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은 향기로 말한다

법인 스님의 병 주고 약 주기

2012-03-20     불광출판사



수행은 향기로 말한다

내 머릿속 기억의 호수에는 몇 해 전 잔잔한 풍경 하나가 심어져 있습니다.
오래된 몇 그루 정갈한 청매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꽃잎들의 향기가 코끝을 찌르는 산중 봄날의 어느 오후, 산승 몇이서 연둣빛 녹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수행의 힘, 깊은 사유와 따뜻한 자비심
시나브로 한가로움과 정감이 무르익을 무렵, 돌연 산사의 고요를 깨는 큰소리가 담장 밖에서 들려왔습니다. 귀를 기울인즉, 어느 문화답사모임의 안내자가 생소리로 말해도 될 것을 요란한 확성기로 탑비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이 생뚱맞은 불협화음이 마음에 저어되는 것은 자명한 상황. 평소 직선적 성격을 가진 한 스님이 문을 열고 그들에게 다가갔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약간의 긴장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습니다. 필시 봄날 산중의 평화로움을 앗아간 그들에게 불호령의 징벌이 내려질 터.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귀에 거슬리는 확성기소리는 계속 이어지고, 스님의 불호령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예상과는 다른 상황의 전개로, 모두들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찻잔을 놓고 밖의 동향을 주시하였습니다.
안내자의 설명이 한 단락 끝나고 잠시 틈이 나자, 마침내그스님의목소리가들려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이 절 참 좋지요? 어디서 오셨습니까?” 이어 조금 어색하고 굳은 듯 한 대답이 들렸습니다. “네, 00대학 사회교육원 문화답사모임에서 왔습니다.” “네, 아주 잘 오셨습니다. 안에서 잠시 들었는데요, 탑비 설명을 참 잘 하시네요. 이 절에 사는 저도 모르는 사실도 알고 계시네요. 내용도 알기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시네요.” “고맙습니다. 스님, 과찬이십니다.” “해박하고 목소리도 참 좋으시구요. 그런데 원음으로 말씀하시면 그 좋은 목소리가 더욱 살아날것 같습니다.” “아이구! 스님, 미처 몰랐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하신 것이겠지요, 혹 점심 공양을 하지 않으셨으면 공양하시고 가십시오.” “네, 저희는 점심 먹었습니다. 다
음에 시간 내어 스님과 차 마시고 좋은 말씀도 듣겠습니다.”
그날 매화나무 아래 20여 명의 얼굴은 환한 미소로 꽃피웠고, 은은한 매화향기를 그들 마음속 가득 담아갔습니다. 나는 그때 분명하게 알아차렸습니다. 수행의 힘은 이렇게 깊은 사유와 따뜻한 자비심으로 오는 것임을. 극락과 지옥은 바로 그 자리에서 나누어지는 것임을.

수행한 자여, 그대의 삶은 어떻게 달라져 있는가
자본과 욕망이 무한 질주로 치달으며 그것의 무한충족이 삶 전체가 되어버린 세상. 욕망의 충족에서 만족과 여유를 얻지 못하고, 허물어진 경계선에서 오히려 결핍과 불안에 시달리는 세상. 그래서 사람들은 길을 찾습니다. 잃어버린 ‘참나’를 회복하기 위해 종교의 문을 두드리고 수행을 합니다. 모든 종교에서는 명상을 통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알려주고 영성을 강화한다고 한껏 목소리를 높입니다. 서점가는 온통 명상과 심리치료에 대한 책들로 넘칩니다. 몸과 정신을 집중하고 향상시키는 요가의 열풍도 만만찮습니다. 기도와 전도를 대세로 하는 서양종교까지도 영성과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힘
들고 삭막한 세상에 분명 대안과 희망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종교에 몸담고 있는 수행자와 재가신도들의 수행현장과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염려와 안타까움이 생깁니다. 왜냐면, 그 간절한 열정과 정진에도 불구하고, 옆에서 함께 부대끼다보면 왜 수행을 하는지에 대한 설득력을 찾는 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아내며 참선하고 염불하고 기도하는 데도 좀처럼 수행의 향기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아니 종교나 특별한 수행이 없이도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훨씬 아집과 독선, 허세와 탐욕이 많은 사람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툭 터놓고, 단도직입으로, 단순하고 정직하게 물어봅시다. 당신은 왜 수행하고자 하는가요? 당신은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가요? 당신은 수행을 어디서 하고 있는가요? 그리고 수행한 당신의 삶은 어떻게 달라져 있는가요?
우리는 수행하기 전에 이러한 물음을 진지하게 내 자신에게 던져보았는가요? 그리고 답을 마련하고 수행하고 있는가요? 자칫 삶이 괴롭고 혼란스러워, 아니면 범속한 삶이 무의미하여 깨달음에만 매달려 무작정 수행에 전념하고 있는지 않는가요? 수행의 개념을 바르게 세우고 난 다음에 정진하고 있
는지를 점검해볼 일입니다.

