 원산 스님은 이미 전 통사찰의 변화가 시작됐다고 보고 있었다. 원산 스님은 1964년 통도사 극락암에서 출가해 1968년 경봉 스님을 은사로, 월하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직지사 황악학림에서 관응 스님에게 경학을 배워 전강을 받았으며 극락선원, 송광사, 봉암사 및 백련암 무문관 3년 결사정진 등 20여년에 걸쳐 치열한 구도의 열기를 이어왔다.

선교禪敎를 모두 갖춘 인물인 셈이다. 통도사는 전통사찰이지만 늘 전통적인 역할에만 머물러왔던 것은 아니다. 현대사회의 변화에 따라 노인요양시설, 유치원과 어린이집 등 14개소의 부설기관을 두고 대중들의 삶에 도움을 주고자 노력해왔다.

또 2011년부터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백장 회해 선사의 백장청규 사상을 계승, 사찰이 자급자족해오던 노하우를 전파하기 위한 ‘영축총림 영농조합법인’도 운영하고 있다. 통도사의 이런 사회적 기능은 최근 다른 사찰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공통된 변화이기도 하다. 원산 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이후 주안점을 두고 있는 분야도 있다. 스님은 2011년부터 승려복지, 교육 및 포교, 통도사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통도사 주변 환경 개선사업 등을 주요 사업으로 결정하고 하나씩 실천에 옮기고 있다. 그중에서도 승려복지의 경우 교구승려복지회를 구성해 수행자들이 노후문제를 걱정하지 않고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 중이다.

“통도사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차장이 별로 없어서 사람들을 많이 수용할 수 없는 구조였어요. 어쩌면 전통사찰이라는 공간은 사람을 많이 수용할 필요가 없는 공간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대중들이 사찰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있고, 사찰은 대중들의 이런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법당도 예전에 비해 많이 커졌지요. 이젠 ‘화엄산림법회’와 같은 큰 행사 때는 사람들이 7,000~8,000명씩 모이기도 해요.”

전통사찰이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원산 스님에게 늘 쉽지 않은 난제다. 어쩌면 일반 대중에게 익숙한 IT기술이나 SNS 활용이 해법이 될 수도 있고, 다양한 문화예술행사를 열어 10대부터 노년층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수시로 통도사를 찾아와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사찰의 주요한 기능인 수행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대중에게 사찰을 열어준다는 것은 그만큼 친근하게 다가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사찰이라는 공간에 익숙해진 대중들이 본격적으로 불교를 알고 싶어 할 때 그 길을 터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찰은 본디 수행의 공간입니다. 그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전통적인 부분을 잘 살리면서 새로운 변화들을 이끌어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