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품에는 특허가 없다

명장의 고집불통佛通

2012-02-23     불광출판사

예술품에는 특허가 없다
대한민국 명장(02-22호) 세창도예 김세용

누구에게나 시련은 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단 한 번 찾아온 역경에 부딪혀 인생을 포기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천 번의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도 한다. 전구를 발명하는 실험에 실패를 거듭하던 에디슨은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단지 불이 켜지지 않는 천 가지 방법을 알아냈을 뿐이다.”라고 했다. 청자를 만드는 도예가로는 유일하게 대한민국 명장에 오른 김세용(67) 선생도 단호하게 말한다. “실패를 극복하지 못하면 절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아내와 불교가 있었기에...
김세용 선생은 양짓녘에 드는 겨울 햇볕처럼 따뜻하고 편안했다. 부드러운 말투와 넉넉한 웃음에 자애로움이 배어나온다. 도자기 만드는 일을 평생의 수행 과정으로 삼았기 때문이리라. 고등학생 시절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가 순간적으로 도자기에 매료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도자기를 만들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막연하게 다가온 생각은 군 제대 후, 1971년 경기도 이천의 한 요장에 취업하면서 실현되었다. 도자기와는 천생연분 찰떡궁합이었다.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호롱불 밑에서 동이 틀 때까지 물레를 돌리고 문양을 새겨나갔다. 피곤한 줄도 몰랐다. 기술은 일취월장했고 실력을 인정받아 단기간에 조각실장을 맡게 되었다. 그곳에서 지금의 부인 이순이(57) 씨를 만나, 1973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리고 5년 후 독립하여, 자신의 이름과 아들의 이름(김창묵) 가운데 자를 따서 세창도예라는 이름으로 창업하였다. 아들이 대를 이어 도예의 길을 걷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탄탄대로를 걷던 그에게 뜻밖의 시련이 찾아왔다. 1982년 무렵부터 2년간 단 한 개의 작품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더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한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그동안 작품이 잘 나와, 도자기를 우습게 본 오만함도 한몫했다. 재료와 방법을 바꿔가면서 수없이 많은 밤을 새워가며 시행착오를 겪었다. 나중에는 돌아가려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절망적인 시기였다. 그 시기를 견딜 수 있었던 건 아내의 공이 컸고, 헤어날 수 있었던 건 불교를 만나면서부터다.



“신경은 매우 날카로워지고 재정은 바닥이 났죠. 생활비와 재료비를 구하기 위해 아내가 사방팔방 돈을 구하러 다니면서 뒷바라지를 했어요. 좀 별종이지요. 바가지 긁거나 보따리 싸서 도망갈 법도한데, 오히려 끼니 때마다 정성껏 식사 준비를 해주는 거예요. 만드는 사람의 성품과 에너지가 고스란히 도자기에 표현되니, 제가 행복해져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겁니다. 아내 덕분에 힘을 얻어, 보이지 않는 벽을 끊임없이 연구하다 보니 결국 불교에 이르게 됐어요. 고려시대의 국교는 불교이니 고려 도공들은 불심이 돈독했을 것이다, 여기에 생각이 미친 것이죠. 신기하게도 불교 공부를 시작하며 모든 문제가 자연스럽게 술술 풀려나갔습니다.”

전통방식을 뒤집는 실험과 도전
부부는 함께 불교 공부에 매진했다. 가까운 절에 가서 법문을 듣고 기도를 하며 경전을 읽었다. 마음 공부하는 좋은 도반들이 생기고 신심이 증장되니 마음도 한결 여유로워졌다. 오만함과 욕심도 스르르 녹기 시작해, 보이지 않던 벽도 차츰 허물어져 갔다. 가마에서도 점점 원하던 청자의 색이 나오기 시작했다.



