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소리'를 뿜어내는 우리 시대의 명창

명장의 고집불통佛通

2012-07-20     불광출판사

판소리 명창 안숙선



전 세계에 K팝 열풍이 불고 있다. 중독성 있는 멜로디와 세련된 춤으로 아시아를 넘어 북미와 남미, 유럽, 중동에 이르기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최근에는 K팝의 본고장인 대한민국을 직접 찾는, 일명 ‘K팝 음악 성지순례’도 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전통음악인 국악도 K팝처럼 국내는 물론 세계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아직까지는 단지 고루한 옛날 음악으로만 여겨져, 어렵고 지루하다는 그릇된 편견이 강한 것 같다. 하지만 머지않아 흥겨운 가락과 심금을 울리는 우리 소리가 곳곳에 울려퍼지는 날이 올 것이다. 사라질 뻔한 전통의 맥을 올곧게 지켜온 저력을 밑바탕으로, 시대와 세대의 벽을 넘어 현대화와 대중화를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시도되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예능보유자이자, 판소리 명창 안숙선(64) 선생이 있다.

애기명창이 국창國唱이 되기까지
국악계의 ‘프리마 돈나’이자 ‘영원한 춘향’으로 불리는 안숙선 명창은 올해로 소리 인생 55년을 맞았다. 남원의 예인 가문인 외가의 피를 고스란히 이어 받아 9살 때 전통음악에 입문했다. 가야금 명인인 이모 강순영에게서 가야금 산조와 병창을 배우고, 동편제의 거목인 외당숙 강도근 명창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다. 남원국악원을 다니며 국악의 기초를 익히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는 이모 집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이모가 가야금 가르쳐주면 가야금 배우고, 소리 배워라 하면 소리 배우고, 국악원에 나가라 하면 국악원 나갔지요. 악보가 없던 시절이라, 어른들이 가르쳐주면 스스로 익히고 습득할 수밖에 없었어요. 가야금을 배우더라도 손에 피가 나도록 연습했지요. 가르쳐주신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곧잘 따라하니까, 싹수가 있다며 공연 무대에 세워주셨어요.”
공연 무대를 오르면서부터는 ‘애기명창’, ‘소녀명창’으로 남원 인근에서 이름을 날렸다. 애기명창이 국창이 되기까지는 타고난 재능, 스승 복, 불광불급不
狂不及의 열정 등 삼박자가 제대로 맞아 떨어져야 했다. 타고난 재능이야 두말 할 것 없고, 그는 유달리 스승 복도 많다. 그의 인생에 빛이 되어준 두 스승이 있었으니, 당대 국악계의 거장 만정 김소희 선생과 향사 박귀희 선생이다.
19살 때, 김소희 선생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서울로 불러 직접 판소리를 사사했다. 방송과 공연에 데리고 다니며 그의 이름을 알리게 했으며, 생활적인 면에서도 어머니가 그렇듯이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챙겨주었다. 당시 그는 생계를 위해 유일한 상설무대인 워커힐호텔에서 매일 두 차례씩 공연을 했다. 쉬는 날은 1년 중 하루, 딱 설날뿐이었다. 10년이 넘게 낮에는 소리를 배우고, 밤에는 공연을 하다보니 기관지에 탈이 나 소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김소희 선생이 국악 공부를 쉬면 안 되니 가야금 병창을 배우라며 박귀희 선생에게 보냈다. 박귀희 선생은 첫 대면에서 그가 재목임을 한눈에 알아봤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가야금병창)였던 스승의 전수 조교로 뽑혀, 스승이 돌아가신 후 1997년 뒤를 이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79년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한 해다. 박귀희 선생이 단장으로 있는 국립창극단에 오디션을 통해 입단하게 되었다. 그곳은 마음껏 연습에만 몰두하며 제 기량을 뽐낼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이때 그는 연습벌레의 면모를 제대로 발휘한다.
“그때 비로소 내가 가는 길에 확신이 생겼어요. 의상과 분장도 알아서 해주고, 조명이 제대로 비추는 무대에 서니 마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것 같았어요. 본격적인 예술의 무대로 뛰어든 셈이죠. 국립극장에서 마음껏 연습할 수 있고, 무대에서 연습한 걸쏟아내기만 하면 됐거든요. 그때는 소리에 미치다시 피해서 한시라도 시간을 허투루 쓰는 걸 용납할 수 없었어요. 아무도 없는 국립극장 지하 보일러실에서 혼자 소리 연습하다가 귀신으로 오인받기도 했지요.”

