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깨우는 환희심, 순례

경주 남산 순례 화보

2012-09-03     불광출판사
얼마 전 만났던 몽골 스님에 따르면, 몽골의 드넓은 초원에는 길이 없다고 합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다니는 곳이 그냥길이 된답니다. 정해진 길이 없다는 것은 무수한 길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됩니다. 지금 세계의 불자들이 부처님 성지를 찾아나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성지를 향해 정해진 길로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니다 보니 길이 되었고 순례가 되었을 것입니다.
순례가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친구, 가족, 도반과 함께 떠나는 순례는 소풍이자 수행입니다. 참선이나 간경, 염불, 주력과 같이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순례도 이제 정식수행법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때로는 혼자, 때로는 두세 명씩, 때로는 버스를 타고 대단위로 떠나는 순례는 기쁨 그 자체일 것입니다.
순례는 국내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인도, 네팔, 미얀마, 스리랑카는 물론 중국, 대만, 일본 등으로 순례를 떠나는 사람들도 늘고 있습니다. 여행이어도 좋습니다. 부처님과 그 가르침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성지에서 참나를 만나 한 번쯤은 쉬어가도 좋을 일입니다.
경주 남산의 불국토에서 만난 부처님의 모습을 화보로 담아보았습니다. 사진으로나마 순례의 환희로움을 느껴볼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무더위도 잠든 새벽녘을 틈타 봉화골에 들었다. 어스름 속에 한 시간여를 올라 도착한 칠불암, 그 위로 깎아지듯 자리 잡은 절벽을 돌아서자 푸근한 인상의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보물 제199)이 인사를 건넨다. 연화대 아래로 한쪽 발을 내린 채, 중생의 부름에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듯 반가좌(半跏坐)를 하고 있는 모습은 한량없는 보살 마음 그대로였다. 멀리 산마루로 떠오르는 아침 햇살에 천년을 머금은 자애로움이 밝게 빛났다.
 
 
울창한 솔숲을 따라 삼릉계곡을 오르다 보면 곳곳에 석불상들이 눈에 들어온다. 비록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은 드물지만, 구비마다 놓여있는 흔적들을 통해 언젠가 이곳이 찬란한 불교 성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산중턱에서 만난 삼릉계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66호) 역시 무흠한 자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투박하게 덧대어진 손길이나마 모자람이 없다는 듯, 앉아계신 부처님은 넉넉한 표정이었다.
 
 
탑곡 마애불상군(보물 제201호)은 높이 10미터, 둘레 30미터의 커다란 바위로 사면(四面)에 불상, 보살상, 승려상, 비천상, 목탑 등 총 34개의 도상이 돋을새김 기법으로 새겨져 있다. 남산 북서쪽 초입에 위치해 있어 철마다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지만, 정작 이곳의 사방불들은 쉬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한나절을 기다린 끝에야 겨우 마주한 동면(東面) 본존불과 협시보살. ‘무상심심미묘법 백천만겁난조우(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遇)’라 했으니, 그래도 이만하면 적잖은 인연인 듯싶었다.
 
 
상선암 너머에 자리한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8호). 경주 남산의 가장 큰 부처님 전을 찾았다. 포근한 인상을 심어주는 다른 부처님들과 달리 이곳의 부처님은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을 짓고 계셨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매서운 눈초리로 세상을 굽어보는 부처님 앞에 선 순간, 나도 몰래 속으로 참회진언이 흘러나왔다.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날이 저물도록 내 안의 쌓인 때를 벗겨나가는 사이, 어느새 부처님 품은 세상보다 환하고 아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