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땀 한 땀 반복되는 단순함의 극치

명장의 고집불통佛通

2012-02-01     불광출판사

중요무형문화재 제107호 누비장 김해자

자기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보면, 간혹 수면 시간만으로도 탄복할 때가 있다. 어느 특급요리사는 하루 2시간 자며 요리 연구에 매진하고, 어느 스님은 경전 번역의 원력을 세우고 하루 한두 시간만 자며 정진한다. 나폴레옹, 에디슨,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 빌 게이츠의 공통점도 잠이 없다는 것이다. 체질상 4시간 이하로 자도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는, 일명 ‘쇼트 슬리퍼short sleeper’다. 이들은 대개 자기 일에 열정적이며, 역경에 부딪혀서도 긍정적인 자세로 이를 타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우리나라 유일무이의 누비장 김해자(60세, 중요무형문화재 제 107호) 선생도 쇼트 슬리퍼다. 하루 서너 시간만 자며 바느질에 몰두해온 세월이 40년이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누비에 미쳐 짐승(소)처럼 일만 하며 살아온 삶”이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의 정신을 온몸으로 밀어붙인, 여장부 김해자 선생을 만나기 위해 천년고도 경주로 향했다.

끊임없이 비우고 내려놓는 수행의 과정
김해자 선생은 뾰족한 바늘처럼 꼿꼿했다. 앉은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고, 말은 빠르고 가식 없이 직설적이다. 고요한 눈빛에선 인고의 세월을 견뎌온 강인함이 배어나온다. 이야기가 무르익자 실타래가 풀리듯 부드러운 미소 속에 따뜻함이 전해진다. 바느질은 일상생활이자 생계수단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삯바느질을 하던 어머니를 돕기 위해 바늘을 들었다. 20대에는 바느질에서 벗어나고자 전국을 방랑하기도 했다. 당시 걸핏하면 가위에 눌렸는데 그때마다 비몽사몽간에 저절로 ‘관세음보살’ 염불이 돌아가곤 했다. 불교와의 인연이 전생의 숙연임을 깨닫게 되는 체험이었다. 이후 불교 공부를 위해 통도사 극락암에 갔다가 1년간 경봉 스님을 시봉하기도 하고, 수덕사 견성암에 머물며 정진하기도 했다. 마음의 안정을 찾고 다시 한복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각양각색의 요구와 취향에 맞춰 사는 삶에 지쳐갔다. 무엇보다 양장으로 빠르게 바뀌어가는 복식문화 속에서 비전을 찾을 수 없었다. “누비를 처음 하게 된 건 순전히 영리 목적이었어요. 밍크코트가 유행하는 걸 보며 누비로 코트를 디자인해서 만들면 성공할 거 같았거든요. 그런데 누비를 막상 해보니까, 이게 너무 좋은 거예요. 한 땀 한 땀 반복되는 단순함의 극치 속에서 분주하기만했던 나를 발견하고 온전히 쉬게 할 수 있었지요.”
그녀는 절을 할 때도 엎어지다시피 할 정도로 성미가 급했다. 그런데 누비옷 한 벌을 짓기 위해서는 하루 15시간씩 꼬박 집중하더라도 한 달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인내와 정성이 없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작업이다. 누비 바느질은 철저히 자기와의 싸움이었다. 쓸데없는 망상, 청하지도 않은 생각들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비우고 내려놓는 수행의 과정이었다.


누비 회장저고리. 분홍색 길에 깃과 곁마기는 하늘색, 끝동은 흰색을 댔다.
목판 당코깃에, 겨드랑이 부분은 작은 삼각무를 달았다.
길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문단으로 솜을 두고 누볐다.


