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행복하다

명장의 고집불통佛通

2012-06-21     불광출판사

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 박찬수




하루 86,400번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초침처럼 부지런한 사람, 그리고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뤄 복습하는 일을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 반세기가 넘는 세월,
죽은 나무에 예술혼을 불어넣어 새 생명으로 창조해온 박찬수(64) 목조각장이다. 예순을 훨씬 넘긴 나이에도 자귀(나무를 깎아 다듬는 연장)를 힘차게 내리치는 모습에서, 우리 전통 문화를 올곧게 지켜온 장인의 뚝심과 집념을 본다.

“아재, 지금 뭐하요?”
박찬수 선생은 ‘하늘 아래 첫 동네’로 불리는 경남 산청의 화전민 마을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산골에서의 가난을 이기지 못해 서울로 이사왔는 데, 촌아이에겐 모든 것이 낯설고 어리둥절했다. 어느 날 하릴없이 바깥구경을 하는데, 서너 명이 모여 나무 조각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때 만약 무심코 지나쳤더라면, 우리나라 최초의 목조각장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무 조각이 마냥 신기했던 13살 소년은 다가가 외쳤다. “아재, 지금 뭐하요?” 순간의 호기심이 운명이 되어, 목조각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당시 인근에 살던 김성수 선생에게서 인두화를 비롯해 장승, 솟대 등을 만드는 민속조각을 배울 수 있었다. 이후 이운식 선생으로부터 현대조각, 신상균 선생에게서 불교 목조각을 배웠다. 박찬수 선생은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중도에 그만두는 법이 없다. 끊임없이 해결책을 고민하고 연구해서 새로운 길을 창출해낸다. 그의 목조각 50년 역사도 그렇게 이어졌다.



“목조각에 입문해 10년을 해보니, 기술적으로는 됐다 싶었죠. 사진처럼 정확히는 못해도 실물을 비슷하게 깎는 것까지는 하겠더라구요. 그런데 아무리 정성을 기울여 작품을 만들어놔도, 재질이 나무인지라 쉽게 뒤틀리고 갈라져서 변형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다음 10년은 일본에 건너가 나무의 속성을 공부했습니다. 나무를 알고 기술이 있으니, 전문가들로부터 인정도 받고 작품 활동도 즐거웠어요. 그런데 30년째 되니 한계가 다가오더군요. 현대와 호흡할 수 있는 창의성이 없었던 거예요. 그 이후부터는 ‘부처가 입을 열다’ 특별전을 비롯해 현대 예술가들과 퍼포먼스도 하며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습니
다. 40년이 지나니 장소와 작품의 조화를 생각하게 됐고, 50년이 되어 뒤돌아보니 그동안 너무 많이 만든 게 흠이에요. 먹고 살기 힘들었으니, 작품의 개념보다는 닥치는 대로 만들었던 거죠. 이제는 단 하나를 만들더라도 후대에 남을 수 있는 대표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그는 현재에 100% 충실하며, 현재를 즐긴다. 자신이 선택한 일은 1년 365일 내내 즐겁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의 목조각에 대한 열정은 상상을 초월한다. 작품의 형태가 나오기 시작하면 스스로 도취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업 삼매에 빠진다. 4~5일 동안 잠도 밥도 잊고 작업하다
온몸에 마비가 온 적이 허다하다. 그의 열정은 빛이 되어 돌아왔다. 1982년 단원예술제 종합 대상, 1989년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에 이어 1996년 우리나라 최초의 목조각장(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에 지정되었다.
유엔과 유네스코 본부를 비롯해 일본, 프랑스, 미국 등 해외전시도 80여 차례 열어, 화려함과 정교함의 극치라는 평가를 이끌어내며 우리 전통문화의 우수
성을 해외에 알리고 있다.