판소리 완창, 승승장구의 포석이 되다
뮤지컬에서 노래가 주가 되듯이, 창극은 판소리가 주가 된다. 안숙선 명창은 국립창극단에 들어가면서부터 판소리 다섯 마당 완창을 목표로 소리 공부에 매진한다. 김소희 선생에게서 흥보가와 춘향가를 배웠고, 심청가는 성우향 선생, 적벽가는 박봉술 선생, 수궁가는 정광수 선생에게서 배웠다. 몇 번 들으면 똑같이 따라해 ‘녹음기’라는 별칭도 생겨났다. 1986년 적벽가 완창을 시작으로, 1990년까지 판소리 다섯 마당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국립창극단 시절부터 시작된 그의 승승장구는 현재까지 계속 이어진다. 1986년 남원춘향제 전국명창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으며 명창 반열에 올랐으며, ‘춘향’역을 비롯해 창극의 거의 모든 주역을 도맡다시피 했다. 미국, 유럽, 남미 등 세계 곳곳에서 공연할 때는 우리말을 전혀 못 알아듣는 외국인들을 웃고 울리며 ‘천상의 소리’라는 극찬을 받았다. 프랑스 문화부로부터는 예술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1997년부터 두 차례에 걸쳐 국립창극단 단장 및 예술감독을 역임했으며, 2003년부터는 한국예술 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음악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
고 있다. 또한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회 위원장과 춘향제 제전위원장을 맡아 우리 소리를 알리고 세계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현재 그는 무엇보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국악의 대중화와 현대화를 위해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클래식 관현악단과 협연을 하고, 창극단의 오페라 기법 동원, 재즈 반주에 맞춰 판소리를 랩처럼 소화해내는 파격적인 시도도 거침없이 해낸다. 사물놀이 김덕수와 함께 흥겨운 마당도 연출하고, 소리꾼 장사익 선생과 아름다운 합동무대도 펼친다. 또한 청중과 소통하기 위해 지리산 둘레길을 함께 걸으며 소리를 들려주고, 자신의 음악 세계와 인생 이야기를 소리와 함께 더불어 나누기도 한다. 아이돌그룹 소녀시대에게 판소리를 가르치고 싶다고도 한다.
“소녀시대가 판소리 한 대목을 편곡해서 부르면 우리 소리에 대한 궁금증이 폭발적으로 일어날 거예요. 예전에 영화 ‘서편제’가 나오면서 판소리가 멋지고 좋다는 것을 모두 공감했듯이 말이에요. 제가 음악적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은 우리 소리의 저변을 확대하고 국악의 장르를 넓혀보려는 의도가 있어요. 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다보니, 이 아이들이 재능을 펼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줘야겠다는 고민이 앞서는 것도 사실입니다. 요즘은 후배들이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굉장히 많은 노력을 하고 있어요. 이제 저는 나이도 있고 하니, 한 발 물러나서 제 음악을 오롯이 지켜나가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체력이 닿는 한 무대에 서서 관객들과 소통하고 감정을 나누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무엇이 가장 두렵습니까?”
안숙선 명창은 결혼을 하면서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시댁이 불교집안이라 자연스럽게 불교를 접하게 된 것이다. 20여 년 전에는 창작 판소리 ‘불타전’ 공연을 하며, 부처님의 일대기를 우리 소리로 들려주기도 했다. 불교를 알고 판소리를 대하다보니, 판소리 사설 속에 내포되어 있는 가치관이 불교적 사상에 맞닿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흥보가의 인과법, 심청가의 윤회 등이 대표적이다.
“제가 신심이 돈독치는 못해요. 그런데 어려운 일에 봉착하거나 긴장되는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불교에 의지하게 됩니다. 무대에 오르기 전 초조한 순간에는 늘 눈을 감고 관세음보살 염불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로 이동할 때는 스님 법문 테이프를 들으며 불교 공부를 하고 있어요. 제가 잘은 모르지만 불교의 진리는 나를 한없이 낮추고 남을 배려하는 자비심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렇다. 그는 가장 낮은 곳에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을 녹여주는 소리를 했고, 독거노인에게 소리 공양을 해드리고 한 끼 음식이라도 대접해 드리려고 한다. 어느 순간 그는 항상 최고의 위치에 있었지만 잠시도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작고 여린 몸으로도 늘 자신의 틀을 깨고 한계를 시험하며 다양한 시도를 즐겼다. 어느 때는 참기름을 짜내듯이 온몸의 기를 다 쥐어짜서 소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힘을 다 소진하고 나면 몸은 망신창이가 된 듯
아파왔다. 그때 그는 느꼈다. 물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위로해 주는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진실한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진실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해요. 소리는 공부하는 과정이 힘들어도 한 번 내 것으로 받아들이면, 절대 남이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며 왜 하는지 똑바로 묻고 스스로 깨우쳐야 해요.
그렇지 않고서는 목숨을 내놓고 할 수가 없어요. 민족 투사들이 괜히 죽습니까. 자신이 하는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에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거예요. 저는 제가 하는 소리를 듣고 인상 찌푸리며 나가는 청중이 죽음보다 두렵습니다. 제가 무대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지거든요. 여러분은 무엇이 가장 두렵습니까?”

안숙선.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예능보유자이자 판소리 명창. 예인 집안인 외가의 영향으로 9세 때 전통음악에 입문했다. 1979년부터 국립창극단에서 주역으로 활동하며, 1986년부터 1990년까지 판소리 다섯 마당을 완창했다.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역임했으며,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가 되어 후학양성에 힘쓰고 있다.
1986년 남원춘향제 전국명창경연대회 대통령상, 1993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98년 프랑스 문화부로부터 예술문화 훈장, 1999년 옥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