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은 새로운 신앙운동 이끌어온 ‘문자의 금자탑’

창간 37주년 특별기고

2011-11-28     불광출판사

잡지 전성시대에 탄생한 불광
흔히 잡지는 지식인의 문화운동이자 인문학적 지식의 창구로 일컬어진다. 불교잡지도 오랜 세월 시대의 거울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19027월 간행된 동양교보를 시작으로 1945년까지 조선불교월보(1912), 유심(1918), 금강저(1924), 불교(1924), 불교시보(1935) 등 일제치하에서 출간된 불교 잡지는 약 25종에 이른다. 당시 불교인들은 이들 잡지에 교리, 역사, 기행문, 교계소식, , 소설, 희곡 등 다양한 내용을 담아냈다. 또 잡지를 통해 식민지 치하의 고뇌와 열정을 표출했으며, 불교개혁을 부르짖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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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에도 신생(1946)을 비롯해 녹원(1957), 불교세계(1957), 불교사상(1962), 법시(1967), 불교계(1967), 법륜(1968), 거사불교(1971) , 불교사상(1973), 선사상(1975), 버팀목(1977), 대중불교(1977), 불교사상(1983), 법회(1984) 등 수많은 불교잡지들이 간행됐고, 각각 나름대로의 색깔을 표방하며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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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도 이러한 잡지 전성시대에 탄생했다. 197411, 광덕 스님에 의해 창간된 불광은 불교잡지 역사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불광은 잡지의 독자들이 모임을 만들고 사찰 창건까지 이어진 유일한 사례라는 점이 그렇지만 창간 이후 지금까지 37년 동안 단 한 번의 결호 없이 개근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대다수 잡지들의 수명이 1~2년을 넘지 못했고, 20년 넘게 사랑 받던 불교잡지들이 하루아침에 폐간되는 일이 벌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그것은 일반 잡지계도 마찬가지여서 문화체육관광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 한해 폐간된 잡지가 무려 2,744종에 이른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불광은 불교계 최고의 잡지로 자리매김했으며, 19943회 문공부 선정 우수 잡지’, 2005한국잡지협회 선정 우수잡지’, ‘2008년 우수전문잡지’, ‘2011년 우수콘텐츠잡지로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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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광」의 창간호 모습.

순수불교와 정법선양의 법등
(法燈)
불광의 성공 요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신앙운동이라는 명확한 특성도 그중의 하나다. 당시 한국불교는 기복불교와 지식불교가 평행선처럼 괴리돼 있었다. 한쪽에서는 교리와 신앙에 대한 이해 없이 무조건 복을 비는 풍토가 만연해 있었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불교를 고원한 사상이나 철학으로 여기며 지적 유희에 안주하는 경향이 적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많은 출가수행자들이 경전이나 일반불서를 깨달음의 걸림돌로 간주하거나 막행막식을 무애행으로 합리화하는 폐단도 여전히 심각했다. 이러다보니 일반인들은 불교를 기복신앙의 도구로 여기고, 불교수행은 현실사회를 떠나 산중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풍토가 팽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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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불광은 교학신앙실천의 고른 조화를 추구했다. 광덕 스님이 창간호에서 순수불교에 의거한 인간정신의 정립과 가치의 구현을 강령으로 제시했던 것처럼 불광순수불교정법선양의 법등(法燈)이 되고자 매진했다. 모든 사람이 본래부터 부처님 생명으로 살고 있다는 자각 운동, 자신이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이 바로 바라밀국토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불광운동의 한 복판에 월간 불광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맹목적인 신심이 아니라 체계적인 교리이해와 실천에서 나오는 해맑은 신심, 또 그러한 신심에 대해 스스로 당당하도록 하고 나아가 중생구제라는 보현행원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불광은 한국불교의 이정표 역할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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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광」 400호 발행 기념식에서 인사하는 발행인 지홍 스님.

현실의 굳건한 토대 위에 기획된 월간 불광

불광이 오늘날 가장 대중적인 불교잡지로 안착한 또 다른 배경에는 참신한 기획, 깊이 있는 사색을 이끌어냈다는 점도 한 몫 했다. 광덕 스님이 초창기부터 불교의 대중화, 불교의 현대화를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는 지나온 불광의 역사 곳곳에서 묻어난다. 스님은 창간호에서 반야심경 강의’, ‘현대인을 위한 불교이해등 불교교리를 쉽게 풀어 설명하는 연재들을 게재했다. 경전에 대한 이해가 깊을수록 신앙과 보현행도 빛이 난다는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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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불광이 경전의 해석 차원에서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창간호부터 9호까지 연재했던 성공자의 자기 관리법도 그중의 하나다. 성공을 속된 것으로 보던 시절, 광덕 스님은 대중들이 관심 갖는 사안에 대해 어떻게 하면 사회적인 부와 성공을 누릴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주변이 행복해질 수 있는가를 다뤘다. 이 글은 시간관리, 능력 계발법, 대인관계, 간부의 조건 등을 언급하고 있는 일종의 자기계발 지침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광덕 스님은 기도를 효과적인 성공방법의 하나로 제시한 뒤 나는 불성이다. 무량한 공덕과 행복의 창고다. 염불과 함께 부처님의 무량공덕은 나의 생명 속에 팽팽히 채워지고 더욱 넘쳐난다.”고 매일 기도하게 되면 일상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성공도 뒤따라온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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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에 연재됐던 인간승리를 위한 서장도 주목할 만하다. 이 글에서 스님은 정부가 식량문제와 경제성장의 둔화를 이유로 실시했던 산아제한 정책이 임신중절 등 생명의 존엄성을 말살하고 있다고 강력히 비판한 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까지 제시했다. 이러한 글들은 불광이 현실의 굳건한 토대 위에서 기획되고 집필됐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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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법을 향한 광덕 스님의 열정
무비 스님이 불광광덕 스님의 생명존엄사상을 담은 여래장이며 전법 보현행자의 육신사리”(통권 400)라고 평가했던 것처럼 당시 불광에 게재됐던 글들은 광덕 스님의 생생한 숨결이었다. 불광초기 광덕 스님이 집필한 원고가 80%에 이를 정도로 잡지에 대한 스님의 열정은 상상을 초월했다. 스님은 매 호마다 경전을 강설하고, 불교와 사회담론을 이끌어 갔다. 나중에는 금하라는 필명으로 직접 동화를 쓰기도 하고 찬불가를 작곡해 불광에 게재했다. 또 수시로 불광논단과 좌담회를 마련해 종무행정, 포교, 교육, 불교문화 등 불교계가 당면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대안을 모색해나갔다. 한쪽 폐를 잘라내고, 위장도 3분의 1밖에 없는 상태에서 스님이 병고를 견뎌내며 일궈낸 문자의 금자탑이 바로 불광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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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원력에 힘입어 불광의 독자층은 급속도로 확산돼 나갔다. 운허, 경봉, 석주, 지관, 고산 스님 등 고승대덕 스님들은 물론 조명기, 황수영, 이기영, 이종익, 고형곤, 이동식, 이부영, 김동리, 서정주, 이병주, 서돈각, 김달진, 김영태, 김지견, 홍윤식, 문명대, 서경수, 고은, 고익진, 김남조, 목정배 등 내로라하는 학자와 문인들도 필진으로 속속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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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들의 채취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불광

