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임영선, 순수를 그리다

화가 임영선

2014-02-06     정하중

 
꿈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가. 그 꿈을 지켜간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여기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꿈을 지켜가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 수없이 넘어지고 오르기 힘든 역경이 버티고 있어도 결코 좌절하지 않았던 그 사람의 이야기를 만났다. 아이들의 순수를 커다란 캔버스에 옮기고 있는 임영선 작가의 이야기다.
 
 
| 밀레의 ‘만종’을 좋아하던 부산의 꼬마아이
 
사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의 작품을 우연히 만나게 된 것도 그렇지만, 좀처럼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던 그가 흔쾌히 문을 열어준 것도 여간해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서울 평창동 가나 아트에 마련된 작업실 한 칸. 그렇게 온전한 작가만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곳은 작가의 작업실이자 살림방이었다. 작업실 저 편에 마련된 침대 하나. 그리고는 모조리 그림을 위한 공간이다. 그 공간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양쪽 벽을 가득 메운 거대한 그림 두 점에 시선을 뺏긴다. 사람 키를 훌쩍 넘길 정도의 캔버스를 가득 메운 아이의 얼굴. 순수의 세계가 그 얼굴에 모두 담겼다.
 
“저는 인물화만 그려요. 본래 회화사에서도 인물화는 역사가 깊고 큰 의미를 가지고 있잖아요. 대개 화가 자신이나 명망 있는 인물, 왕족, 최근에는 팝아트라는 이름으로 대중 스타들을 인물화로 많이 다루고 있기도 하고요. 저는 어릴 때부터 인물화에 대한 욕심이 있었어요.”
 
평창동의 날카로운 산바람이 살을 저미는 듯했다. 그 바람의 성깔을 잘 안다던 그가 찾아오느라 고생했다며 커피부터 한 잔 권했다. 마흔일곱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어려보이는 얼굴이다. 순수의 세계를 화폭에 담으며 세월을 쌓아왔기 때문인 걸까. 문득 그가 아이들, 특히 제3세계의 아이들을 그리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런데 그가 첫마디부터 “염화미소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처음 그 얼굴을 만났을 때 마치 부처님의얼굴을 보는 것 같았단다.
 
“자비롭고 강한 생명력을 가진 그 무언가를 마주한 듯한 느낌이었어요.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죠. 사실 저 아이들이 살고 있는 환경이 그리 온전치만은 않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해맑았죠.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나라는 인간은 너무나 나약한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구나. 그리고는 저 아이들의 얼굴이 바로 내가 그려야 할 대상이라는 걸 직감했어요.”
 
조곤조곤 말을 잇는 목소리가 차분했다. 부산의 산동네에서 자란 그는 어릴 때부터 내성적인 아이였다. 친구들과 어울려 뛰놀기보다는 손으로 뭔가를 그리는 걸 좋아했다. 내성적인 성격은 그림에만 집중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의 작은 구멍가게 창가에 붙은 밀레의 ‘만종’을 보게 됐다. 그 색감과 그 분위기. 어린 마음에도 그는 밀레의 작품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보고 또 보고. 그 가게 앞을 지날 때면 그는 늘 밀레의 그림을 감상하고서야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 좌절의 늪은 결코 나를 무릎 꿇릴 수 없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시작한 것은 그림을 가르쳐주는 곳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다. 사실 그 전까지는 화실이라는 곳이 있는 줄도 몰랐다. 당연히 데생이란 그림의 기본도 생소했다. 그림을 전공할 사람치고는 조금은 늦은 시점이었지만, 임영선 작가는 무섭도록 그림 그리는 데 몰입해갔다. 가족의 반대가 심했지만 그의 고집은 누구도 꺾지 못했다.
 
다만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말했다. 화가가 되려면 평생 가시밭길을 가야 하는데 그 길을 갈 수 있겠느냐고. 가기로 결심했다면 절대로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야 한다고. 그리고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림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고 훗날 이 약속이 그가 꿈을 지켜갈 수 있는 버팀목이 돼주었다. 그림을 전공하기 위해 미대에 진학했지만 한국의 회화 추세는 그와 맞지 않았다.
 
그때는 추상화가 대세였다. 도대체 그는 추상화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손에 잡히지 않는 세계를 그린다는 건 그에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는 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 베이징으로 향했다. 그림에대해 너무나 진지하던 중국 학생들의 태도가 너무 좋았고, 그는 그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또 다른 위기가 왔다. 고집을 꺾지 않는 딸을 믿고 밀어주던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 진 것. 온갖 노력을 쏟아부은 끝에 어머니는 반신불수일지언정 지팡이를 짚고 다닐 수 있을 만큼 회복될 수 있었다. 그때부터는 어머니를 위해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학원을 운영했고, 그의 하루 중 대부분은 자신의 그림이 아닌 남들을 가르치는 데 쓸 수밖에 없었다.
 
