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산증인 부처님과 나한

남양주 흥국사 <영산전>의 장엄

2014-02-07     불광출판사
 
남양주 흥국사 <영산전>의 장엄
 

01 영산전 건물. 조선말기 양식.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올린 형태로 공포의 각 면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두가 돌출되어 있다. 영산전 현판과 기둥의 주련은 모두 흥선대원군의 필체이다.

 

02 남양주 흥국사 만월보전의 잡상. 잡상은 기와지붕 추녀마루 위에 놓는 와제 토우들이다. 궁궐 건축에서나 볼 수 있는 액막이 장식이 사찰 건물에 적용된 매우 드문 예이다.
 

03 영산전 내부 천정의 단청. 공간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놓아두지 않고 그림으로 채웠다. 불화를 그리는 화승들의 양성소였기 때문이다.
 
 
서울 근교에는 조선말기의 독특한 불교미술의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사찰들이 몇몇 있다. 아기자기하면서도 구석구석 멋스런 장식들로 가득한 이들 사찰은 왠지 모를 친근감이 든다. 마치 한 폭의 형형색색 민화를 펼쳐 보는 듯한 느낌의 공간. 지방의 유명 사찰들의 웅장하고 엄숙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아늑하면서도 정감 넘치는 독특한 정서가 흐른다.(도판01) 남양주 흥국사도 그런 매력을 가진 곳 중에 하나다. 처마 및 공포, 외벽, 계단, 내부 천정 등 곳곳을 아름답게 장식하여, 경내를 돌다보면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는 느낌이다.(도판03) 게다가 소장 불화나 불상들이 범상치 않은 수준을 자랑한다. 이처럼 구한말 불교미술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일련의 사찰들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대개가 조선 왕실과 관계 깊었던 ‘원당願堂’ 사찰이라는 점이다. 마음 한 켠 늘 가보고 싶었던 흥국사. 경내에 들어서니 사찰의 가장 전면에 세워진 ‘대방(大房: 주불전 맞은편에 자리한 건축물. 큰 방과 누樓·승방 및 부엌으로 구성되는 복합건물로 왕실의 기도처·염불당·인법당 등 다양한 기능으로 쓰인다.)’ 건물이 한창 복원 공사 중이다. 요즘 불화 답사를 다니다보면 공사를 안 하고 있는 사찰을 만나기가 힘들다. 특히 ‘힐링’이 하나의 문화상품이 된 요즘, 템플스테이를 위한 요사채 공사들이 활발하다. 불과 몇 년 전에 갔을 때는 인적조차 뜸했던 조용한 곳이었는데, ‘여기가 거기였나?’ 할 정도로 사찰들의 주변 풍경은 급격하게 변하고 또 주말은 사람들로 북적댄다. 최근 몇 년 간 불교가 얼마나 대중적으로 활성화되고 있는지 그 붐이 실감난다.
 
| 조선왕실 ‘원찰’로서의 흔적들
흔히 사찰의 일주문을 들어서면 만세루가 있는데, 흥국사의 경우 그 자리에 궁궐 후원이나 왕족 별장에서나 봄직한 건물이 자리한다. 대방은 왕실 원당 사찰에서 만날 수 있는 특징적 건물이다. 보통 그 앞마당에는 연못이 있어 이를 감상할 수 있는 아늑한 공간이 연출된다. 흥국사 대방 앞에도 연못이 있었으나 지금은 메워져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전면에 세워진 이 건물 때문에, 처음 들어설 때는 으리으리한 사대부집 안으로 들어서는 느낌이 난다. 이 건물을 지나야, 사찰의 면모를 갖춘 주불전의 공간으로 진입할 수 있다.
또 흥국사에서만 볼 수 있는 남다른 특징은 지붕 위의 ‘잡상雜像’이다.(도판02) 잡상은 추녀마루 위에 장식되는 액막이 토우들로서, 상서로운 짐승· 해치·손오공·용·봉황 등의 모양을 하고 있다. 이들은 궁궐의 전각이나 문루에서 볼 수 있는 전유물인데, 놀랍게도 이곳 흥국사 만월보전의 팔작지붕에서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흥국사는 선조가 조선중기 1568년에 그의 아버지 덕흥군을 덕흥대원군으로 추존하고 그 묘소 근처의 본찰을 원당으로 중건하면서 덕흥사로 불렸다. 대원군이란, 조선시대에 왕위를 계승할 적자손嫡子孫이나 형제가 없어 종친 중에서 왕위를 이어받을 때 신왕의 생부生父를 호칭하던 명칭으로, 대원군 제도의 시조가 바로 덕흥대원군이다. 그 후 인조, 정조를 거쳐 고종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국가의 내탕금을 사찰 후원금으로 원조 받았던 곳이다. 특히 현재 남아있는 불화 및 불상들은 흥선대원군 일가의 발원과 관련 깊은 것들이 많다. 사찰의 내력을 보면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위해 왕실의 지속적인 후원이 꼭 필요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흥국사는 1790년(정조 14년)에 봉은사·봉선사·용주사·백련사 등과 함께 오규정소五糾正所로 선정되었다. 오규정소는, 관리들이 상주하며 왕실의 안녕을 빌고 또 주변 사찰의 기강과 승풍을 단속하던 곳이다.
 
