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선불교 100년 : 아, 1912년! 그리고 100년

특집 ● 선불교 100년, 침묵의 천둥소리 ● 선불교 100년을 돌아본다

2012-03-20     불광출판사

아, 1912년! 그리고 100년
근현대 불교에서 얻은 것과 잊은 것, 그리고 잃은 것


조선의 불교는 일제의 병탄에 밀려 바람에 몸이 쏠리듯이 꺼져갔다. 살아남으려는 온갖 방편이 와글거리는 속에서 선사들은 맹렬한 화두 참구를 통해 세상을 관통하는 가파른 길을 찾아나갔다. 버거운 날들이 쏟아지는 속에서 그들은 낮은 포복으로 근대를 타고 넘었다.




선불교 100년을 지켜온 선사들
조선의 근대는 가혹했다. 1912년 1월부터 조선의 표준시가 폐지되고 일본의 중앙표준시가 적용되었다. 총독부는 조선민력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민간에 배포했다. 식민지 백성들은 제국의 초침에 맞춰 일어나고 일했다. 전국에 걸쳐 토지조사사업도 실시되었다. 조선 땅은 국유화되는 절차를 거친 후에 일본인 회사와 지주들에게 헐값에 불하되었다.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먹을 게 없는 이들은 들짐승처럼 산에 올라 소나무 껍질을 벗겨 그 사이를 긁어냈다. 그런 다음에 집에 들고 와서는 솥에 삶아 두드려 부드럽게 목화같이 만들었다. 안 그러면 떫어서 먹질 못했다. 어린아이들은 흙을 먹었다.
 


일제는 한일병합 초기부터 조선말의 맞춤법 통일안을 주도면밀하게 진행해나갔다. 버젓이 제 나라 글자를 두고도 한자를 쓰며 중화의 변방에 있던 조선을 그들은 함부로 가엾어 했다. 1912년 4월에 총독부 학무국은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을 펴내어 말과 글조차 통치했다. 1912년에는 대한제국의 사법제
도도 지방법원-복심법원-고등법원의 3심제도로 바뀌었다. 명덕신벌明德愼罰을 지향했던 왕도정치는 신상필벌信賞必罰의 법치로 다급하게 바뀌었다. 사법기관의 구성과 법관 인사문제 등이 모두 총독의 재량에 맡겨져 사법권의 독립은 무시되었다. 이러한 가혹한 시대상황 속에서 1912년을 치열하게 살아낸 선사들, 바로 그들이 한국 근대불교의 1세대라고 할 수 있다. 경허, 백용성, 박한영, 만공, 한암, 만해 같은 이들이 많이 알려진 이들이다. 이들외에도 있다. 무형문화재 단청장으로 널리 알려져있는 석정 스님은 우리나라의 드러나지 않은 숨은 선지식으로 호남의 학명 선사와 영남의 혜봉 선사를 꼽았다.
백학명(白鶴鳴, 1867~1929) 스님은 출가한 지 25년째 되던 1912년에 월명암에서 공안집을 읽다가 문득 “만법과 더불어 짝을 짓지 않는 자, 그는 누구인가”라는 글귀에서 막혀 더 읽어 내지 못했다. 만법과 짝하는 것이 죄다 망념이라면 진심은 그 너머 어디엔가 있을 텐데, 진심을 진심이라 하면 그 또한 망념에 불과할 것이었다. 마음이 갈팡질팡할 때마다 그는 산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만해 스님이 변산반도의 월명암에 기거 중이던 학명 스님을 찾은 때는 1923년 봄이었다. 두 사람은 지옥 같은 세상에서 장대 위에 꼿꼿이 서서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는 심정을 토로했다. 만해 스님이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학명 스님은 하산했다. 그는 퇴락할 대로 퇴락해 있던 내장사內藏寺를 일으켰다.
 


