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품격

요시다 겐코의『도연초徒然草』

2014-02-07     불광출판사

억새가 손짓하는 가을이다. 또 낙엽은 우수수 고혹적이다. 사람들은 가을이 되면 센티해진다. 세상의 고뇌를 모두 껴안은 듯 인생이 허무해진다. 가을의 끝자락이다. 가을은 시와 수필의 계절이다. 명수필을 한 권. 절세의 수필을 마주하다 보면 어느새 세상사는 모두 초라해진다. 이즈음 승僧 요시다 겐코(吉田兼好, 1283~1352)의 『도연초徒然草』라고 하는 수필집이 떠오른다.
 
| 무료해서 쓴 수필
『도연초』는 『방장기方丈記』와 함께 중세 일본을 대표하는 수필집이다. 대략 1330년경에 성립되었다고 하며, 모두 244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단락은 독립된 주제로 처세훈, 회고담, 자연의 정취, 지식과 귀감이 되는 이야기, 그리고 불교적인 무상관을 읊고 있는 수필이다. 에도시대, 그리고 메이지明治 이후 일본문학의 고전적인 위치에서 수많은 문학도들의 꿈을 잉태시킨 책이기도 하다. 『도연초』의 첫 단이다.
“이렇다 할 볼일도 없어서 무료하기도 하려니와 서글퍼질 만큼 쓸쓸한 감회에 사로잡혀, 하루 종일 벼루를 향해 가슴에 떠오르는 이런 일 저런 일들을 두서없이 적어 내려가노라면, 야릇하게도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복받쳐 올라서 미칠 것만 같다.”(서단序段)
이 일단에서 독자들은 그만 마음을 사로잡힌다. 스스로 ‘수필이란 이런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매우 짤막하지만 이 책에 수록된 여러 편의 수필 가운데서도 단연 으뜸. 서단序段은 몇 줄 되지도 않지만, 사람을 현혹시킨다. 성급하게도 다음 구절을 재촉한다.
“인간은 뭐니 뭐니 해도 용모나 풍채가 뛰어나게 훌륭하기를 바랄 것이다. 말하는 모습도 역겹지 않고 애교도 있으면서 수다스럽지 않은 그런 사람과는 언제까지나 대화를 나누고 싶어진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주 훌륭한 분이라고 믿고 있던 사람이 어이없는 본성을 드러내게 되었을 때는 그야말로 할 말이 없어진다. 또 신분이나 가문, 용모 등은 타고나는 것이니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마음은 현명하고 슬기롭게 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비록 용모나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도 학문이 없고 보면 근본이 비천해 보이고, 또 얼굴이 상스럽게 생긴 인간들과 동렬로 보여서 보잘 것 없는 처지로 밀려 버리고 말게 되는 것은 어쨌든 간에 유감스러운 일이다.”(제1단)
외모가 썩 좋은 사람이라도 학문적 소양이 없으면 얼마 못 가서 비천해 보이고, 어이없게도 점잖은 분이 본성을 드러내게 되면 적이 실망스러워진다. 인격은 학문적 교양과 마음의 수양이 동반되어야 한다. 논어』에서는 그것을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고 한다.
“늙은 다음에 비로소 불도에 들어가 수행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옛 무덤은 대개가 나이 젊어서 죽은 사람들의 것이다. 우연히 병을 얻어 갑자기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무렵에야 비로소 지난날의 잘못을 인식하게 되는 법이다. 그 잘못이란 다름이 아니다. 미리 해야 할 일을 미루어 놓고, 서서히 해도 좋을 일을 서둘러 가며 살아온 일이 뉘우쳐지는 것이다. 그 때(다 죽게 된 즈음)에 ‘아차’ 하고 후회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인간은 언제나 무상(죽음을 뜻함)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고 잠시 동안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마음가짐이라면 이 속세간에서의 사념思念도 적어지고 불도 수행에 정진하는 마음도 돈독해지리라.”(제49단)
불교적 무상관은 일본문학 작품에 흐르고 있는 근간이다.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무상관은 향락의 끝에서 오는 탄식조의 무상관이지만, 『도연초』의 무상관은 세상을 달관해 버린 초연한 무상관이다.
‘도연徒然’이란 ‘무료해서, 따분해서 쓴 수필’이라는 뜻이다. 같은 일상이 반복되다보면 따분하고 지루해서 붓을 끄적거리게 된다. 세상사에 별 흥미가 없는 사람은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수필집이 그냥 되는 대로 끄적거린 글은 아니다. ‘어쩌면 저렇게도 감정을 잘 절제했을까’ 하고 감탄할 정도로 절제된 글이다.
『도연초』는 불혹의 나이를 훨씬 넘긴, 그러나 아직은 세상사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한 승려의 삶과 인생관이 수필이라는 장르를 통하여 담담하게 표출된 작품이다. 글과 인격이 꼭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서 때로는 우리의 주변에서도 종종 실망스러운 경우를 보지만, 작자는 품격 있는 문체로 자신의 내면세계를 약간씩 보여주고 있다. 수필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짐작하는 바, 그는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로 심미안을 갖고 있는 불승이라고 짐작된다. 한두 단락을 더 보도록 하겠다. 그저 그런 설명보다는 백배나 나을 것이다.
“당장 불도佛道를 깨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세속적인 관계에서 떠나 몸을 조용히 하고 속사俗事에 끼어들지 않고 마음을 편안히 가지는 일이야말로 임시적이나마 즐거움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제75단)“사람들이 떠드는 떠들썩한 소문의 출처를 관여할 만한 처지도 아닌 사람이 그 내정을 상세하게 알고 있어서, 남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문의하기도 하는 것은 좀 어색하다고 여겨진다. 하여튼 산중에 살고 있는 승려들이 속세 사람들(정치인)의 신상 문제 따위를 자기 일처럼 캐어묻고, 어떻게 이토록 자세히 알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지껄여대는 모양은 보기가 민망하다.”(제77단)
 