어느 불자의 하소연
얼마 전 어느 불자 한 분이 내게 한탄과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그 분은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주지스님의 요청으로 자원봉사를 하였습니다. 마침 주지스님은 장기간 출타하시고 사중의 몇몇 스님과 직원들이 절을 지키며 템플스테이에 온 분들을 정성껏 맞이했습니다. 그때 그 절에는 20년 동안 하안거와 동안거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참선 정진한 스님 한 분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늘 진지하고 근엄한 얼굴, 신중한 거동, 과묵한 언행, 공양 시간 외에는 방에서 하루 종일 면벽참선하는 모습에 저절로 존경심과 환희심이 샘솟았다고 합니다. 수행자의 참모습을 새삼 실감했다고 합니다.
그런 즈음 그 지역에 폭풍과 장마가 들이닥쳤습니다. 뒷산 숲이 통째로 흔들리고 기왓장이 날아가고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급기야 정전까지 되었습니다. 워낙 심한 태풍인지라 좀처럼 전기는 복구가 되지 않았습니다. 전기가 공급되지 않으니 촛불을 켜고 생활했고, 난방은 물론이고 수세식 화장실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사중의 모든 스님과 직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복구 작업에 매진하였습니다.
20년 안거한 스님은 이런 혼란의 와중에도 방안에서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대중들은 다소 의아했지만 참선수행에만 몰입하는 스님이라서 애써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그 스님은 갑자기 절의 사무장에게 인근의 다른 절로 자기를 데려달라고 했답니다. 이유인즉, 어둡고 답답하며 화장실도 불편하고 따뜻한 물로 씻을 수도 없어 참을 수가 없고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답니다. 사무장이 지금은 밤도 깊었고 절 복구를 해야 하니 내일 모셔다 드리겠다고 하자, 그 스님은 엄청나게 화를 내면서 당장 인근의 큰절로 가자고 했답니다.
그 신심 깊은 불자는 내게 말합니다. “스님,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수행이 무엇인지, 수행은 왜 하는지….”

지금 여기서 늘 깨어있는 온전한 삶!
수행은 곧 내 삶의 참된 변화와 완전한 내적 혁명입니다. 수행은 언젠가의 지향점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실현해야 할 삶 그 자체입니다. 거짓에서 진실로,
탐욕에서 비움으로, 분노에서 자애로, 차별에서 평등으로, 불안에서 평안으로, 사견에서 정견으로, 늘 지금 이 자리에서 개선되고 탈바꿈하는 우리 삶의
모든 것입니다. 중생에서 부처의 삶을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곧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삶을 이루어내는 모든 실천, 곧 생각과 움직임이 수행입니다. 오랜 세월 무수한 시간을 참선하고 경전을 능숙하게 외우고, 3,000배도 1,000일 동안 한다고 합시다. 그럼에도 당신이 헛된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당신의 생각과 언행이 자비롭고 정의롭지 못하다면, 그런 수행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설령 당신이 부딪치며 살아가는 일상의 현장에서 늘 바른 안목을 가지고 생각과 언행이 청정하고 고결하며, 어떠한 시련과 장애에도 평정과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참선하고 염불하고 경전을 읽지 않는다고 해도 무슨 허물이 있겠습니까?
1980년대 18년 동안 중국의 수용소에서 갇혀 있다가 탈출한 남겔 사원 출신의 평범한 어느 스님은, 수용소에 있을 때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었느냐고 묻
는 달라이라마의 물음에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자칫하면 그들을 미워할 뻔 했습니다. 그들에 대한 자비심을 잃지 않으려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이고 수행의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세상을 벗어난 한적한 깊은 산중에서 번거로운 일 싫어하고 그저 고요히 내면을 관조하는 그 자체가 수행의 목적이 될 수는 없을 겁니다.
‘탐욕과 성냄과 자만과 위선이 떨어져 나간 사람, 거칠거나 속되지 않고 분명하게 진실을 말하고, 말로서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사람, 바라는 것 없고 기대도 없고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는 사람, 아무런 집착도 없고 의혹이 없어 집착과 근심을 초월해 더러움이 없이 맑은 사람, 자비로운 생활을 하고 부처의 가르침을 행하는 사람이 진정한 수행자’라고『법구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올해 교수들이 꼽은 사자성어는‘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고 합니다. 수행은 어떤 특정 수행법 그 자체가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수행을 통해서 현재의 나를 점검하고 성찰하여 변화와 성숙을 이루어내는 일에 있는 것입니다. 어둠과 밝음이 별개의 두 모습이 아니듯 삿됨을 즉시 부수는 일이 진실을 드러내는 일이고, 진실을 드러내는 일이 곧 삿됨을 부수는 일입니다. 수행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참나’를 찾고자 합니까?
지금 여기서 늘 깨어있는 그대의 온전한 삶! 그것이 ‘참나’가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