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이 잉태된다"

[길 그리고 걷기] (사)우리땅걷기 신정일 대표 인터뷰

2012-06-21     불광출판사

길 위의 삶과 꿈

제주 올레길에서 비롯된 걷기 열풍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 전국 방방곡곡에 둘레길, 해안길, 숲길, 오솔길, 성곽길, 옛길 등 걷기 좋은 길들이 앞다퉈 조성되고 있다.

현재 새롭게 만들어졌거나 조성 중에 있는 도보여행길이 수백 개에 이른다. 어느 길을 가든 배낭 하나 짊어지고 타박타박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걷기의 어떤 매력이 사람들로 하여금 길 위에 서게 만드는 것일까? 도보답사의 산 증인이자 걷기의 달인, 문화사학자 신정일(59)‘(사)우리땅걷기’ 대표를 만나보았다.
 

길에서 인생의 비밀을 듣다

‘강호의 낭인’, ‘길의 철학자’, ‘현대판 김정호’라고 불리는 신정일 대표. 그는 걸어야 행복한 사람이다. 지난 30여 년간 우리 땅 구석구석을 밟으며 수십 만km를 걸었다. 금강, 섬진강, 한강, 낙동강 등 한국의 거의 모든 강을 따라 걸었고, 400여 산을 오르내렸다. 또한 영남대로(부산~서울), 삼남대로(해남~서울), 관동대로(서울~울진) 등 조선의 옛길과 동해 트레일(부산~통일전망대)을 도보답사해 책으로 펴냈다.

그의 걷기는 본격적으로 1985년 황토현문화연구소를 발족하면서 시작되었다. 1주일에 최소 4일씩 역사문화 현장을 답사하며 전국 산천을 훑고 다녔다. 2005년에는 (사)우리땅걷기를 만들어 도보답사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우리땅걷기 카페(cafe.daum.net/sankang) 회원은 9,000여 명에 이르며, 매주 1박 2일 또는 2박 3일 일정으로 아름다운 강산을 함께 걷고 있다. 참여자는 적게는 50명, 많게는 300명에 이른다. 그에게 ‘걷기’의 즐거움은 무엇일까?

“니체는‘가장 중요한 것은 길 위에 있다’고 했어요. 걷기는 세상을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차를 타고 가면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어요. 하지만 유유히 걷다보면 전체를 볼 수 있으며 수많은 인연을 만나게 됩니다. ‘저모퉁이를 돌면 어떤 새로운 풍경과 인연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하는 설렘과 기대감이 저를 걷게 하는 원동력인 것 같아요. 세상을 향해 걷다보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부딪히게 되니, 마음수행하기에도 좋습니다. 그리고 걷기는 만병통치약이에요. 『동의보감』을 쓴 허준도 ‘약보藥補보다 식보食補가 낫고, 식보보다 행보行補가 낫다’고 했습니다. 매월당 김시습, 『택리지』를 쓴 이중환도 보약 한 재 안 먹고 떠돌아다녔어도 건강하게 오래 살았어요. 저 또한 병원 신세를 져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다이어트나 건강을 위해 걷는 것도 좋지만, 이왕이면 길의 역사, 길을 거쳐간 사람들의 흔적, 문화유산 등을 느끼면서 걸으면, 인생의 비밀을 듣게 되고 삶도 풍요로워질 거예요.”


그는 스스로를 자연대학교를 나와 지금은 총장이 되었다고 소개한다. 길에서 자연, 역사, 문화, 사람을 만나며 세상의 모든 것을 배웠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맞닥뜨렸다. 그의 걷기는 스스로에 대해 반복해서 묻고 또 묻는, 스스로를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이다. 견고한 카메라 끈이 일곱 번이나 떨어지도록 지독하게 걸어온 삶, 그가 걸음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불우했던 어린 시절로부터 연유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전북 진안의 섬진강 기슭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난 그의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다. 어머니가 힘겹게 행상을 하며 마련한 돈으로 중학교에 진학할 두 번의 기회가 있었으나, 아버지가 노름으로 모두 날려버렸다. 내성적이며 숫기 없던 그는 늘 외톨이였으며,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진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열다섯 살 무렵, 이대로는 살 수 없다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나섰다. 운수납자가 되어 세상을 떠돌며 살겠다는 결심을 하고 화엄사로 출가하게 되었다. 산내암자에서 두 달가량 머물며 행자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주지스님이 불렀다. “너는 아무래도 절에는 맞지 않는 것 같다”며 차비를 쥐어주는 것이다. 절망과 상처를 안고 절을 나섰으나, 갈 곳이 없었다. 무작정 여수에서 부산으로, 또다시 울산에서 대구로 발길을 옮겨다니다보니 여비가 떨어졌다. 하는 수 없이 남의 집 추녀 밑에서 자고 산 열매로 배고픔을 달래가며 고향 집까지 걸어갔다.

“그때의 여행이 제 인생에 있어 가장 길고 험난한 여정이었지 않나 싶어요. 다만 내가 혼자라는 것, 이 우주 속에 내던져진 절체절명의 고아라는 것, 결국 인생은 내 식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감지했던 것 같아요. 그것을 다시 깨닫는 데 오랜기다림과 고통의 시간이 필요했고, 마침내 자유를 찾아 길에서의 삶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회원들과 걷다 보면, 오전엔 서로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함께 가지만 오후로 넘어가면 ‘나’를 생각하면서 저마다 혼자 걷게 되요. 쉴 때도 혼자 쉬죠. 그것을 보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을 실감하게 되고, 인간은 결국 혼자 가는 존재임을 느끼게 됩니다.”

