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책] 파드마 삼바바의 『티벳 사자의 서』

산산이 부서져 자유롭고 환희롭기를!

2014-02-06     조현
 
삶에 근본적인 의문이 시작된 것은 열네 살 때였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으로만 알았던 죽음이 갑작스레 아버지를 데려갔다. 아버지는 딸 넷을 내리 낳은 뒤 얻은 ‘귀한 아들’이라며 사랑채에서 나를 끼고 살았다. 그런 아버지가 어느 날 뇌출혈로 한마디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버렸다.
 
 
| 꿈에도 오지 않으시던 아버지
 
일가친척은 물론 마을 사람들 5백여 명이 집안을 가득 메워 함께 울었을 만큼 누구나 좋아했던 아버지는 마을에서 ‘법이 없어도 살 분’으로 통했다.
 
“하늘에서도 쓸모 있는 사람만 골라 데려 가다보니 네 아버지 같은 분이 먼저 가신 거란다.”라는 이웃 어르신들의 위로에도, 어린 소년은 왜 아버지 같은 분이 그렇게 가야 했는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사랑채 마당에 상청을 차려놓고 꼬박 1년간 상복을 입은 채 새벽마다 제사상을 차려 곡을 했다.
 
“네 아버지가 아무 것도 모르는 나와 7남매만 남겨놓고 이렇게 가실 분이 아니다.”라던 어머니는 꿈에서라도 아버지의 현몽을 원했지만 “꿈에도오지 않으신다.”며 야속해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우리집에 와 늘 사랑채 마루 아래서 잠을 자던, 영리한 개를 보며, 아버지가 가족이 그리워 개가 되어 우리집에 다시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몇 년 뒤 그 개도 이승을 하직했다. 죽음 이후에 아버지가 어디서건 존재하리란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내 기억, 그리고 묘 이장을 할 때 본 뼈 몇 조각 외엔.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불교는 죽음을 ‘최고의 경지’인 열반(니르바나)으로 표현했다. 고통이 모두 소멸된 지극한 평화의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천국에 다시 태어난다는 부활의 약속으로 이 허무를 넘어서게 했다. 서양철학의 아버지 플라톤은 철학을 ‘죽음에의 연습’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떤 종교도 철학도 그 허무를 쉽게 극복할 수 있도록 크게 도움을 주진 못했다. ‘세월’이 약이 되었을 뿐. 책 속에선 기독교 쪽의 영성 과학자인 스베덴 보리의 『천상여행기』나 임사체험기들이 사후 세계를 증언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체험이 ‘실제’인지, 그들의 마음과 뇌가 그려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스베덴 보리가 천상 세계에서 보았다는 미래의 예언이 들어맞지 않은 것도 그 사실성을 의심하게 했다. 심리학과 과학의 발전은 사후세계를 ‘미신’ 정도로 치부하게 하기에 이르렀다.
 
심리학의 태두 프로이드는 “종교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저명한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도 “천국은 없다. 사후세계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동화일 뿐이다. 또한 삶의 마지막 순간, 뇌가 깜박거림을 멈추면 그 이후엔 아무것도 없다. 인간의 뇌는 부속품이 고장나면 작동을 멈추는 컴퓨터다. 고장 난 컴퓨터를 위해 마련된 천국은 없다.”고 주장했다. 스티븐 호킹이 물리학자이긴 하지만 사후세계나 천국이 없다는 주장도 과학적 검증을 통한 보고서라기보다는 무신론이란 종교적인 신념으로 보인다. 그의 주장 또한 신뢰성을 얻기 어려운 이유였다. 
 
| 죽음, 그 신비의 해탈문을 열다
 
죽음 이후에 대해 어떤 확신을 갖지 못할 때 그나마 소크라테스의 모습이 위안이 됐다.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사형선고를 받고 독약을 마시고 죽던 날, 아내 크산티페가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와 통곡하고 돌아간 뒤 제자들도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어 울 때 이렇게 말했다.
 
“만일 죽음이 무감각 상태로 어지러운 꿈조차 꾸지 않는 잠과 같은 것이라면 죽음은 큰 소득이다. 여러분은 꿈조차 꾸지 않고 숙면의 밤을 보낸 날이 며칠이나 되는가. 그런 밤은 지극히 적다. 만약 단잠을 자게 된다면 얼마나 큰 소득인가. 그게 아니고 만일 죽음이 다른 곳으로의 여행이어서 옛 영웅들을 다 만날 수 있다면 나는 몇 번이고 죽고 싶다. 또한 죽어서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좋은 때가 왔다고 확신한다.”
 
사후세계가 있든 없든 소크라테스에겐 어느 쪽이든 좋다. 그러니 사후세계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소크라테스를 따라 절대 긍정의 마음을 가진다면 어차피 맞이할 죽음에도 훨씬 초연해질 수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쓰나미 같은 죽음의 파도 앞에서 우리를 붙들어 줄 수 있을까. 그런 회의에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에 부응한 것은 『티벳 사자의 서』였다.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들으라, 이제 그대는 순수한 존재의 근원에서 비치는 투명한 빛을 경험하고 있다. 그것을 깨달으라.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그대의 현재의 마음이 곧 존재의 근원이며 완전한 선이다. 그 것은 본래 텅 빈 것이고, 모습도 없고 색깔도 없는 것이다. 
 