| 서울·경기지역 불화 제작의 중심지
흥국사는 대웅보전·영산전·시왕전 등 경내 거의 모든 전각 외벽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건물 내부 천정 단청과 기둥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공간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냥 놓아두지 않고 그림으로 채웠다. 온통 그림투성이인 사찰. 아니나 다를까, 흥국사는 불화를 그리는 화승畵僧들의 양성소였다. 특히 서울·경기지역의 불화 제작을 담당하는 화승들을 배출하고 또 그들이 거주한 경산화소京山畵所가 바로 이곳 흥국사이다.
특히 영산전 벽화가 인상적이라 소개하고자 한다.(도판04) 전각 오른쪽으로 돌면 가장 먼저 ‘문수동자와 사자’ 그림(도판05)을 만날 수 있는데, 여느 문수상과는 매우 다르다. 문수보살(또는 동자)은 대개 사자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여기서는 사자와 대치하는 장면으로 그려졌다. 매서운 눈동자와 거대한 푸른 몸집,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초록빛 갈기가 압권이다. 마치 해치처럼 묘사된 맹수를 손 하나 까딱 않고 부리기라도 하는 듯 문수동자는 단엄하게 앉아 있다.
 

04 영산전의 벽화.
 

05 문수동자와 사자. 푸른 사자가 금수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문수동자는 결가부좌하고 앉아 묵시하고 있다.
 

06 스님들이 모여 두루마리 경전을 펼쳐보고 있는 모습. 얼굴들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당시 이곳에 실제로 주석했던 스님들을 모델로 그린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경전
문수동자 그림 밑 하단에는 스님 여섯 분이 분주히 모여들어 경전을 펼쳐든 장면이 있다.(도판06) 아마도 이 그림이 그려졌을 당시 이곳 흥국사에 거주하신 스님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얼굴과 표정들에 제각각 개성이 넘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비법이 담겨져 있을 법한 경전을 부랴부랴 펼쳐 들었는데, 거기엔 아무 것도 없다. 텅 빈 백지이다. 마치 통도사의 주불전 앞에서 기대를 잔뜩 하고 문을 열었을 때의 그 느낌이랄까. ‘어라? 아무것도 없네’, 통도사 대웅전 안에는 부처님이 없다. 커다란 불단만 휑하니 있을 뿐이다. 물론 법당 유리벽 넘어 진신사리가 모셔진 금강계단이 있지만, 항상 무언가 형상으로 대상을 구하는 중생심에 일침을 당하는 순간이다. 그림을 설명해주러 나온 스님께서도 이 장면을 보며 “사실 본래 없는 거잖아요.” 한다. 경전 속 글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 용과 호랑이를 타고 노니는 나한
전각 뒤편으로 돌아서면, 속세를 초월한 나한님들의 기운 생동하는 모습들을 만날 수 있다. 한 손으로 용의 뿔을 잡아 제압하고 입에서 여의주를 뺏어든 모습, 집채만 한 하얀 호랑이의 등 위에 가볍게 타고 앉아 바람을 가르는 날렵한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윗단의 벽화들은 비교적 많이 바래 있어서, 아직도 색이 선명한 아랫단 벽화보다 시대가 더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필치나 화격은 윗단 벽화가 한 수 위다. 윗단 벽화는 영산전 건물이 지어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정도에 그려진 듯하고, 아랫단 벽화는 그보다 반세기 이상은 더 후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아랫단에는 스님 형상이 아니라 금강역사와 같은 무인이 용과 호랑이를 제압하고 있다.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이른 도인들을 표현할 때, 흔히 ‘용을 타고 다닌다’라고 한다. 험한 세상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그 장대한 흐름을 유유자적 타고 노닐 정도의 여유와 관록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 정법正法을 전수하고 수호하는 존재
영산전 안에는 석가모니삼존불을 중심으로 16나한 조각상(현재 남양주박물관에 기탁 보관 중)을 모셨고, 그 뒤로 16폭의 후불탱 <나한도>(1892년 제작)가 있다.(도판07) 나한도는 섬세한 필치가 영롱하게 살아있다. 용·연화·여의주 등 옷 문양은 극세필의 금니로 그려 디테일이 유려하다. 보탑·금강저·향로 등 주요 지물에는 금박을 써서 화려함을 더했는데, 윤곽을 돋음질하여 입체효과를 냈다.(도판08・09) 나한은 신통력을 겸비하므로, 용을 작은 뱀 다루듯 또는 사자를 고양이 다루듯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흐르는 물에 발을 한가로이 담그고 있기도 하고, 바느질을 하고 있기도 하며, 근엄한 모습으로 공양을 받기도 한다. 상서롭고도 기괴한 도상들과 섞여 있어 신선의 세계 같은 환상을 주지만, 그 안에는 소박하고도 친근한 일상이 어우러져 있다.(도판10・11・12・13)
나한(또는 아라한)은 삼계의 미혹을 끊고 공부가 완성되어 존경과 공양을 받을 수 있는 성자를 일컫는다. 나한은 다른 말로 응공(應供, 공양 받아 마땅한 자)·복전(福田, 공양으로 복을 심는 밭)·응진(應眞, 진리에 상응하는 자. 그래서 나한전을 응진전이라고도 한다.)·불생(不生, 나고 죽는 윤회에서 벗어난 자)·무학(無學,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자) 등으로도 불린다. 나한으로는 우선 석가모니의 십대제자가 유명한데, 이들은 석가설법의 청중으로서 불법佛法 전수자의 성격을 띤다. 그러던 것이 독립적 신앙대상으로서 숭배되는데, 이때는 주로 16나한이 채택된다. 독립적인 나한신앙의 유행은 16나한의 이름과 주거지가 구체적으로 기입된 법주기法住記 (당나라 현장 번역)에 근거한다. 더 나아가 나한신앙은 법화경의 유포와 더불어 ‘오백나한’으로 극대화되기에 이른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나한재가 빈번하게 행해졌는데, 주로 ‘호국’과 ‘기우제’ 목적으로 지내졌다. 조선시대로 오면서 추복을 위주로 하는 기능으로 축소된다.
 