선원을 새로 짓고 흩어져 있던 부도浮屠를 모아 부도전에 안치했다. 황무지를 개간해 전답 80두락을 일구었고 벼 40여 석을 수확할 만한 농토도 확보했다. 1912년에 출생한 이들은 한국 근대불교의 2세대에 해당되는 이들이다. 먼저 현대 불교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성철 스님이 바로 이 해에 태어났
다. 경허-혜월로 이어지는 법맥을 계승한 향곡 스님도 같은 해에 태어났다. 또 임제의 ‘참사람(眞人)’을 역설했던 백양사의 서옹 스님 역시 1912년생이다.
1912년생들은 광복과 6.25동란으로 이어지는 거친 세월을 살아냈다. 불교 내부적으로는 1950년대 중반부터 진행되어 6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이른바 불교정화운동을 온몸으로 겪어냈다.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명분은 이승만 정권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다급하여 강렬했고, 쓸어버려야 할 것과 남겨둬야 할 것을 가릴 틈도 없이 정화는 진행되었다. 그 결과 한국불교는 통합종단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불교의 근대화 과정에서 축적된 유산의 절반 이상이 묻혔다.
이승만 정권과 유신정권의 지원을 받은 무리한 정화는 이후 불교가 정치권에 끌려다니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런 형국은 군사정권 시절 내내 이어졌다. 1990년대 중반, 사회 전체의 민주화 바람에 힘입어 조계종단 내부에서도 자정과 쇄신의 기류가 형성되었고 그 결과 개혁종단이 출범했다. 하지만 개혁종단 역시 정치권에서 쉬 자유롭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르렀다.

 


자성과 쇄신은 사무침이 전제되어야 한다
현재 우리 불교계의 화두는 다시 자성과 쇄신이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공중파를 통해 불교계 내부의 문제점이 보도되는가 싶더니, 얼마 전 봉은사 문제가 부각되면서 조계종단과 정치권의 불미스러운 밀월관계가 폭로되었고, 정치권력에 대한 불교계의 이중적인 태도가 드러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조계종단에서는 2011년 6월에 종단차원에서 ‘자성과 쇄신의 5대 결사’를 전담할 결사추진본부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종교평화선언이라는 것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종교평화선언은 정작 불교계 내부에서 먼저 문제가 되고 있다. 처음엔 화쟁위원회와 일부 불교계 인사들의 의견차이인가 싶더니 곧 화쟁위원회와 종정스님 간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번졌다. 또 종정예경실의 음모론이 제기되는가 싶더니 급기야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의 기조에 맞춘 것이라 는 얘기까지도 들린다. 자성과 쇄신은 첫 단추부터 뭔가 잘못 꿰어지고 있다.
2044년에 이르면 조계종단의 신규출가자는 21명에 그칠 것이라는 충격적인 연구보고서가 발표되었다. 출가자 숫자가 그러할진대 불교신자는 늘어날까. 탄압은 종교를 사라지게 하지 못한다. 종교는 대개 자진自盡한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고,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하지 않
으면, 사람들은 더 이상 그 종교를 찾지 않게 되고 종교는 마침내 자진하고 만다. 만해는 일제강점기에 조선불교계의 개혁방향을 두고, 어쩔 수 없어서 고치는 것이 아니라 고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사무침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봤다. 이 사무침을 바탕으로 해서 안으로는 탄력적으로 계율과 청규를 정비해 나가고, 밖으로는 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면서 불교 본연의 가치를 추구해나가야 한다고 했다. 종교는 오직 백성들의 눈치만 봐야 한다는 것이 만해가 말한 ‘대중불교’의 의미이다.

