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노보살님들의 은유 이야기

2014-02-07     명법 스님

겨울이 시작되었다. 온 산을 붉게 물들였던 단풍도, 뜨락에 피었던 국화마저도 어느새 사라져버리고 성큼 한 해의 끝자락이 다가왔음을 발견한다. 갑자기 찾아온 추위는 몸을 움츠러들게 하지만, 옷깃을 올리고 종종걸음을 치는 가운데에서도 겨울로 접어드는 이 계절은 살아있음을 온전하게 느끼게 하는 무엇이 있다. 차갑고 청명한 공기가 투명하게 사물의 본질을 비추어, 이런 날엔 차창 너머 흐르는 강물조차 손에 잡힐 듯 선명하고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마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래, 그 때 친구가 말했었지, 최루탄 가스 매캐한 대학 캠퍼스에서. “아!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노년의 지혜를 보여준 아름다운 사례들

얼마 전 노보살님 두 분이 ‘은유와 마음’ 프로그램에 참가하셨다. 어떤 프로그램인지도 모르고 스님이 하는 강의니까 불교 공부려니 생각하여 참가하신 것이었다. 내심 그 분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은유로 표현하도록 권해드렸다. 예상했던 대로 그분들에게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노보살님들은 열심히 나오셔서 자신들의 은유 이야기를 써내려갔으며 매번 우리는 그분들의 놀라운 상상력과 지혜에 감탄하며 그 이야기를 경청했다.

낙엽을 떨군 벌거숭이 겨울 산과 ‘꽃의 영광’과 ‘초원의 빛’이 사라지고 없는 텅 빈 들판이 사물의 본질을 보여주듯이, 노년의 지혜는 삶의 진실을 한 점의 거짓 없이 비춘다. 청춘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삶을 마감하는 노년도 아름답다는 사실을, 수행자가 아니지만 평생 변함없이 부처님만 믿고 살아온 노보살의 수행 또한 향기롭다는 사실을 나를 비롯한 참가자들 모두가 배웠다.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여기에 소개한다.

 

| 노보살님의 은유 이야기 1

나는 1,000미터 고지의 막바지, 거의 900미터 정도 오른 나무입니다. 이제 나에게 남은 시간은 겨울뿐입니다. 가끔 봄날이 그립기도 하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담담하게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되돌아보면 지나간 세월도 보이고 오래 전에 내 주변에 있던 것들이 나를 떠나 저 멀리 자리하고 있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들은 나를 떠났지만 난 조금도 섭섭하지 않아요. 모든 것에는 자신의 위치가 있으니까요.

나는 작지만 야무지답니다. 어렸을 때는 병약해서 늘 시름시름 아팠습니다. 나뭇잎도 축 쳐지고 줄기도 말라비틀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큰 나무가 되고 싶다는 꿈은 생각해보지도 못했습니다. 스물 살 때 즈음에는 뿌리가 뽑혀나갈 정도의 큰 고비도 있었습니다. 부모 나무가 부처님께 지극정성으로 기도드린 덕분에 살 수 있었지요. 부모 나무는 수액도 주고 거름도 주어 저를 푸르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이제 나는 웬만한 바람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송곳처럼 꼿꼿하게 서 있는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다지 크지 않아요. 왜냐하면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되려면 너무 자라면 안 되니까요.

나는 그 후로 평탄하게 잘 자랐습니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올라온 것은 온전히 내 힘만으로 한 거예요. 조금 더 올라가면 정상이에요. 정상에 도착해서 멀리 바라보면 좋겠지만 이제는 숨이 차서 그만 올라가고 싶습니다.

나는 또한 스테인리스 그릇입니다. 20년 전, 나는 공장에서 출고되자마자 당시 강남에서 제일 좋은 백화점으로 보내졌습니다. 그곳에서 지금의 주인을 만났지요. 고맙게도 나의 주인은 내가 오래되었다고 싫어하거나 버리지 않고 지금도 사용하고 있답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저는 예전 모습 그대로입니다. 한 군데도 찌그러진 곳이 없습니다. 주인이 항상 닦아준 덕분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습니다. 나는 닦을수록 더 빛이 난답니다.

사람들은 나를 좋아합니다. 작고 단단해서 아무 물건이나 담아도 되고 어디든지 가지고 갈 수 있기 때문이죠. 구석에 있을 때에도 계속 나를 찾습니다. 함께 있던 큰 그릇들은 몇 년이 흐르면 유행이 지났다고 처박아두어요. 하지만 나는 찬장 깊숙이 넣어두어도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쓴답니다. 왜냐하면 요긴하게 모든 것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나는 반찬도 담고 쌈장도 담을 수 있습니다. 특히 쌈장은 나에게 잘 어울리는 음식인 것 같아요. 재료도 여러 가지 써야 하고 여러 가지 음식과 함께 먹을 수 있으니까요. 채소나 고기를 쌈 싸먹을 때도 꼭 필요하지요. 쌈장은 인기가 좋아서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합니다. 그럴 때 나는 정말 행복하답니다. 여러 사람이 사용하는 그릇이 되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 오든, 내 마음에 안 맞는 사람이 오든 모든 사람에게 쌈장을 나누어주고 싶어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양념장이 맛있다고 하니 기분이 정말 좋습니다.

