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재난이 된 시대에 한국의 불교에 기대하는 것

사색의 뜰

2012-02-01     불광출판사

지금 한국 사회는 어디에 시선을 돌려도 고통스런 모습들로 가득하다. 이명박 대통령은 노동하는 자, 아니 노동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를 착취해 10%, 아니 1%의 부를 증가시키고, 몰락해가는 토건사업에 기름을 붓기 위해 전국토를 공사판으로 만들었다. 생활보호대상자나 장애인에게 들어가던 예산을 돌려 대대적으로 땅을 갈아엎고 강을 개조하는 사람들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자연의 이름으로 반대하는 자들과 싸우기 위해 돈을 뿌려 찬성하는 자들을 만들고, 사업의 타당성에 대한 논란을 사적인 이익집단 간의 대결로 바꾸어버렸다. 인간들 간의 이해다툼 속에서 산이나 강 속에 사는 숱한 중생들의 생명은 아예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기지를 만들려는 ‘공권력’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오래된 삶의 현장과 함께 해온 거대한 바위마저 깨부수는 폭력을 쑤셔 넣었고, 그에 대한 항의와 저항을 또 다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주민들 간의 적대적 대결과 바꾸어버렸다. 고위공직자를 필두로 모든 임명직 관료들의 임용에서 불법과 비리를 으레 당연한 ‘스펙’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자기 가족의 사적 이익을 위해 멀쩡한 공기업을 팔아넘기고, 심지어 대통령이 되어서까지 부동산투기의 습관을 버리지 못해 수십억 원의 국가예산을 전용하여 투기적 잠재력을 가진 사저를 사들이기까지 했다. 덕분에 모든 공직자들은 이제 어떤 대의명분이나 그럴듯한 치장의 번거로움마저 접어둔 채 마음 놓고 자신의 사적 이득을 위해 노골적으로 권력을 사용하는 자유를 얻게 된 듯하다. 이로써 이명박 대통령은 하나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선을 가장하는 최소한의 ‘예의’마저 사라진 ‘뻔뻔스러움의 시대’를.

재난이 되어 버린 정치
원래 보수적인 의미에서조차 ‘정치’, 아니 정확하게 말해 ‘통치’는 사람이나 사물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거기에 제대로 있도록 만드는 것을 뜻했고, 사적인 갈등이나 이득이 대결하는 것을 조정하거나 완화하여 분열된 사람들을 통합하여 하나로 추스르는 것을 뜻했다. 보수든 진보든 제대로 된 정치란 자기만의 이득을 생각하던 사람들이 남들의 입장을 생각하게 하고, 남들을 배려하여 자기 이득이나 주장을 뒤로 물릴 줄 알도록 하며, 종종 대의를 위해 자신의 희생조차 감수하게 하는 것이었다. 커다란 재해가 닥쳤을 때 사람들이 보여주는 태도들은 이런 정치가 막연한 이상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런 정치가 가질 수 있는 힘과 가능성을 보여준다. 고통에서 배우려는 자에게 고통이 ‘위대한 가르침’이 되는 것처럼, 재난은 그것을 함께 넘어서려는 자에게 좋은 삶, 좋은 정치에 대한 탁월한 가르침을 준다.
그러나 통치자들이 자신의 사적 이득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고, 모든 지역에 서 사람들 사이에 사적 이득을 위한 대결과 적대를 심어놓으며, 땅과 산, 바위와 바다의 평온을 깨고 그 속에 사는 모든 미물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지금 시대는 ‘정치’야말로 가장 큰 재난의 원인이 된 시대라고 해야 할 것이다. 통치가 사람들의 삶을 힘겹게 하는‘재난’을 해결하기는커녕 모든 곳에 없었던 재난을 야기하고 삶의 고통을 증폭시키는 사회, 그것이 지금 한국 사회다. 그들이 날치기로 통과시켜버린 한미FTA는 1%를 위해 99%를 죽이는 경제적 재난의 거대한 증폭기가 되어 평온한 삶의 ‘종결자’로 도래할 것이다.