간혹 그림을 그리긴 했지만 전업작가가 아닌 현실은 그를 바닥없는 좌절감의 늪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 현실을 견디기 힘들어 현대 미술을 배우러 떠나기로 했다. 동생을 설득해 달랑 100달러만 들고 떠난 미국행. 정말 열심히 살았다. 때론 길거리 작가의 삶이 주는 초라함을 견디기 힘들 때도 있었지만, 누군가에게 그림을 그려준다는 그 사실이 나쁘지만은 않았기에 버틸 수 있었다. 그러던 2004년 즈음, 어머니가 다시 쓰러졌다. 이번에는 전신마비가 되어 버렸다.
 
한쪽 눈만 깜박거릴 뿐인 어머니와 그 현실을 오로지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 버거웠다. 그 순간에도 그는 그림을 그리며 버텼다. 돌이켜보면 그 과정이 스스로에게는 수행이었다고 임영선 작가는 말한다. 그림을 그려도 팔아야 살 수 있는데 돈벌이가안 되다 보니 그림의 길을 부여잡고 있는 게 욕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나이 서른아홉 살. 그림을 접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캄보디아로 봉사활동을 떠났다. 그런데 그곳에서 임영선 작가는 자신이 그려야할 대상을 찾게 된다.
 

 
 
| 아이들을 깨달은 자, 부처로 그리리
 
톤레삽 호수 인근의 오지 마을을 방문한 자리, 살가운 얼굴로 달려드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순수함이 가득한 그 얼굴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왠지 이 아이들을 그리면 이 영혼들에게서 삶의 희망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척박한 삶을 용기있게 살아가는 그 에너지를 담아내고 싶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직후 그는 캄보디아에서 만난 아이를 그리는 데에만 열중했다.
 
기왕이면 대작을 하고 싶었다. 자신의 그림이 잘못 전달되면 나약하고 동정심을 유발하는 그런 그림이 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만큼 크게 그려서 존경심을불러일으키고 싶었다. 하루 24시간 중 14시간을 꼬박 그림에만 매달렸다. 그리고 점심, 저녁으로 밥 먹는 두 시간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자는 시간이다. 처음에는 잠도 줄여가며 그림을 그렸지만 몇 번씩 혼절하는 경험을 하고난 후로 쉴 때는 확실하게 쉬어주기로 했다.
 
이런 생활 패턴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안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림에만 집중하느라 못 만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5년간 100여 점의 작품을 그렸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우연히 다가온 기회를 통해 조금씩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그가 처음 아이들을 그리기 시작할 당시에는 일반적인 유화의 형태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티베트를 다녀온 후부터 점묘를 선택했다. 태양빛이 강한 그곳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 빛깔 하나하나를 살려주기 위한 선택이었다. 수만 번의 점을 찍고 잘못된 부분은 칠을 깎아 벗겨낸 후 다시 점을 찍었다. 덧칠이 되면 색이 탁해지기 때문이다. 점을 찍다보니 점과 점이 모여 하나의 관계를 이루는 불교의 연기법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세로 길이만 2미터가 훌쩍 넘는 대작을 완성하고 나면 점과 점의 관계들이 주는 힘을 더욱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제가 평소에 상념이 많은 편인데 명상을 해도 잘 떨쳐지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점묘를 시작하면서부터 상념을 떨칠 수 있게 됐어요. 점과 점의 관계가 눈에 들어오면서 불교철학에 대한 이해도 더 깊어지는 느낌을 받기도 했죠. 그래서 전 아이들을 깨달은 자, 부처로 그리고 싶었어요.” 
 
그의 그림은 아이들이 살고 있는 그 사회의 모습과 살고 있는 공간, 생활상을 아이의 몸에 오버랩 시킨 것이 특징이다. 처음에 볼 때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아이의 몸은 티베트의 하늘과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채워져 있다.
 
이런 장치는 이 아이가 살고 있는 그 사회를 보여주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몸은 언젠가 사라져 자신이 살고 있는 그 자연 속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를 담아낸 메타포이기도 하다.전업작가로 살고 싶었던 꿈을 이룬 임영선 작가가 앞으로 바라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어머니의 건강,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제3세계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내가 그린 아이들이 언젠가 자신의 유년기를 담은 내 그림을 마주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그래, 순수했던 시절을 마주했을 때 전해지는 감동은 어쩌면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꿀지도 모른다. 그 순간은 본래 부처였던 내가 부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깨달음의 순간이 되리라
 
 
임영선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중국 베이징중앙미술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유행하던추상화 조류를 따르지 않고 인물화에만 끊임없이 천착한 끝에 제3세계 아이들의 얼굴에서 자신이 가야할 길을 발견하고 아이들의 얼굴을 대형 캔버스에 담는 작업을 이어가는 중이다. 2009년 ‘감각의 몽타쥬 미술시네마’ 전, 2010년 부산비엔날레 ‘진화 속의 삶’, 2011년 대만 카오슝에서 열린 ‘한국 현대미술의 스펙트럼’, 2013년 ‘고갱 그리고 그 이후’ 등의 전시에 참여했으며 총 6회에 걸쳐 개인전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