“몇 개월 만에 기적 같은 엄청난 변화가 온 겁니다. 지금도 부처님의 큰 가피를 입었다고 생각해요. 그때부터 네 가지 서원을 세우고 청자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첫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자, 둘째 섬세하고 정교한 청자, 셋째 가장 큰 청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마지막 넷째는 이 모든 과정을 수행으로 삼아 정진하겠다는 서원이에요. 백자나 분청도 각각의 독특한 매력이 있지만 제 성품엔 청자가 잘 어울렸어요. 세련되고 날렵하면서도 고고한 자태에 빠져들게 된 거죠.”
그는 네 가지 서원을 이루기 위해 남들과는 다른 선택을 했다. 전통방식을 뒤집는 실험과 도전의 반복이었다. 부단한 노력과 열정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고려청자를 계승 발전시키는 창조적인 기법들이 하나둘 개발되고 그의 서원도 빠짐없이 성취된다. 최초로 전통 흙가마를 내화벽돌 가마로 바꿨으며, 티하나 없는 흙을 만들어 흙 수비 공정을 개선하고, 정교한 이중투각기법을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켰다. 이러한 성과는 청자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으며, 그를 청자 도공 1인자로 우뚝 서게 하여 2002년 대한민국 명장에 선정되었다.



10전 11기의 장인정신
예술혼을 불태우는 그의 장인정신은 이미 정평이 나있다. 그는 제작기간이 오래 걸리고, 실패 확률이 높은 이중투각기법을 고집한다. 뿐만 아니라 금강산 부근이 고향인 아버지를 위해, 일만 이천 봉을 조각한 대작 금강산 매병을 10년에 걸쳐 만들어냈다. 높이 1미터의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청자다.
7전 8기의 한계를 넘어 10전 11기로 일궈낸 결과물이다. 작품 완성까지 1년의 시간이 걸리는데, 10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11번째 성공해냈다. 그의 작업은 고도의 집중력과 정성, 인내를 필요로 한다. 자신이 세운 서원은 꼭 이루려는 확고한 의지를 바탕으로, 작업 과정을 수행으로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일들이다. 그는 25년이 넘는 세월동안 매일『반야심경』을 사경하고, 집에 조성한 법당에서 아침저녁 예불과 경전 읽기를 빼먹은 적이 없다. 한결같은 고요한 평정심은 그냥 유지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청자 만드는 비법을 전수받은 것이 없다. 지나고 보니 철저한 자기와의 싸움이었다. 그 길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고 외로운 길이었는지 알기에, 후배 도공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경험과 기술 노하우를 이미 2001년 세계도자기프레엑스포에서 아낌없이 공개했다.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공개 이유에 대한 그의답변이 긴 여운을 남긴다.
“도자기는 공산품이 아닌 예술품이고, 예술품에는 특허가 없어요. 제가 터득한 기술을 기반으로 청자의 아름다움을 전승하고, 저를 뛰어넘어 발전시켜나간다면 매우 기쁜 일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근시안적으로 눈앞의 편함과 현실적인 이익만 좇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어떤 일이 자신에게 맞는지 잘 살펴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필요해요. 제 생각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기계문명이 더욱 발달될수록 손으로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시대가 올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은 자부심도 높고 정년이 따로 없어요.”
글. 양동민 사진. 김남용, 세창도예연구소 제공(작품)



세창도예연구소 | 경기 이천시 신둔면 수하리 214-3
Tel. 031)632-7711,
www.scceladon.co.kr

김세용 | 1971년 도자기 공예에 입문한 뒤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평생 도자기를 만들어오고 있다. 1981년 전승공예전 입선을 시작으로, 1997 도자기공모전 금상 수상까지 다양한 수상경력이 있다. 이중투각기법의 대가로 각종 공정 개선을 비롯한 청자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대한민국 명장 선정(02-22호)에 선정되었으며, 일본, 중국, 스위스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초대전을 가졌다. 그의 작품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청와대를 비롯해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달라이 라마 왕궁, 이탈리아 국립동양박물관, 스위스 박물관 등에 소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