불광은 오래지 않아 불교계를 넘어 일반의 유수한 잡지들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위상이 높아졌다. 불광은 교리와 신심을 강조하면서도 과학, 철학, 심리학, 문학 등 불교를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연재들을 지속적으로 게재함으로써 불교교양서로서의 역할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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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은 그동안 기존의 틀을 깨는 참신한 기획과 연재들을 숱하게 선보였다. ‘사랑에 대하여란 주제로 대학교수와 고교 선생님, 도서관 사서, 대학생들이 한 자리에서 대담을 하는 이색적인 기획을 싣는가하면(통권 29), 창간 3주년(통권 37) 때에는 과 관련된 내용으로 전 지면을 채우기도 했다. 당시 불광에 실린 서옹, 경봉, 구산, 광덕, 운학 스님, 이종익, 고형곤, 이동식, 김용정 박사의 글들은 지금 읽어도 여전히 울림이 크다. 또 초기불교에 대한 이해가 일천했던 70년대 중반부터 고익진 교수의 초기불교 관련 글을 지속적으로 게재했으며, 1985년에는 당시 25세였던 최봉수 씨로 하여금 5회에 걸쳐 아함경의 구조를 연재토록 한 일도 있었다. 특히 달라이라마 망명수기19(1984.5~1985.12)에 걸쳐 연재함으로써 그때까지도 낯설었던 세계적인 종교지도자 달라이라마를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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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37년 역사에서 가장 대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내용을 꼽는다면 조계종 종정 성철 스님의 특별기고를 들 수 있다. 가로쓰기를 처음 시작한 19841월부터 다음해 8월까지 연재된 성철 스님의 해탈에 이르는 길은 대중들의 불교이해를 크게 넓혔을 뿐 아니라 불광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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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행자의 삶 살아가길
불광은 지난 37년 동안 변화를 거듭했다. 판형을 키우고 시원시원하게 편집하면서 깨달음의 길, 나눔의 길, 보현행자들의 세상사는 이야기들을 알차게 담아내고자 노력해왔다. 그로써 공감의 지평을 크게 넓힌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불광이 오랫동안 견지해왔던 신앙운동 성격이 퇴색한 것 아니냐는 아쉬움의 목소리도 있다. 불광이 지금도 예전처럼 새로운 한국 불교신앙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고 있느냐는 반문일 수 있다. 이것이 불광편집자들의 탓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불광과 이것의 발행 주체인 불광사가 늘 유의해야 할 사항인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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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 스님이 우리에게 열어 보여준) 반야바라밀은 과거의 사상이 결코 아니다. 반야바라밀은 미래의 사상이며 복음이며 희망이리라. 이 등불이 끝없이 다함없고 밝히고 지켜가는 것이 불광이며 그 존재가치이다.”라고 김재영 법사가 불광(통권 302)에서 밝혔듯이 광덕 스님의 사상은불광이 지향해야 할 오래된 미래이며 중생을 정토로 이끄는 힘찬 발걸음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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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불광의 편집자들이 잡지에 대한 전문 지식과 능력을 갖추면서도 광덕 스님과 같은 보현행자의 삶을 살아가려 할 때 잡지 불광도 더욱 빛날 수 있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끝으로 광덕 스님과 인연이 깊었던 박경훈 선생이 20여년 전 불광의 가족들에게 당부했던 내용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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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과 같은) 잡지를 만드는 편집자는 끊임없는 자기 탁마가 있어야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늘 새로운 것을 원하는데 이를 충족시켜주려면 자신들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돼요. 인간정신세계의 변혁을 주기 위한 잡지를 꾸미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 자체가 법상에 앉은 법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탁마해가야지요.”(통권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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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형 : 법보신문 학술기자. 동국대 인도철학과 및 동 대학원 사학과 수료. ‘불교계 친일행적 어떻게 볼 것인가’ ‘고은의 만해론을 비판한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와 신미의 역할’ ‘초기불교 연구 현황과 전망등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