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따라 마음 따라] 정약용 선생을 생각한다

2011-11-28     혜민 스님

천재의 승승장구와 몰락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2) 선생이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를 갔을 때가 1801년 11월이었으니까 그의 나이가 40이 되었을 때다. 4살부터 이미 천자문을 익혔고, 7살에 한시를 지었으며, 10살 땐 본인이 쓴 시들을 모아 『삼미집(三眉集)』 이라는 시집을 편찬했을 정도라니, 그는 분명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엄친아’이자 타고난 천재였다. 22살 때 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할 때부터 임금 정조에게 인정을 받았고, 28살에 드디어 대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오르는데 임금께서 특별히 총애하셔서 좋은 보직으로 승승장구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그렇듯 내가 잘되면 나로 인해 뒤로 재껴지고 소외 받는 사람들이 생길 수가 있는데 아마도 30대의 정약용 선생은 그들의 마음까지는 잘 챙기지 못했나 보다. 그렇게 출셋길에서 승승장구했던 그도 그를 총애했던 정조 임금이 1800년에 생을 마치게 되면서 그를 평소에 시기했던 사람들로 인해 장기 유배를 당한다. 나는 그가 처음 유배지에 도착했을 때 얼마나 그의 마음이 허망하고 쓸쓸했을까 상상이 된다.

그것도 그럴 것이 유배당하기 바로 전에 그의 형 정약종이 참수를 당했고 또 1802년에는 네 살의 막내 아들 농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유배생활 18년 중 처음 4년 동안을 술을 파는 주가(酒家)의 작은 방에 머물면서 특별한 저술 없이 술만 많이 마신 것 같다. 아마도 그는 그 기간 동안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본인을 유배시킨 임금과 관료들을 원망하였을 것이다. 또한 몸은 전라남도 강진에 있었지만 마음은 항상 한양에 있는 가족들과 친구, 집이 그리웠을 것이다.

지금 바로 여기에 서라!

그러나 그에게 큰 전환의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지금의 백련사(白蓮社)에 계셨던 혜장(惠藏) 스님을 만나게 되면서부터이다. 혜장 스님은 정약용보다 나이가 10살이 어렸는데 그는 이미 30살에 대흥사의 12대 대강사로 활동을 하고 34살에 백련사 주지 소임을 맡았다.

1805년 백련사로 소풍을 온 다산 정약용 선생을 만나 혜장 스님이 마흔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이 둘의 교류는 깊었고 정약용 선생은 혜장 스님의 배려로 주가의 작은 방에서 나와 고성사(高聲寺)의 보은산방(寶恩山房)을 거쳐 백련사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1818년까지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데 다산초당으로 옮긴 후부터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생활과 삶의 태도를 가졌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 이유는 다산초당에서 왕성한 집필활동과 함께 주옥같은 저서들이 이때부터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즉 정약용 선생은 처음 유배를 왔을 때의 남을 원 망하는 마음,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마음, 한양을 그리는 마음에서 혜장 스님과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서 나에게로만 향하고 한양으로만 향했던 마음이 쉬고, 바로 지금 이곳으로 눈을 돌려 유배온 뒤 처음으로 여기 전라도 강진의 일들과 강진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셨던 것이다. 그 마음을 전하듯 다산 어록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남 원망할 일이 아니라 내 탓임을 알았다. 그땐 그게 전부인 줄 알았는데 고작 밤 한 톨이었다. 가버린 것을 쫓을 수 없고 장차 올 것을 기약하지 못한다. 천하에 지금 눈앞에 처지만큼 즐거운 것이 없다.

이와 더불어 ‘청복(淸福)’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또 아래와 같이 설명 하셨다.

깊은 산속에 살면서 거친 옷의 짚신을 신고 맑은 못가에서 발을 씻으며 고송에 기대여 휘파람을 분다.

즉 맑고 깨끗한 복을 지금 바로 정약용 선생께서 백련사 옆 다산초당에서 스스로가 누리고 있다고 느낀 것이다. 원망하는 마음과 피해 의식으로 뭉쳤던 과거의 일들에서 완전히 벗어나 지금 바로 이곳으로 마음이 온전히 온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는 불가에서 말하는 수처작주(隨處作主), 즉 ‘가는 곳곳마다 내가 주인’이라는 것을 이때서야 비로소 실천을 한 셈이다. 그전까지는 몸은 강진에 마음은 한양에 있었으나 다산초당에서 몸과 마음의 분리감 없이 같은 곳에 온전히 있으면서 다산 초당의 진정한 주인이 된 것이다.

주인이 되었기에 후학도 챙기게 되고 왕성한 저술 활동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아담하고 정갈한 다산초당의 마루턱에 고요히 앉아 생각해 보았다. 삶의 나락의 끝으로 떨어져 어려워하는 이들에게 정약용 선생은 본인의 삶으로써 그 극복과정을 보여 주셨다고. 절망과 고통의 경험을 밑천으로 삼아 과거로 향한 마음을 돌려 ‘지금 바로 여기에 서라’고 말씀하신다고.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 나는 그래서 다산초당의 정약용 선생을 생각한다.


혜민 스님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버클리에서 종교학을 전공하고, 하버드 대학원에서 비교 종교학 석사를 수학하던 중 출가를 결심하고 2000년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받았다. 그 후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박사 공부를 하며, 연구차 북경과 오사카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현재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햄프셔 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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