‘맵고 바르게 한 길을 가라’는 뜻의 이름 ‘신정일辛正一’은 그의 본명이 아니다. 16살 때 스스로를 개혁하고 운명을 개척하고자 본인이 직접 지은 이름이다. 이후 그는 활자중독에 걸린 것처럼 책만 파고 들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도통 앞이 보이지 않던 절망적인 청소년 시절, 오직 책만이 그의 희망이자 탈출구였다. 등잔불 밑에 머리카락을 태워가며 책에 몰입했다.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 니체의 책들을 비롯해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문학, 역사, 철학서를 섭렵해 나갔다.


“항상 꿈을 꾸게나, 꿈은 공짜라네”

그의 운명은 이미 책을 통해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9살 때 ‘광풍’이라는 소설을 읽으며,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김시습의 삶에 깊이 매료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진안군 글짓기대회에서 장원을 차지했는데, “너는 글을 쓰는 작가가 되면 좋겠다”는 선생님의 한마디에 작가의 꿈이 가슴에 굳게 자리잡혔다. 글을 쓰겠다는 욕망은 너무나 팽배했지만, 머릿속 지식과 생각만으로는 글이 써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걸었고, 마침내 마흔을 넘기면서부터 자신의 경험으로 체화된 글을 세상에 내놓기 시작했다. 그는 쉼없이 걸으며 전사처럼 글을 썼다. 그리고 지난 17년간 61권의 책을 펴냈다.

“절망하지 않는 사람에게 기대할 수 있는 건 없어요.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이 잉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어요. 조용헌 선생이 말하기를 ‘벼룩 간을 공부한 사람은 벼룩 간만 알 뿐’이라고 했어요. 경험한 것만큼만 쓸 수 있습니다. 『다시 쓰는 택리지』를 쓰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는데 새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어요. 자기 전공 분야에만 집중하다보니, 지리를 공부한 사람은 역사에 대해 쓰지 않고 반대로 역사를 공부한 사람은 지리에 대해 쓰지 않는다는 거예요. 저는 대학을 나오지 않고 전공 분야도 없으니, 길을 걸으며 쌓아뒀던 자양분으로 역사지리학을 통합해 자유롭게 쓸수 있었지요.”

그의 걷는 모습은 참 가볍고 경쾌하며 편안하다. 나폴나폴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고 노루 새끼가 폴짝 뛰는 것 같기도 하다. 그 걸음 속에서 잊혀진 길들이 복원되고, 나루터와 고개마루에 주막집이 들어선다. 또한 5대강 박물관이 건립되고, 보행자 전용 도로가 생겨나며, 길의 날(11월 11일)이 제정되어 길문화축제가 열린다. 그가 걸으면 꿈 같은 일들이 현실이 되어 일어난다. 그의 꿈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해파랑길(부산~통일전망대)을 이어 북한과 러시아를 거쳐, 스웨덴 포르투갈을 지나 아프리카 케이프타운까지 걸을 수 있는 세계 최장거리 도보 코스를 문체부에 제안했다. 또한 제주도와 육지에 한 곳씩, 풍류를 즐기며 공부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공동체마을 건립을 계획하고 있다.

“우리는 개개인이 하나의 우주예요. 태어날 때부터 갖춰진 역량을 제대로 써보지 못한다는 것은 마이너스 인생 아니겠습니까. 요즘 현대인들은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여유없이 살아갑니다. 너무 바쁘면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갈 뿐 남는 것이 없어요. 한가하게 해찰할 줄 알아야 해요. 멈춰서 바라보며 해찰하는 사이에 새로운 것이 발견됩니다. 그 새로움이 희망이 되고 꿈이 되는 거예요. 꿈은 공짜입니다. 꿈을 꾸어야 꿈이 이뤄집니다. 끊임없이 내가 왜 사는지 물어야 하고, 그 안에서 희망을 만들어가야 해요.”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몹시도 걷고 싶어진다. 여름에 걷기 좋은 길 추천을 부탁하니, 망설이지 않고 몇 개의 길이 불쑥 튀어나온다. 해파랑길(영덕~울진 코스), 낙동강(봉화 석포면~명호면), 안동 퇴계 오솔길이다. 자연을 벗 삼아 걸으며 오롯이 ‘나’와 대면하는 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신정일.
우리나라의 대표적 문화사학자인 동시에 이 땅 구석구석을 걷는 작가이자 도보여행가. 현재‘(사)우리땅걷기’ 이사장으로 서 역사,지리 관련 저술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1985년 ‘황토현문화연구소’를 설립하여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을 재조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사업들을 펼쳤고, 1989년부터 문화유산답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다. 현재 소외된 지역문화 연구와 함께 국내의 답사 프로그램과 숨은 옛길 복원 등의 사업을 진행 중이다.저서로는『소울로드』,『가슴 설레는 걷기여행』,『길에서 행복해 져라』,『사찰 가는 길』,『신정일의 신택리지』,『다시 쓰는 택리지』,『꿈속에서도 걷고 싶은 길』,『한국사의 천재들』,『대동여지도로 사라진 옛고을을 가다』,『조선을 뒤흔든 최대의 역모사건』,『지워진 이름 정여립』등 61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