정치의 외부에서 보이는 희망
정치가들의 뻔뻔스러움에 분노하고 정치가 야기하는 재난에 지친 사람들이 정치의 외부에서 희망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안철수 교수가 별로 한 것도 없이 확고한 대통령후보 박근혜 의원을 순식간에 제쳐버린 것은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경찰과 검찰, 언론 등에 의해 간신히 버티고 있는 지금의 정권은 이미 거대한 동요와 와해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것 같다.
스스로 당의 해체마저 언급하고 있는 한나라당은 아마도 얼른 이명박 대통령과 절연하고 재편된 당으로 사람들을 다시 속이려 할 것이고, 그로써 총선이 나 대선에서 다시 권력을 잡아보려 발버둥칠 게 틀림없다. 민주당은 그나마 갖고 있던 권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기존의 낡은 정치의 틀을 유지하려는 사람들과, 그런 식으로는 권력을 얻는 것조차 불가능하리라는 예감에 대중이 원하는 변화에 주저하며 따라가려는 사람들로 분열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차라리 부차적인 것일 터이다. 2008년 초부터‘정치판’의 외부에서 저항하며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크게 외치던 대중들은 또 다시 정치판 외부에서 정치 전체를 압도하는 힘을 가시화하고 있다. ‘희망의버스’, 두리반, 안철수와 박원순 등은이런 힘이 드러나는 한 자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재난이 된 정치에서 재난을 피할 정치에 대해 배우지 못한다면, 아무리 큰 고통을 겪어도 변함없이 고통스런 삶을 반복하는 무지와 무명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사실 나는 대통령이 누가 되든 얼마나 다르랴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망쳐놓을 수 있는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했다. 그들이 야기한 고통을 절감하고 그런 고통을 야기하는 연기적 조건들과 절연하는 길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재난 같은 거대한 고통 속에 중생들을 방치하게 될 것이다. 개개의 중생들을 끝없는 경쟁과 적대 속에 방치한다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더욱더 작아지고 단단하게 뭉쳐가는 아상과 아집 속에 몰아넣게 될 것이다.
자비의 가르침은 고통 받는 것들에 마음을 열고 그 고통을 감싸 안고 함께 함으로써, 그들이 고통을 좀 더 쉽게 넘어서고 자아의 벽을 완화하는 길로 우리
를 인도하려는 것일 게다. 또한 고통을 야기한 조건을 단호하게 끊어버림으로써, 중생들의 고통을 야기하는 자들로 하여금 더 이상 악업을 짓지 않도록 하는 것 역시 자비의 가르침에 속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를 넘어서는 ‘대승’이 필요한 때
2012년은 총선과 대선 때문에 다른 해와 구별되는 해이다. 그 선거에서 무엇을 할까는 사실 지금은 아주 명확하여, 그다지 논란거리도 되지 않는 것 같다. 고통을 스승으로 삼고자 하며, 무상을 알고 무아를 실천하기 위해 행을 닦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거시적 변환을 통해서 쉽게 사라지지 않을 미시적 고통 또한 놓치지 않아야 한다. 거시적 변환으로 인해 더 보이지 않게 될 수도 있을, 지선의 바깥에 있는 ‘외부자’들을 보아야 한다. 흔히 말하는 ‘대승’이란, ‘작음’과 대별되는 그 ‘커다람’이란 단지 어떤 양적인 크기를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나’를, 나의 확장으로서 ‘우리’를 넘어서는 커다람이다. 따라서 그것은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무아’와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것은 ‘나’로 인해 보이지 않는 것을 ‘바로 보는 것(正見)’이고, 나의 외부에 있는 것들, 보이지 않는 타자들을 보는 것이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간이 아니기에 있어도 보이지 않고 죽어도 죽은 것으로 세어지지 않는 중생들, 못사는 나라의 국적 때문에 도둑질을 당했다고 신고해도 체류허가가 있는지부터 입증해야 하는 이주노동자들, 체류자격이 없기에 임금을 떼여도 손목이 잘려나가도 말할 자격을 갖지 못한 이른바 ‘불법체류자’들, 정규직이 아니기에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일을 해도 충분한 임금은커녕 노동자조차 되지 못하는 비정규노동자들, 정상인들을 불편하게 하기에 보이지 않도록 ‘시설’에 갇혀 고통스런 생존을 지속해야 하는 장애인들 등등. 그 외부자들을 통해 ‘나’나 ‘우리’를 보는 것이다.
그들을 통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로 생각하는 것(正思惟)’이며, 그들과 ‘우리’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경계도 없음을 통찰하는 것이다. 그들과 ‘우리’가
서로 기대어 있으며 서로 기대어 살 길을 찾는 것이다(正業). 보시의 가르침은 이들에게 ‘내’가 가진 무엇을 나누어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들의 존재가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보시(선물)임을 아는 것, 그래서 그들에게 우리의 존재가 선물이 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 그럼으로써 자아의 벽을 쌓는 이득이나 교환의 계산적 관계를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공동체적 관계로 변환시키는 것을 뜻한다고 나는 믿는다. 2012년, 한국 불교가 이런 가르침을 앞장서 펼쳐주고 가르쳐주길 나는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