길에서 길을 찾았던 심방尋訪
송만암(宋曼庵, 1876~1957) 스님은 대강백이면서 선농일치를 실천한 선승이었고 호남고불총림을 건립한 주역이었다. 정화 과정에서 비구와 대처 간의 갈등이 깊어졌을 때 그는 오늘날의 총무원장격인 교정敎正직에 있었다. 그는 승가체제를 교화승과 수행승으로 양분하는 점진적인 개혁을 제안했으나 끝내 받아 들여지지 않자 뒤돌아보지 않고 백양사로 내려갔다.
심방尋訪을 개신교의 전도방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 근대 불교계에서는 일반적인 일이었다. 이혜봉(李慧峰, 1874~1956) 스님은 본래 고종 시절에 정4품 관직에 있었으나, 일제의 강점 과정에서 피신하여 상주 남장사에서 출가했다. 전국비구니회 회장을 지낸 광우 스님이 그 분의 일점혈육이다. 해외 포교로 널리 알려진 숭산 스님이 그의 손제자이며 근대의 대표적 불교학자인 김동화 박사 또한 그의 제자이다. 또 관응 스님과 석정 스님 등도 그에게서 사사했다.
혜봉 스님이 쓴 일기 형식의『혜봉선사유집』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중에서 1930년 2월경에 있었던 일을 살펴보면, 심방이 근대의 선사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달 17일 아침에 남장사를 출발하여 읍내 포교당으로 내려온 그는 국수 한 그릇으로 허기를 때운 후에 구미 일대의 사찰과 신도의 집을 차례로 방문했다. 어떤 신도의 집을 정해 그 곳에 며칠씩 머물면서 근동의 신도들을 모아 다화茶話를 나누는 형식으로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심방을 마치고 남장사로 돌아온 날은 3월 2일 정오쯤이었다. 그 날 일기에는, “점심 후에 피곤을 견디지 못하고 방으로 돌아와 지쳐 누웠다가 문득 일어나 창을 여니 이미 서산이 붉었다”고 적혀있다. 이렇게 근대의 스님들은 보름 가까이 출타하여 꼬박 걸어 다니면서 신도들을 심방했다. 광복과 정화를 거치면서 불교계는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역사적 명분에 힘입어 이판승 중심으로 급속히 재편되었다. 스님들은 더 이상 심방하지 않았다.




장대 끝에서 기꺼이 한 발자국 내딛는 이 누구인가
선禪의 본령은 전위前衛이다. 익숙한 것에 대한,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한 전면적이고 지속적인 회의가 선의 본령이다. 말(言語)에 대한 무한 부정 속에서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지듯이, 선은 끝없는 자기반성과 부정 속에서 비로소 온전해진다. 그런데 전위에 서는 게 생각처럼 잘 안 된다. 왜 안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왜 두려울까.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혜종고(大慧宗􀒀, 1089~1163)라는 중국 송나라 때 선사가 있다. 선을 한 번쯤이라도 넘겨다 본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는 간화선의 주창자이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 “요즘 배우는 이들이 얻는 바가 없는 까닭은 병이 어디에 있기 때문인가. 바로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스스로 믿지 못하면 조급한 마음에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온갖 것에 끄달려 돌고 돌 뿐 제 안에서 비롯되지 못한다. 만약 네가 바깥에서 뭔가를 구하려는 마음을 그만 둘 수 있다면, 곧 조사나 부처와 다르지 않으리라.”
피신할 곳을 찾고 기댈 곳을 염두에 두는 전위는 이미 전위가 아니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가 선의 본령이다. 적어도 일제강점기의 선승들은 장대 끝에서 기꺼이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만해 스님과 가까웠던 이들은 그가 굶어 죽었다고 증언한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겉보리 한 줌 배급받을 수 없던 시절에, 그는 권력 눈치 보지 않고 굶어서 죽는 길을 택했다. 일제 강점기의 선사들은 선의 본령과 수행자의 길을 그렇게 지켜냈다.

박재현
불교철학자, 서울대학교대학원 철학박사.
현재 프레시안(
www.pressian.com) 인문학습원 선불교학교 교장. 박사학위 논문은「한국불교의 간화선 전통과 정통성 형성에관한 연구」이고, 저술로『한국 근대불교의 타자들』과 『깨달음의 신화』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