나는 어떤 물건도 거부하지 않고 다 담으려고 해요. 음식도 좋고 보석도 담을 수 있어요. 달콤한 사탕이나 향기 나는 물건도 담고 싶지만 왠지 저에겐 안 어울릴 것 같아요. 왜냐고요? 제가 너무 투박하잖아요. 내 위치를 그대로 지키고 싶어요.

너무 오래되었으니까 공장에 들어가 새 그릇이 되면 어떠냐고요? 음, 그렇다면 나는 들판에서 일할 때 먹는 새참용 그릇도 되고 싶고, 근사한 호텔 연회장의 멋진 그릇도 되고 싶어요. 그러려면 노력해야 해요. 장소와 담는 그릇의 격에 맞도록. 하지만 그런 그릇은 잠시 사용하다 말 물건이니까 다른 것이 되고 싶습니다.

다음 생에 내가 정말 되고 싶은 것은 물그릇이에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고 언제 어디서나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정성으로 만든 오염되지 않은 물을 담고 싶습니다. 산천초목의 맑은 이슬까지도 받아서 인정과 사랑에 목마른 사람에게 주고 싶습니다. 나는 세상에 가장 맑고 깨끗한 감로수를 담는 그릇이 되고 싶습니다.

물 받으러 가야 하는데, 그런 기력이 남아 있는지 모르겠네요? 이번 생에 못하면 다음 생에 그렇게 되고 싶어요.

 

| 노보살님의 은유 이야기2

나는 산속에 있는 소나무입니다. 푸르고 신선합니다. 항상 자기를 관찰하고 있습니다. 맑은 하늘도 보이는데, 다른 나무가 있으면 맑은 하늘을 쳐다보기 어려울 수도 있겠네요. 사람들을 쓰다듬어주고, 안아주고, 대신 아파해주고 싶었는데, 아직도 나는 덜 자란 소나무네요. 다른 사람들은 보기 좋다고 하지만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어린 나무들을 돌봐주느라 지쳐서 그런 걸까요?

내가 힘들어도 어린 나무를 쓰다듬어 주고 밝게 비춰주고 싶어요. 다음 생에는 한 그루 큰 나무로 태어나서 여름에는 그늘이 되어주고, 가을에 열매를 맺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겨울에 나뭇잎이 떨어져도 햇빛을 받으면서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큰 나무라서 다른 나무를 가리지 않을까 걱정이네요. 작은 나무가 나 때문에 햇빛을 받지 못할까 걱정이에요.

나는 산속에 살고 있습니다. 서로 어우러져 숲을 이루고 있어요. 서로 의지하고 서로 대화도 하고 서로 바람을 막아주며 살고 있습니다. 눈보라가 쳐도 막아주고, 새봄에는 새순이 나오고 묵은 잎은 떨구어 떨어진 잎이 풀벌레를 자라게 합니다. 내 발 아래에는 작은 풀도 자라고 있네요. 내 몸을 타고 다람쥐도 다니고 새들도 둥지를 틀었습니다. 큰 나무가 혼자 자라는 것처럼 보여도 혼자 자라는 것은 없어요.

나무가 다 자라면 재목으로 쓰이고 싶습니다. 다 자랐으니 베어도 하나도 안 아파요. 재목이 되지 못하면 그냥 스러져 흙이 되어 생명을 키우겠습니다. 그러면 모두 행복하게 살 것 같아요. 앞으로 할 일이 많군요. 잎을 떨어뜨려 거름을 만들고, 집짓는 재목도 되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서까래나 대들보보다는 주춧돌이 되고 싶어요. 그 위에 절을 지어도 좋고 집을 지어도 좋을 것 같아요. 가족들만 사는 집은 아니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서 밥도 먹고 쉬었다 가는 공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많이 와도 다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요.

주춧돌이 되려면 화석이 되어야 하니까 내 몸이 썩어야 해요. 몸을 썩혀 화석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계속 정진하고 있어요. 나만 햇빛을 받으려고 하지는 않지만 저는 계속 정진해야 합니다.

큰 나무 아래 작은 풀들이 자라서 예쁘게 꽃을 피우면 좋겠습니다. 숲을 이루고 살면 못생긴 놈을 없앨 수도 없고 잘난 놈만 키울 수도 없습니다. 숲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어우러져 자랍니다. 그렇게 작은 숲이 큰 숲을 이루고…. 숲은 강물이 되어 바다로 갑니다. 바다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입니다. 바다는 다시 하늘로 가서 비가 되어 만물을 생성하게 합니다.

저는 지금 제 이파리를 떨어뜨리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명법 스님
조계종 교수아사리, 동국대 불교대학원 명상상담학과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대와 홍익대에서 학생들에게 미학을 가르치기도 하며, 최근에는 불교영어도서관에서 ‘은유와 마음’ 템플스쿨을 진행 중이다.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후 미국 스미스 칼리지에서 박사후 과정을 연수했다. 저서로 『미국 부처님은 몇 살입니까?』, 『미학의 역사(공저)』, 『세계불교사(공저)』등이 있고 그 외 다수의 논문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