| 세속과 산문 사이를 왕래하다
이 책의 작자 요시다 겐코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수필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저 좋은 가문 출신으로 지적 소양이 상당했고 늦깎이로 출가한 스님이라고 짐작되는 정도다. 그러나 ‘이왕에’로 시작되는 1단을 본다면 황실이나 조정의 명문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요시다 겐코는 본명이 ‘우라베 가네요시卜部兼好’로, 와카(和歌: 5.7.5.7.7조의 형식을 맞추는 일본의 정형시)의 명인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뛰어난 와카도 많이 남겼을 터이지만, 그보다는 수필로 더 유명하다.
동양의 문학사에서 고전 수필의 백미는 송宋 홍매洪邁의 『용재수필容齋隨筆』이라고 한다. 불교 수필은 아마도 운서주굉雲棲袾宏의 『죽창수필竹窓隨筆』을 손꼽을 것이다. 중국의 두 수필과 비교한다면 요시다 겐코의 『도연초』는 전혀 다르다. 앞의 책들이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고사를 수필체로 쓴 것이라면, 『도연초』는 순수한 문학 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특징이라고 한다면 이 책의 작자는 대상에 끌려가지 않고 항상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 냉정한 눈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시다 겐코는 애써 문장을 수식하려고 드는 글쟁이들의 속성도, 억지로 초연한 체하려는 종교인의 속성도 없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가식 없이 쓰고 있는데도 어딘가 모르게 문장이 세련되고 정취와 품격이 있다. 무소유, 무집착의 입장은 아마 그가 입산 후 불도수행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연초』는 새삼 ‘수필이란 이런 것이던가’ 하는 전형을 보여주는 글이다.
“세상 사람들은 어디서든지 만나게 되면 잠시도 잠자코 있지를 않는다. 반드시 말이 많이 오간다. 그것을 들어 보면 대개는 무익하고 부질없는 이야기들이다. 세상의 부침이 덧없다는 말에서부터 남의 비평에 이르기까지, 자기를 위해서 남을 위해서 손해는 많고 이득은 적은 이야기들이다. 더구나 설상가상 격으로 그러한 이야기를 지껄이고 있는 동안에 피차의 마음속에도 이로움은 없고 무익하기만 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북쪽 집 그늘에 (…) 밀쳐놓은 수레 채에 서리가 내려앉아서 새벽 달빛에 한층 반짝반짝 빛난다. 그 달빛이 때때로 구름에 가려지는 그런 추운 날씨에, 인기척이라고는 없는 불당의 낭하(廊下, 복도 아래)에서 보통 신분이 아닌 듯한 남자가 여자와 함께 문턱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무슨 이야기가 그리도 긴지 좀처럼 그칠 것 같지도 않다. 여자의 머리 모양새며 얼굴 생김이 매우 아름다워 보이는 데다, 무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향내가 바람결에 풍겨오고 있어 정취가 있다. 간간이 이야기의 말 끝 따위가 들려오는 것에도 왜 그런지 마음이 끌린다.”(제105단)
요시다 겐코는 50세 쯤에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그는 승려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여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야기의 말 끝 따위가 간간이 들려오는 것에도 왜 그런지 마음이 끌린다”고 했는데, 나 역시 그렇다. 마음은 여전히 세속과 산문 사이를 왕래하고 있는 것이다. 초탈, 그것은 부처님의 경지이다. 요시다 겐코의 『도연초』는 질리지 않는 수필집이다. 그에 대하여 더 알고 싶다면 그것은 독자의 지적 탐구의 영역일 것이다.
 
윤창화
도서출판 민족사 대표. 해인사 강원 13회 졸업.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 졸업. 선禪의 진실을 탐구하고자 원류인 당송시대 선종사원의 미학을 공부하고 있다. 그는 “현재 한국선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덧붙인다. 「해방 이후 역경과 그 의의」, 「한암漢岩의 자전적 구도기 일생패궐」, 「성철 스님의 오매일여론 비판」, 「무자화두의 십종병에 대한 고찰」 등의 논문을 썼고, 『왕초보 선박사 되다』, 『365일 부처님말씀』, 『내 마음을 치다』, 『불자생활백서』, 『왕초보 불교박사 되다』 등의 책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