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우리 불자들이 나서야 할 때다

특집/이 땅에 정토를

2007-06-16     관리자

··현암 박 걸 1946년 경남 창원 출생.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현재는 개인사업을 하고있다.

 1974년 8월15일자 조선일보에는 큼지막하게 쓰여진 단상(壇上)에 '인영이 불견(人影不見; 단 위에 사람의 그림자를 볼 수가 없다)' 이란 시론(時論)과 함께 몇 장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바로 며칠전 29돌 8.15광복절 기념식 도중  육영수 여사가 피격받는 장면이었다. 그 당시 이 장면들은 TV로 전국에 중계 되었었다.

 8.15 경축사를 하는 박 대통령. 그 뒤에 앉아있는 삼부 요인들···. 갑자기 총소리가 울리고 장내(場內)는 혼란에 빠진다. 아주 경미하게 그 자세를 기울이는 육 여사, 황급히 의자 뒤로 몸을 숨기는 단상의 사람들. 순식간에 아주 순식간에 단상은 텅 비어버린다.

 단(壇) 아래에는 비명소리와 함께 수라장이 되어버린다. 이런한 장면의 설명과 함께 시론(時論)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총소리 몇 발에 혼비백산하여 자기 자신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국민들이 믿고 살겠는가. 누구나 국가의 중책(重責)을 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서민이 우러러 보는 그 높은 지위와 명예는 무엇때문에 주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언제든지 죽을 각오가 없이는 국민의 삶을 다루는 지위를 가져서는 안된다.

 이것이 그 당신 조선일보의 내용이다.

 왜 까마득히 잊고 있던 가슴아픈 엣날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끄집어내는가 하면 그 당시 상황이 오늘의 상황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다만 무대의 상황과 인물들이 달라졌을 뿐이다.

 시나리오를 다시 구성해 본다. 생산이 잘 되고 수출이 증가되어 국민 소득이 올라간다. 또 세계인의 꿈인 올림픽도 성공적으로 치뤘다. 단상(壇上)에서는 우리도 이제는 선진국이 될 수 있다라는 축사가 이어지고 있다. 단(壇)아랭에서는 여기저기서 샴페인 터트리는 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노사분규의 소리, 물가폭들의 소리, 부동산가격 폭등의 소리가 들린다. 장내(場內)는 순식간에 아비규환(阿鼻叫喚)으로 변한다. 축사는 끊어지고 단상은 텅비어 버린다. 누군가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외치고 있다.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나라에는 노사분규와 물가 폭등, 부동산 가격 폭등이 내습하고 있습니다. 지금 즉시 하시던 일을 중지하시고 대피하십시오. 이것은 실제상황입니다."

 그렇다. 이것이 가상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디나 할 것없이 혼란의 소리, 아픔의 소리 뿐이다. 사업장 마다의 분규의 함성이, 학교에 있어야 할 학생들이 화염병을 들고 길거리에서 경찰과 마주 서있는 것이, 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과소비와 사치풍조 등이 우리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다. 그런가하면 가난을 비난하여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사연이, 마음놓고 두 발 뻗고 쉴 방 한 칸 없는 사람들의 사연이, 점심을 굶는 국민학교 어린 아이들의 사연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누가 이 아픔들을 가시게 할 것인가. 정치가들, 사회지도자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 그토록 끔찍이도 국민들을 위한다던 사람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지금은 어른이 필요할 때다. 당당하게 앞에 나와 잘못된 점을 꾸짖고, 바로 갈 수 있도록 충고해줄 어른이 필요하다. 어쩌면 이러한 아픔보다 이 아픔을 가시게 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더 큰 아픔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몇몇 사람들의 잘못만도 아니고 또 그들만이 해결해야 할 일도 아니다. 우리 모두의 잘못이고, 우리 모두가 해결해야 할 일이다. 이제는 우리 불자들이 나서야 할 때다. 남의 일이라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방관만 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뜻을 받들고, 부처님의 뒤를 따르는 우리 불자들이 취할 행동이 아닌 것이다.

 고도의 산업성장으로 인한 가치관의 변화, 돈과 권세의 획득, 사회적인 성공 등의 물질적인 추구에다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현대 사회 풍조는 인간의 정신적인 가치를 소홀하게 다루고 있다. 대립과 투쟁,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상처투성이가 된 오늘의 사회는 불심으로 충만한 불자들의 손길이 필요하다.

 우리 불자 가운데에는 스스로 불자라고 하면서 또 불법으로 살고, 그로써 수행한다고 하면서도 나만 행복하고, 나만 출세하고, 나만 잘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수행하는 이들이 있다. 이것은 나는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나 혼자만이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지 않는가?

 나는 나, 너는 너라고 생각한다면 서로 양보하고 참는 일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따라서 우리의 기도수행도 나 혼자만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웃과 함께 하는 것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아직은 가진 자보다는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자가 많고, 생존경쟁에서 성공한 자보다는 좌절한 자가 많다. 성공과 승리의 그늘 속에서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음을 우리 불자들은 헤아릴 수 있어야 하고, 그들과 고통을 나누고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남을 돕고, 보시한다고 하면 돈이나 재물이 없어 보시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보시가 돈, 재물 등과 같은 물질적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슬픔에 빠져있는 사람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것도 보시요, 병들어 누워있는 사람의 쾌유를 비는 것도 보시다. 길 가다가 길바닥에 쓰레기 하나 줍는 것, 길을 묻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알려주는 것, 나쁜 짓을 못하게 꺠우쳐 주는 것도 모두 보시요, 불법의 실천이다.

 이러한 일이 우리 불자들이 해야할 일이다. 또 이렇게 할 때 부처님의 자비, 광명이 온 국토에 두루 퍼질 것이고 우리는 비로소 정토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에 정토를 이룩한다는 것은 모든 불자들의 꿈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불행으로 이어지고, 나의 출세가 다른 사람에게 좌절을 가져다 준다면 어찌 이를 정토라 할 수 있을 것인가? 너와 내가 함꼐 살아가는 사회, 더불어 숨쉬며, 나누는 사회가 바로 정토가 아니겠는가?

 정토는 저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현실 세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 불자들의 사명도 정토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부처님의 자비심을 일깨우고 지금까지의 그릇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온 잘못된 삶을 살 때 정토는 우리곁에 이룩될 것이다.

 우리 불자들은 지금 이 땡에 부처님이 오신다면 무엇을 하겠는가를 항상 생각하고 또 스스로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요즘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정토를 이룩하려는 우리 불자들의 노력이 돋보이는 때다. 모든 불자들의 숙원이었던 불교 방송국도 설립되었고, 지난번에는 세계 제1이라는 청동미륵대불도 조성되었다. 그리고 도심지 곳곳에 현대식 포교당이 많이 생겨 전법도 활발하게 하고 있고, 각 사찰에서도 여러가지 불사가 한창이다. 이 모두가 바람직스런 일이고 또 우리 불자들이 해야할 일이다.

 그러나··· 굳이 한마디를 더 하자면 우리 주변에는 부처님의 대자비심이 필요로 한 곳이 너무나 많다는 이야기고, 또 우리 불자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정말 그늘진 곳이 너무나 많다는 이야기다.

 우리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물어보자. 만약 오늘 이 땅에 부처님이 오신다면 제일 먼저 무슨 일을 하실까?  佛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