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문제 해결이 삼포를 막을 수 있다

사색의 뜰

2012-03-20     불광출판사

노동문제 해결이 삼포를 막을 수 있다
삼포(연애, 결혼, 출산 포기) 세대의 희망 찾기


오래 전, 민예총에서 주관한 진보아카데미 강의에서 참석자들을 소개하는 시간에 한 청년이 “대학 학생회에서 활동합니다. 한총련 소속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강의가 끝난 뒤, 그 청년이 버스정류장까지 나를 배웅했다.
나란히 함께 밤길을 걷다가 무심코 물었다. “어느 학교 다니세요?” 내 물음에 그 청년이 답했다. “학벌 없는 사회를 지향하기 때문에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학벌 없는 사회’라는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물어본 사람이 얼마나 부끄럽던지…. 그날 밤 집에 돌아와 나는 인터넷 홈페이지 게시판에 있는 내 ‘별 볼일 없는’ 학력들을 찾아서 지웠다.

1인자가 되지 않고도 행복한 인생을 사는 사회
수능시험 보는 날, 시험장 앞 광경이 뉴스 화면마다 나오고, 시시각각 교통상황을 안내하고, 날씨예보까지 시험과목 시간대별로 설명해주는 등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수능시험에 집중돼있을 때, 한 편에는 ‘대학 입시 거부 선언’ 기자회견을 한 당돌한 청소년들이 있었다. ‘대학입시 거부로 세상을 바꾸는 투명가방끈들의 모임’이 그들이다. 그들은 “대학입시 경쟁은 남의 꿈을 밟고 올라가는 전쟁이라는 것을, 우리의 삶에 가격을 매기는 상품화의 과정이라는 것을, 이 경쟁에 미친 입시위주 교육과 불안정한 모두의 삶을 무시한 채 폭주하는 사회에 제동을 걸기 위해 우리는 대학입시라는 단단한 제도에 시비를 건다.”고 주장했다. “그저 대학을 안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입시가, 대학이, 교육이, 그리고 사회가 잘못되었음을 온몸으로 외치는 것”이라고 했다.
‘학벌 없는 사회’나 ‘대학입시 거부 선언’운동이 결실을 거두려면 대학졸업장이 없어도 행복한 삶이 충분히 가능해야만 한다. 실제로 그러한 사회가 있을
까? 있다. 네덜란드 중학생에게 장래 희망이 뭐냐고 물었을 때 ‘벽돌공’이라 답했다는 기사가 기억난다. “벽돌공이 되면 하루종일 음악을 들으면서 일할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중학생의 꿈이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이유는 벽돌공의 임금이 대학교수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노동기본권이 제대로 보장돼 저임금이 해소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도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스포츠 스타나 아이돌 가수들처럼 그 분야에서 1인자가 돼야 한다. 그러나 북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는 경쟁에서 승리해 1인자가 되지 않고도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정부나 지방 자치단체가 설치한 수많은 체육시설에서 평생 동안 아이들이나 노인들에게 운동을 가르치며 사는데, 그 수입이 대학교수와 큰 차이가 없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직종이나 기업 규모 간 임금 차별이 해소되면 학문에 뜻이 없으면서도 단지 취업하기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머리 싸매고 대학에 가는 일이 사라진다. 공부가 적성에 맞고 학문에 뜻이 있는 사람만 수능시험을 보거나 대학에 진학하면 된다. 그렇게 공부하는 나라 대학생들의 학력 수준이 우리보다 훨씬 높다. 북유럽 나라들에서는 대학뿐 아니라 대학원 등록금까지 전액 정부가 지원하는데도 대학 진학률이 우리 사회보다 훨씬 낮다. 굳이 학문에 뜻이 없는 사람들은 대학에 가지 않고 직업을 선택해도 충분히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나라들이 있지 않은가?
비정규직 차별을 철폐하고, 저임금을 해소하고, 적정한 최저임금을 보장해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는 노동운동이 결국 교육문제도 해결한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들 중에서 저임금 노동자 비율은 높은 반면 사회복지 수준은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최저생계비 이하의 소득을 버는 빈곤층 비율이 북유럽 나라들의두배에이른다. 경제협력개발기구 2010년 통계연보에 따르면 한국은 30개국 중 빈곤율은 여섯 번째로 높았고, 사회복지지출은 최하위 멕시코에 이어 두번째로낮았다. 남성 자살율 2위, 여성 자살율 1위, 평균 자살율 1위를 기록했다.