그대 자신의 마음이 곧 참된 의식이며 완전한 선을 지닌 붓다이다. 그것은 텅 빈 것이지만 아무것도 없는 텅 빔이 아니라 아무런 걸림이 없고, 스스로 빛나며,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한 텅 빔이다. 그대 자신의 마음이 바로 영원히 변치 않는 빛 아미타불이다. 그대의 마음은 본래 텅 빈 것이고 스스로 빛나며, 저 큰 빛의 몸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 그것은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는 것이다.
 
죽는 순간 한 번만 들어도 해탈에 이른다는 『티벳사자의 서』다. 이 책은 1,200년 전에 파드마 삼바바에 의해 쓰여진 티벳불교 최고의 고전이다. 파드마 삼바바는 티벳불교에서는 석가모니부처님 못지않게 존경 받는 인물이다. 티벳불교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티벳불교에서는 구루린포체나 연화생보살로 불린다. 이 책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의 영혼이 어떠한 현상을 경험하게 되며, 사후세계는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텔레비전 화면처럼 상세히 보여준다. 그래서 환생의 굴레를 벗고 영원한 해탈에 이르는 방법은 무엇이며, 환생하는 자는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는지, 그 신비의 해탈문을 열어준다. 이 경전은 1927년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출판부를 통해 서구세계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현대의 의학과 정신분석학이 이제 겨우 그 입구를 들여다보았을 뿐인 사후세계, 삶과 죽음, 환생과 해탈의 문제를 이 경전은 전혀 모순없는 언어로 극명하게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이 책의 서문을 쓰며 ‘서구의 철학과 종교가 따라갈 수 없는 가장 차원 높은 정신의 과학’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초판이 나온 이래 이 책은 언제까지나 내 손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이 책에서 새로운 생각과 발견을 위한 많은 영감을 얻었을 뿐 아니라, 수많은 근본적인 통찰력을 얻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 눈송이처럼 부서지는 빛으로!
 
이 책의 위대한 점은 죽음 이후의 삶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생에서의 삶의 환영에서 깨어나게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사후에 보게 되는 그 모든 빛들과 신들의 세계가 사실은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 투영된 환영에 불과한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그것들은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 세계가 펼쳐 보이는 환상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으므로 나의 삶도 죽음도 우리의 환영이고, 모습도 색깔도 마음까지도 실체 없는 환영의 세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를 통해 우리는 ‘삶도 내 자신이 만드는 것이고, 세계도 내가 창조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도록 이끈다.『티벳 사자의 서』의 법음은 순도 100%의 다이아몬드다. 누구나 ‘언하대오言下大悟’해 허깨비와 환幻을 벗고 진심眞心의 문을 열 수 있을 만한 직설이다. 죽음의 공포와 불안에 떠는 인류에게 최대의 구원서임에 틀림없음에도 처음엔 그조차 환상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이런 상태를 확신하는 선禪 체험 이후, 그런 세계가 책 속의 설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세계에서 일어나는 분명한 현상임을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이 『티벳 사자의 서』의 체험을 뒷받침해주는 책이 『평화로운 죽음 기쁜 환생』으로 번역돼 있는 ‘티벳의 사후세계 체험자들의 증언기’다. 문제는 생사가 아니다. 체험을 통해 생사의 분별을 넘어서는 것이다.
 
『티벳 사자의 서』가 말하는 지극한 세계는 이 삶 속에서도 항상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삶 속에서 그 빛나는 마음의 본성을 체험하기 위해 『티벳 사자의 서』와 함께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은 『아티샤의 명상요결』이다. 달마 대사가 중국에 선을 전했다면, 아티샤 존자(982~1054)는 티벳에 불교의 정수를 전한 분이다. 
 
10여 년 전부터 파드마 삼바바와 아티샤가 수행했던 히말라야의 수많은 동굴을 찾아 순례하곤했다. 그 때 설산에선 눈이 생사를 벗고 춤추며 광명처럼 쏟아져 내렸다. 모든 이가 눈송이처럼 부서지는 빛으로, 어둠과 밝음, 삶과 죽음, 고통과 쾌락이 산산이 부서져, 자유롭고, 환희롭기를!
 
조현
종교전문기자. 1996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한 이후 사회부, 정치부를 거쳐 종교분야에 자원해 마음·영성·치유·봉사·공동체에 대한 기사를 쓰고 있다. 저서로 문화관광부장관 추천도서인 『그리스 인생 학교』,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인도오지기행』,『울림』, 『은둔』, 『하늘이 감춘 땅』 등이 있다. 한국출판인회의에서 ‘우리시대 대표작가 3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지친 마음을 내려놓는 쉼터인 웹진 ‘휴심정’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