손누비로 지은 승복. 누비의 전통 바느질 기법은 승복으로 명맥이 이어져 오늘날까지 유지될 수 있었다. 김해자 선생은 “사찰에서 누비 바느질을 활용함으로써 현대인의 불안정한 정서를 편안하게 하고 자기를 발견할 수 있는 힘을 얻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냥 단지 할 뿐
누비를 배우는 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재봉틀의 등장과 함께 손누비는 서서히 자취를 감춰 승복에만 간신히 명맥이 유지되고 있었다. 수소문 끝에 고종황제 침방 나인 출신의 선복 스님에게 누비를 전수받은 제자를 찾아가 6개월간 기초를 배웠다. 이후 박물관 유물을 스승 삼아 자료를 연구해가며 스스로 기술을 터득해 나갔다. 누비에 빠져든 순간부터 은근과 끈기의 세월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고 다스리며 드디어 누비의 전통을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1992년 전승공예대전에서 바늘 땀 간격이 0.3㎝인 잔누비를 선보여 국무총리상을 수상한다. 이어 4년 후인 1996년 40대의 최연소 인간문화재, 최초의 누비장으로 지정된다. 그녀는 누비의 세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이지만 겸손함을 잃지 않는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떠받들어주는데, 모두 과대포장이에요. 이 분야에서 좀솜씨가 좋다 뿐이지 작품이랄 것도 없어요. 당장 현실적으로 일 안 하면 먹고 살 수 없으니 그냥 단지 할 뿐인 거죠. 고독이나 외로움을 생각할 겨를도, 궁상이나 청승 떨 여유도 없어요. 코앞에 할 일이 태산인데 모두 한가한 소리죠.”


누비
누비는 두 겹의 옷감을 포개놓고, 줄지어 규칙적으로 반복해서 손으로 한 땀 한 땀 누벼 옷을 짓는 우리나라의 전통 재봉 방법이다. 옷감의 겉감과 안감 사이에 솜을 넣은 누비옷은 겨울철 방한복으로 입었다.
누비 간격이나 바느질 땀수에 따라 세누비(0.3㎝), 잔누비(0.5㎝), 중누비(1㎝ 이상) 등으로 나뉘며, 형태에 따라 오목누비, 볼록누비, 납작누비로 구분된다. 한편‘누비’라는 말은 승복인 ‘납의(衲衣: 낡은 헝겊을 모아 기운 옷)’에서 비롯된 말이다. 납의가‘나비’로 소리 나다가, 다시‘누비’로 정착되었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그녀는 누비를 복원하고 알리고 가르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낮에는 천연염색 가공기술 연구와 제자를 기르는 데 할애하고, 밤에는 오로지 바느질과 하나 되는 시간이었다. 바느질에 몰입하다 보면 가속이 붙고, 어느덧 삼매의 경지에 이르러 시간의 흐름을 잊게 된다. 아무리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과부하가 걸리지 않을 수 없다. 결국 10여 년 전 몸의 오른쪽에 심각한 마비 증세가 왔다. 수술을 받을 경우 영영 손에서 바늘을 놓게 될 수도 있어 꾸준한 운동과 물리치료를 통해 서서히 몸을 회복시켜 나갔다.
불편한 몸도 누비에 대한 열정을 누를 순 없었다. 그동안 3,000여 명의 후진을 지도했으며, 일본, 중국, 프랑스, 미국 등 해외 전시회를 통해 누비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는 동시에 극찬을 이끌어냈다.
누비에는 기교가 없다. 오로지 비우고 비워낸 마음의 끝자락을 손끝으로 옮길 뿐이다. 다만 그 마음이 바르게 전해질 때 손끝도 고르게 움직인다. 고도의 정신집중과 지극한 정성이 어우러져 절제와 기품이 살아있는 정교한 명품을 탄생시킨다. 그래서 누비는 쉽게 좌절하고 쉽게 얻으려는 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누비장 김해자 선생이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는 삶의 해법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진 않지만 지금에서야 참행복이 무엇인지 알겠어요. 모든 게 비워지니 일의 능률도 한창 때보다 낫습니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唯嫌揀擇: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다)’처럼, 무슨 일이든 싫고 좋음을 떠나 꾸준히 하면 지혜가 툭 터져 나와요.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 단순함으로 들어가면, 그곳에 행복의 문으로 들어가는 열쇠가 놓여 있습니다.”

누비장 김해자 경주 공방 | 경북 경주시 탑동 637-1
Tel. 054)775-2631,
www.nubi107.com

김해자
1953년 경북 김천 출생. 40여 년간 한국 전통 복식과 손누비를 연구하며 전통 천연 염색을 이용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1992년 한국전승공예대전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했고, 1996년 누비의 전통성과 독창성이 인정되어 최초의 누비장(중요무형문화재 제107호)으로 지정되었다. 일본 NHK 초대전, 북경 한국문화원 초대전, 파리 프레타포르테 전시회, 뉴욕 코리아소사이어티 초청전 등 다수의 작품전을 개최했다. 2000년 경주에 터를 잡고 전수자들을 교육하는 한편, 정기적인 전시 활동을 통해 누비의 원형 보존과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