노벨 경제학상을 통해본 청년실업문제의 해결 방안
2010 노벨 경제학상은 최초로 노동경제학 분야의 학자들에게 수여됐다. 다이아몬드, 모텐슨, 피사리데스 등 세 학자가 정부의 경제정책과 일자리의 관계를 규명한 공로를 인정받아 수상했다. 이들 이론을 간단히 요약하면 “일자리와 실업자등 노동시장 문제는 개인의 능력이나 시장 기능에 맡겨서 풀 수는 없고 정부의 적극적 정책이 개입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 주장을 데이터로 입증했다. 한마디로, 실업 문제는 취업하지 못하는 개인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절대로 해결될 수 없고 정부의 강력한 정책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은 청년실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청년들의 ‘눈높이’를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지적한다. 청년들이 너무 눈이 높아 수도권 대기업에만 취업하려고 하기 때문에 청년실업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학자들의 주장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이다. 청년들이 취업하고 싶어 하는 양질의 일자리들을 많이 만들어낼 수 있는 정부의 강력한 정책 의지가 없다면 청년실업의 해결은 요원한 꿈이 될 수밖에 없다. “단군이래 최고의 스펙”을 갖춘 한국 청년들의 실업이 어떻게 그들 탓이겠는가?
이명박 정부뿐 아니라 역대 정부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자리 창출을 강조했다. 공공 부문 사회적 일자리 확대, 한국판 평화봉사단 파견, 직장 체험 기회를 제공하는 각종 인턴제도 등이 추진됐지만 이러한 정책들은 모두 단기 대책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들이어서 단순 아르바이트만 양산하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정책 변화와 대중의 참여가 필요한 때
무엇보다 먼저, 정부와 기업의 경제운용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 ‘괜찮은 일자리(decent work)’가 크게 줄어든 것은 정부와 기업이 추진하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정책과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의 필연적 결과다. 기업의 경영 상황 개선을 이유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빈발해 일자리가 줄어들었고 특히 청년들이 선호하는 정규직 일자리가 크게 줄었다. 정부와 기업은 가능한 한 고용을 유지하며 기업 경영실태를 개선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최근 쌍용차나 한진중공업 사건에서 보듯 고용을 유지하면서 경영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합리적 방안들이 충분히 있음에도 더 큰 비용을 지불해가며 노동운동 세력과 기 싸움을 하듯 정리해고를 강행하는 구조조정 방식에 근본적인 수정을 가할 필요가 있다. 학계나 정부의 정책 담당자들은 오래전부터 이야기돼온 ‘성장지속형 분배정책’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 다음으로는, 노동시간 단축이 일자리 나누기로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지나친’ 고임금을 문제시하는 시각들을 흔히 볼 수있다. 만에 하나 그것이 고임금이라 해도, 잔업,철야,휴일특근 등의 초과 노동을하면서 받는 대기업 노동자의 고임금을 규탄할 것이 아니라 장시간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교대제를 개편해 신규 인력을 채용하는 방향으로 기업들의 인력 운용 방식이 변화돼야 한다.
청년들 또한 청년실업이 사회의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스스로 나설 필요가 있다. 청년 실업자들뿐 아니라 대학생을 포함한 청년계층 전체와 청년들의 부모인 시민들까지 참여하는 대중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필요가 있고 그 중심에 청년들이 주체로 우뚝 서야 한다. 개인의 초인적 노력으로 경쟁에서 승리한 소수가 실업의 장벽을 뚫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청년실업 문제의 해결 방안이 될 수는 없다. 최근 많이 활발해진 청년 단체들의 활동에 주목하고 그 문지방을 넘어 직접 참여해보는 것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발전을 기하는 현명한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종강
성공회대학교 노동대학 학장. 20여 년 동안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을 역임했다. 1994년 제6회 ‘전태일문학상’을받았고,『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