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과 문양] 권위와 수행의 상징인 불자(拂子)

상징과 문양

2011-09-23     유근자
그림1. 절에서 사용하던 불자, 조선시대, 표충사유물관

불자를 들고 법문하던 스님

대학원 다닐 때 부처님오신날 즈음 해 조계사에서 열린 법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때 법문을 하러 오신 조계종 종정 스님은 손에 하얀 물건을 들고 계셨는데, 청소할 때 쓰는 먼지떨이와 비슷했지만 그것보다는 고급스러워 보였다. 법문을 하는 내내 그 물건이 무엇인지가 궁금했는데, 한참 후 그것이 불자(拂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불자는 마음의 티끌과 번뇌를 털어내는 상징적 의미의 법구로 불(拂) 또는 불진(拂塵)이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어로는Vyajana 또는 Vāa-vyajana라고 하며, 빨리어로는 Vijanī라고 한다. 불자는 동물의 털, 무명실, 삼(麻), 나무껍질 등을 묶어서 자루에 맨 것으로 고대 인도에서는 먼지나 벌레를 쫓는 데 사용하던 생활용구였다. 우리나라 절에서는 흰 말의 꼬리로 만든 백불(白拂)을 귀중히 여겼다(그림 1).
인도 자이나교의 수행자는 지금도 길을 갈 때 불살생계(不殺生戒)를 지키기 위해 한 손에는 불자를 들고 길을 쓸면서 지나가고 있다. 생활용구였던 불자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용도의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 과정을 살펴보자.

모기를 쫓을 때 사용하던 불자

부처님께서 수행자들이 모기를 쫓는 데 불자를 사용할 것을 허락한 이야기는 『마하승기율』 제32권과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 제6권에 전한다. 후자에 전하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웨살리의 원숭이 연못가 높은 누각에서 비구들이 모기에게 물려 몸이 가려워 계속해서 긁자 속인들이 보고 물었다.
“성자여, 왜 모기를 쫓는 불자를 갖고 있지 않나요?”
“부처님께서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부처님께 아뢰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부터는 비구들에게 모기를 쫓는 불자를 가질 것을 허락한다.”
이때 말썽을 피우던 여섯 비구들은 불자를 가질 것을 허락한다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는 보배로 장식된 자루에 야크 꼬리로 된 불자를 만들었다. 이것을 본 속인들이 수행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불자라고 비방하자, 부처님께서는 또다시 말씀하셨다.
“모기를 쫓는 불자를 만들 때는 다섯 가지 재료를 사용할 것이니 첫째는 양털이요, 둘째는 삼이요, 셋째는 가늘게 찢은 천이요,넷째는 낡고 해진 것이요, 다섯째는 나무껍질이다.”

부처님은 모기를 쫓는 불자와 함께 날이 더울 때는 부채를 사용할 것을 허락하셨다. 간다라인들은 한적한 꾸시나라에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든 장면을 표현하기를 좋아했다. 아난다 존자보다 먼저 오랫동안 부처님을 시봉했던 우빠와나는 부처님이 두 그루의 사라수 아래에 계실 때 부처님 앞에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문수사리보초삼매경』에 의하면 ‘범천자(梵天子)들도 모두 각기 불자와 부채를 들고 모든 보살을 모시고 서서 부채질했다’는 기록처럼, 열반 장면의 부처님께 부채질하는 우빠와나는 부채 대신 불자만을 든 채 표현되어 있다(그림 2).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불자

고대 인도의 왕을 상징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일산(日傘)과 불자(拂子)가 대표적이다. 『중아함경』에 의하면“만일 찰제리(刹帝利, 크샤트리아)로 정수리에 물을 붓는 관정식(灌頂式)이 끝나면 그는 왕이 되는데, 검, 일산, 천관(天冠), 진주 자루의 불자, 장엄한 신을 갖는다.”고 한다.
깨달음을 얻은 후 부처님은 고향인 까삘라왓투를 방문했다. 까삘라왓투의 사람들은 화려한 왕자의 모습 대신 누더기를 걸치고 맨발로 거리를 걷고 있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 실망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공중 부양으로 신통력을 보였고, 결국 숫도다나 왕을 비롯한 까삘라왓투의 사람들은 부처님께 귀의했다.
공중 부양한 부처님은 직사각형의 네모난 경행석(經行石)으로, 숫도다나왕과 까삘라왓투 사람들에게 예배 받는 부처님은 보리수와 대좌로 표현되었다. 크샤트리아 계급의 숫도다나 왕은 불자와 일산으로 쉽게 구분이 가능하다(그림 3).
도상의 근원을 크샤트리아에 둔 제석천 역시 한 손에는 금강저를, 그리고 또 다른 손에는 불자를 들고 있다(그림 4). 『대장엄론경』에도 ‘제석(帝釋)은 불자(拂子)를 가지고’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불자를 든 제석천 역시 낯설지 않은 도상이다.

그림2. 부처님 곁에서 불자를 들고 서 있는 우빠와나 존자, 간다라(2~3세기), 캘커타 인도박물관(좌상) 그림3. 부처님과 재회한 숫도다나 왕과 불자와 일산을 들고 그 뒤를 따르는 시녀들, 1세기경, 인도 산치 제1탑 탑문(우상) 그림4. 불자와 금강저를 들고 있는 석굴암의 제석천, 751년경, 경주 석굴암(좌하) 그림5. 불자를 든 나한, 조선 후기, 선암사 응진당 (우하)


선불교와 불자

불교의 전파와 함께 중국에서 불자는 특히 선종에서 선호하는 것이 되었다. 주지스님이 설법할 때 위의(威儀)를 나타내기 위해 불자를 들고 설법했기 때문에, 주지라는 용어 대신에 병불(秉拂)이라고도 했다. 불교에서는 깨달은 자를 아라한 또는 나한이라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16나한 신앙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친 16나한 신앙은 조선시대에 16나한상과 16나한도로 표현되었다. 16나한상 가운데 한 분도 한 손에 불자를 들고 있다(그림 5). 이 나한님은 아마도 수행자를 모델로 해서 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법원주림』에 의하면 “도생 스님은 여산(廬山)으로 가서 바위굴에서 세월을 보내니 산중의 스님들이 모두 공경하고 받들었다.송나라 원가(元嘉) 11년(434)에 여산의 정사에서 법석(法席)을 열었는데, 법석이 끝나려 하자 갑자기 불자가 힘없이 떨어지면서 도생 스님은 단정히 앉아 책상을 기대어 입적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스님들의 초상화 속의 주인공은 대부분 주장자와 불자를 들고 있는데, 수행 생활에 꼭 필요한 법구였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중국에 선(禪)을 전한 달마 스님 역시 불자를 들고 동굴 속에서 면벽 수행 중이다(그림 6). 모기를 쫓던 생활 용구였던 불자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거나, 설법의 위의(威儀)을 나타내거나, 제석천과 범천을 비롯한 여러 보살들의 지물(持物)이 되거나, 선승(禪僧)을 상징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집안 청소를 할 때 먼지떨이를 집안에 준비해 두듯, 마음 속 번뇌를 털어 낼 불자를 오늘 당장 하나씩 마련해 두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림6. 불자를 들고 동굴 속에서 수행 중인 달마 스님, 1941년, 송광사 성보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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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자
덕성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석·박사과정을 이수했다. 「통일신라 약사불상의 연구」로 석사학위를, 「간다라 불전도상(佛傳圖像)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사)한국미술사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