고요동자


목조각을 고유한 예술의 단계로 올려놓다
박찬수 선생은 코흘리개 시절부터 할머니를 따라 산청 대원사에 다니며 불교를 자연스럽게 접했다. 이후 목조각을 하며 불교미술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으며, 불교학계의 거목이었던 고 이기영 박사로부터 불교사상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그의 호 목아木芽는 ‘나무의 싹을 틔워 생명을 부여한다’는 뜻으로 녹원 스님(직지사 조실)에게서 받은 법명이다. 1970년대부터 그의 작품 세계는 불교가 중심을 이뤘다.
단원예술제와 전승공예대전 수상 작품도 불교적인 소재인 삼존불상과 법상(法床, 스님들이 설법할 때 앉는 의자)이다. 그의 작품 활동은 늘 변화에 변화를 거듭했다.
초창기엔 전통공예의 재현에 집중했다면, 후대로 갈수록 창의성과 상상력을 발휘해 현대와의 소통에 방점을 찍는다. 입을 열고 설법하는 불상을 조성하는가 하면, 화려한 색감을 통해 강렬한 가족애를 표현하기도 하며, 벽에 걸고 감상할 수 있도록 회화적 측면을 가미해 표면만을 부조로 표출하는 등 실험적인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 한편 그는 ‘자귀의 신’으로 통하며 대중들과 가까워졌다. 나무를 세워놓고 자귀로 퍽퍽 내려쳐, 2~3분 안에 환하게 웃는 얼굴로 형상화하는 퍼포먼스 덕분이다. 세계적인 미술평론가 제라르 슈리게라는 그의 작품을 보며 호평을 거듭했다.
“‘목조각의 명인’으로서 박찬수는 수천 년 유구한 전통의 상속자이기도 하다. 그는 불교의 불가결한 역사적 종교적 의미와 정신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점차로 장인의 영역에 속하던 목조각을 고유한 예술의 단계로까지 올려놓았다. ...자신이 다루는 바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그는 예술이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환기하는 것임을, 불교 본래의 무구無垢함을 잃지 않고서 힘을 실어 기氣를 펼치는 것임을 알고 있다.”
또한 박찬수 선생은 늘 새로운 기법을 창안해 낸다. 전통적인 기법을 원형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연장을 치는 여러 기법들을 개발해 나무의 고유한 질감을 풍부하게 표현한다. 그에겐 사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철칙이다. 조각칼 하나로 수천 번의 손길을 거쳐 곡선을 자연스럽게 만들면서도 나뭇결의 미세한 느낌을 고스란히 살려낸다. 또한 밑그림 없이 나뭇결을 따라 조각하며 작품에 역동성과 생동감을 더해 준다.
“물이 흐르지 않으면 썩듯이, 사람도 정체되어 있으면 퇴보하는 일밖에 남지 않습니다. 인간문화재랍시고 제 기능만 믿고 전통 방식만 답습한다면, 사람도 작품도 곧 잊혀지기 마련이에요. 전통은 전통대로 철저히 지켜나가되, 전통을 기반으로 새로운 변화를 끊임없이 시도해나가야 살아있는 전통 속에서 목조각이 유지 발전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시도를 계속 할 것이며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목조각가로 남고 싶어요.”


한국의 여인


모든 사람의 귀의처가 될 수 있는 목조각 작품
박찬수 선생의 불교미술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1989년 자비를 들여 불교미술의 발전과 계승에 뜻을 두고 목아불교박물관을 설립했다. 박물관은 23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주의 명소로 자리잡았다. 보물 3점과 그의 작품 200여 점을 비롯해 3만여 점의 유물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또한 1995년부터 매년 5월 5일 어린이날 ‘전국 어린이 부처님 그림 그리기 대회’를 열어,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에 불심을 심어 주고 있다.
“박물관 운영은 문화운동의 차원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심정으로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는 급속한 발전을 이뤘지만 정신문화가 뒤따르지 못했어요. 그래서 OECD 국가 중 자살율 1위의 불명예를 안고 있는 겁니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고 정신을 회복하는 곳이 박물관이에요. 부처님의 말씀과 진리를 통해 문화 체험을 하며 바른 인성을 갖추는 장입니다. 부처님 그림 그리기대회는 올해로 18회째 열렸는데, 제1회 대회 때 문광부장관상을 수상한 어린이가 지금은 대만 불광산사의 스님이 되어 있어요. 그리고 이 대회 출신 아이들이 성장하여 상당수가 미술을 전공하며 불교문화를 반영하고 있어요.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저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여러 여건이 어려워도 박물관 운영과 그림 대회를 포기하지 않고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근기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사실 박물관 운영은 작품활동 수익을 쏟아부어도 적자를 면치 못하고, 3천여 명의 어린이가 참가하는 그림대회는 실속 없이 귀찮은 일이다. 그러나 그가 절대 후회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며, 그 일을 해야 행복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자신의 행복을 넘어, 목조각 작품을 통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그 속내를 조심스럽게 드러내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만들고 싶은 작품이 꼭 하나 있어요. 모든 사람의 귀의처가 될 수 있는 작품이죠. 종교, 인종, 성별 모든 것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편안함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 중입니다. 도둑놈이 보면 도둑질을 참회하고, 바람둥이가 보면 아내에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 또는 누구든 보면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같네’하면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 작품. 어떻습니까, 그런 작품이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하지 않을까요.”



박찬수.
1954년 경남 산청에서 출생.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이사와, 이웃에 사는 김성수 선생에게서 민속조각을 배우며 손에 조각칼을 쥐게 됐다. 1982년 단원예술제 종합대상, 1986년 불교미술특별전 종합대상, 1989년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으로 지정되었으며, 유네스코 초청 미국순회전을 비롯해 일본, 프랑스 등에서 80여 회의 해외전시회를 가졌다.
현재 국립전통문화학과 초빙교수,여주 목아불교박물관장, (사)한국중요무형문화재기능보존협회이사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