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법구] 무소유 실천, 크게 버려야 크게 얻는다

내 마음의 법구

2011-09-02     황평우

중학교 2학년이었으니까 1975년이다.

국어교과서에 김동리 작가의 소설 『등신불(等身佛)』이 실려 있었다. 만적 스님이 자신의 몸을 불살라 부처님께 바치고, 타다 굳은 몸에 그대로 금을 입힌다는 내용이다. 타인의 고통에 충격을 받고 자신의 몸을 바쳐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을 극복하려는 소신공양(燒身供養)! 중학생이었던 나에게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세월이 지난 지금도 불교미술사를 공부하다 불상을 친견할 때면, ‘실천’으로 보살행을 보여준 등신불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20대 청년시절은 법정 스님의 가르침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스님은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고 일침을 가하셨다. 그래서자기의 분수를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되는 것이며,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나 법정 스님의 ‘무소유’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무관심하거나 피동적인 삶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상사를 자비와 사랑이라는 관용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스님은 경직된 흑백논리만 강조되는 세상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한편, 잘못된 것에 가차 없이 돌팔매를 던지셨다.

10여 년 전 한 문화예술기획모임에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젊은 문화예술기획자들을 양성하는 일을 맡은 적이 있다. 당시에 유독 눈에 띄는 30대의 한 청년이 있었다. 몸은 말랐고 눈은 가늘고 날카롭게 생겼는데, 유독 질문도 많고 고민도 많았다. 융통성은 없었으나 매사에 정직하고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집안이 어려운 탓에 낮에는 경비원으로 일하며 돈을 벌고 밤에는 공부에 매진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사라졌다. (필자가 무슨 신파극을 쓰려고 하는 게 아니다.) 몇 년이 지나 그로부터 연락이 왔다. “TV에 선생님이 나오셔서 전화했어요. 저는 불교 조각을 배우고 있어요.” 이게 다였다.

다시 몇 년이 흘러 3년 전, 밤늦게 지방 답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이 친구로부터 또다시 전화가 왔다. 아무리 늦어도 꼭 만나고 가겠다고 한다. 교통정체로 새벽에 도착한 집 앞에 그 친구는 없었다. 전화도 불통이었다.
2년 전 주말이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목적지 없이 차를 끌고 길을 나섰다. 도착하니 남원 실상사였다. 생명평화 운동을 실천하고 있는 도법 스님의 안부가 궁금했나 보다. 보광전 앞에서 예를 갖추고 삼층석탑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데 스님 한 분이 휙 지나갔다. 순간 스님과 나는 동시에 얼어붙었다.

실상사 공양간으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손을 꼭 잡았다. 필자의 부질없는 물음과 하염없는 눈물만 쏟아졌다. “왜, 어떻게 하려고 출가했니? 그때 우리집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한 것은 속세에서 마지막 인사였니? 미안하다. 미안하다. 아이고 스님…. 제가 말을 놓아버렸네요.” 하염없이 눈물만 나왔다.

출가하기 전 속세의 인연 중 꼭 필자에게는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새벽까지 기다려도 오지 않아서 언젠간 볼 수 있겠지 하고 떠났단다. 스님은 필자가주장한 실천하는 삶을 위해 출가했고, 앞으로 그렇게 살겠다고 했다. 이제 김포 중앙승가대학 1학년이다. 등신불 문수 스님의 후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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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평우
고려대 졸업 후 동 대학원에서 문화유산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주요 저서 및 논문으로는 재앙의 물길, 한반도 대운하(공저 2008), 한강의 기적(공저 2010), ‘문화재정책, 여전히 냉철한 고민 부재: 문화재보존관리 및 활용에 관한 기본계획 점검’(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2002) 등이 있다.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으로 4년간 활동했고, 현재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 문화연대 집행위원, 한국박물관협회 정책자문위원, 유네스코 청소년국제교류센터(MIZY)기획위원 등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