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따라 마음 따라] 질투난다

인연 따라 마음 따라

2011-09-23     혜민 스님

햇빛조차 잘 들어오지 않는 단칸방 우리 집에 있다가 큰집에 가면 완전 딴 세계에 온 것만 같았다. 일단 냄새부터가 달랐다.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려면 우리 집과는 다른 좋은 향기가 났다. 게다가 현관문 근처에는 내가 평소에 가지고 놀고 싶었던 농구공, 배구공, 자전거 같은 것들이 가득했고 거실로 들어서면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편한 소파와 유명작가의 판화 그림이 벽에 잘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내가 그렇게 배우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제대로 배울 수 없었던 피아노가 손님방에 놓여 있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넓은 공간을 아버지의 형이 가지고 산다는 것이 나에게는 항상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아픈, 질투의 경험

큰아버지 가족이 몇 년 동안 미국에 살다 와서 그런지 사촌들과 나 사이에는 큰 강이 자리 잡고 있는 듯 했다. 사촌들은 그 강의 건너편에 서서 우리 형제에게 손을 내미는 제스처를 잘 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집에 가도 나는 항상 내 동생과 놀다가 오곤 했다. 어떤 이는 왜 먼저 사촌들에게 살갑게 다가가지 못했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없는 자가 있는 자에게 손을 먼저 내밀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은 가난하게 살았던 콤플렉스에서 어느 정도 해방이 되어 이처럼 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어린 시절 큰집은 나에게 매우 힘든 존재였다.

큰집에 다녀오고 나면 부모님을 한참동안 원망하기도 했다. 명절 때마다 나 의 학교 성적이 언제나 사촌들의 성적과 비교 당했다. 자존심 상하는 순간들 을 계속 반복적으로 경험해야 했고, 열악한 환경에서 나 혼자 아무리 열심히 분투를 해도 사촌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일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쯤 할머니 생신에 온 가족이 모인 날이었다. 가기 싫다는 나의 손을 억지로 잡고 부모님은 나와 동생을 데리고 큰집에 갔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나에게 고모들은 사촌들과 함께 놀 것을 종용하였고, 나는 정말로 오랜만에 사 촌동생과 말을 섞게 되었다. 사촌동생은 최근에 부모님께서 사주셨다는 미국 산 장난감을 하나 보여 주었다. 사진기처럼 보이는 것이었는데, 사진기 안에 끼워진 칼라 필름을 돌려 보면 미국의 여러 국립공원 모습의 사진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었다. 사촌은 내가 그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도 된다고 허락을 했고, 나는 한참동안 내 동생에게 보여 주고 설명을 해 주면서 가지고 놀았다.

그런데 한참을 보면서 놀다보니 그 둥근 필름이 잘 돌아가지 않아, 조정하는 과정에서 구겨지고 찢겨져 버렸다. 아뿔싸! 이를 어쩐다. 사태의 수습을 위해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는 결국 그 필름 자체를 아파트 밖으로 가지고 나가서 버리고 말았다. 그러곤 필름 자체가 없어진 것을 모르는 체 했다. 사촌동생은 당연히 그 필름이 어디 갔는지 나에게 묻다가, 계속되는 질문에도 내가 모른다고 하니까 큰어머니께 도움을 청했다. 다시 큰어머니는 내가 진짜 모르는지 추궁을 하셨다. 그런데 큰어머니로부터 그 질문을 받는 순간, 내 안에서 나도 모르게 울컥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서러움, 분노, 미움, 시기, 짜증이 혼합된 복잡 미묘한 감정이었다.

질투는 나를 발전시키는 기회

어른이 되어서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때 나는 내가 갖지 못하고 있던 많은 것을 사촌들이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는 것에 몹시도 질투를 냈던 것 같다. 질투라는 주제로 청년법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 안 깊은 곳에서 끄집어낸 이 기억의 회상은 사실 지금도 아프다. 하지만 그 기억을 다시 들여다보며 질투라는 감정에 대해 나 스스로 몇 가지 발견한 것이 있는데, 이 점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

일단 질투의 대상은 나와 멀리 떨어져 있거나 많이 다른 대상이 아닌, 대체로 비슷한 주변 사람을 통해 일어난다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는 어떤 부분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일어나는 감정이다. 그 감정의 농도가 옅으면 단순한 부러움으로 그치지만, 진했을 경우 질투가 분노와 강한 미움으로 심지어 폭력으로도 전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감정은 그 대상의 아주 일부분만을 보기 때문에 생겨난다. 나에게는 없는 어느 특정 부분을 그가 가지고 있으므로 나보다 훨씬 행복할 것 같지만, 실제로 그 사람 전체를 보게 되면 꼭 그렇다고만 이야기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또한 질투라는 감정은 현재 나의 모습이 불만족스럽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이런 마음을 잘 돈발(頓發)시켜, 부정적 감정을 그 대상으로 표출하지 않고 나에게로 돌려 잘 승화시키면 나 스스로를 발전시키게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나의 어린 시절 예와는 다르게 질투의 대상이 가정환경이나 물질, 자리가 아니고 사람인 경우도 있다. 그 질투는 내 근원의 외로움 그리고 공포와 맞부딪치게 한다. 누군가를 내 마음대로 조정해서 나만을 바라보게 하는 해바라기와 같은 부인이나 남편,애인이나 가족, 친구로 만들고 싶어 한다. 지금 나에게 보이는 관심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까봐 겁이 나서, 혹은 혼자될까봐 두려워서 드는 느낌이다.

이런 경우에는 우리가 진정으로 홀로됨을 느껴보기 전에는 그 근본적인 질투의 마음이 해결되지 않는다. 둘이 있어도 좋고 혼자 있어도 괜찮은 상태가 되지 않는 한, 대상을 옮겨가면서 우리 중생은 끊임없이 질투심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질투 나는가? 그렇다면 질투의 감정에 빠져 나를 잃어버리지 말고, 왜 그런 감정이 일어나는지 자세히 관찰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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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민 스님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버클리에서 종교학을 전공하고, 하버드 대학원에서 비교 종교학 석사를 수학하던 중 출가를 결심하고 2000년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받았다. 그 후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박사 공부를 하며, 연구차 북경과 오사카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현재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햄프셔 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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