07 영산전 <16나한도>
총 16폭. 1892년 제작, 비단에 채색, 크기 각 123x208cm. 경선당慶船堂 응석應釋을 수화승으로 제작한 작품. 신비로운 청록산수를 배경으로 인물들을 섬세한 필치로 묘사했다. 채도가 선명하고 세부묘사가 화려하다.


08 <16나한도>의 부분 ‘제5낙거라諾距羅 존자’
주장자에 몸을 기대고 경전을 읽고 있다. 원숭이가 천도복숭아, 석류 등 진귀한 과일들을 공양올리고 있다.
 

09 <16나한도>의 부분 ‘제10반탁가半託迦 존자’
동진보살이 거대한 금강저를 반탁가 존자에게 올리고 있다. 윤곽을 입체적으로 돋음질한 금박의 금강저가 매우 인상적이다.
 

10 <16나한도>
16나한, 현세에서 정법正法을 지키는 16명의 불제자 아라한阿羅漢을 일컫는 말이다. 당나라 현장玄奘이 번역한 법주기法住記 에서 최초로 이들 나한의 명칭들을 확인할 수 있다.
 

11 향로 공양을 인자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제1빈도라발라타사賓度羅跋囉惰闍 존자.
 

12 청색의 가사 사이로 나한님이 섬세한 손을 내밀어 경전을 넘기고 있다. 옷 위에는 금빛 둥근 용 문양을 화려하게 시문하였다.
 

13 제4소빈타蘇頻陀 존자의 시좌가 호랑이를 마치 고양이처럼 다루고 있다.
 
 
 
불교 기초 상식 佛敎 基礎 常識
 
나한이 갖추는 신통력, 육신통과 팔해탈법
육신통六神通: 6가지 신비한 능력
①신족통神足通: 어디든 갈 수 있는 능력 ②천안통天眼通: 세상의 만물을 거리에 상관없이 마음대로 볼 수 있는 능력 ③천이통天耳通: 이 세상의 소리라면 무엇이든 들을 수 있는 능력 ④타심통他心通: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 ⑤숙명통宿命通: 자신과 다른 사람의 전생 현생 후생을 모두 알 수 있는 능력 ⑥누진통漏盡通: 번뇌 망상을 모두 없애고 육도윤회하지 않도록 깨닫는 능력. 제1통에서 제5통까지는 외도나 신선, 천인 및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으나, 제6통 누진통은 아라한이나 불・보살만이 얻을 수 있다.
팔해탈법八解脫法: 번뇌를 여의고 적멸에 이르는 8가지 해탈법
①먼저 어떤 대상을 오로지 생각하는 것에 의해 욕정을 제거하고 ②나아가 마음을 하나에 집중하여 정신을 통일하고 ③다시 외경으로부터 마음을 분리해 ④몸과 마음이 청정한 경지에 이르게 한다. 이 단계에서 ⑤주로 무한한 공간을 염하여 외계의 차별상을 멸하고 ⑥그 마음의 작용과 몸이 무한의 경계에 도달해 ⑦그 공간이나 마음의 경계를 초월한 근원에 이르고 ⑧그 근원이 항상 현실 위에 나타나게 되는 경지에 이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