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의 새얼굴

나의 인생을 결정한 불교서

2007-06-13     관리자
한국 불교의 새얼굴 
                                                                           노부호

‘나의 인생을 결정한 불교서’라는 주제로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나는 즉시 한 권의 책이 생각 났고 이 책을 소개해야겠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내 마음에서 일어나 능력이 미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감히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내가 소개하고자 하는 책은 휴암 스님이 쓴 ‘한국 불교의 새얼굴’(대원정사, 1987)이다.
이 책은 나의 불교관을 정립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그래서 나의 인생을 결정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나는 이 책이 불교를 보는 시각을 바로 잡아 줄뿐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순수해질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는 사상서라고 말하고 싶다.
‘한국 불교의 새얼굴’은 한국 불교의 문제점을 심도있게 분석 하여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책이다. 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는 것 이겠지만 ‘불교는 왜 힘이 없는가?’ ‘불교는 왜 이 사회의 문제에 대해 아무 말이 없는가?’와 같은 의문을 제기하면서 불교가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않고 있는데 대해 내심 불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휴암 스님은 그 이유를 한국 불교에서는 지식만 있고 지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지성은 사상이고 가치관이다. 행동은 선택이고 선택은 가치관이 확립되어 있을 때 나올 수 있고 가치관이 뚜렷하면 할수록 행동은 그만큼 강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불교에는 사상이 없고 자기 비판만 있다. 저자는 사상부재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불교가 이렇게 사상의 빈곤과 침체의 수렁에 빠지게 된 것은 바로 한마디 ‘모든 것이 자기 탓이다’라는 책임주의를 잘못 소화시킨 데 결정적인 원인이 있다.” 즉 자기 책임을 자기 반성을 위한 책임이 아니고 ‘너는 너 나는 나’와 같이 상호 무책임주의와 방관주의를 유발하고 여기에 덧붙여 ‘불교의 무분별지(無分別智), 무시비(無是非), 무념(無念), 무심(無心), 방하착(方下着)같은 개념들은 불교를 더욱 맹목적이고 무원칙의 풍토’로 흐르게 하여 불교는 불교인 전체를 위해 자기를 바치는 대아적 책임정신을 심어주지 못하고 제 살 길만 책임진다는 극단적인 이기적 개인주의와 은둔적 행위를 조장해 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가 사회적 현실적 책임을 망각하고 있는 근본적 이유다. 이기적 개인주의는 또한 ‘과보적 인과사상’과 ‘호국불교’를 아무 비판없이 받아들임으로써 한국 불교를 물질적, 기본적, 체제종속적인 종교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과보적 인과사상은 현실의 인간을 과보적 존재로 보아 물질의 차이에 따라 인간을 차별화함으로써 인간을 물질의 노예로 만들었다. 부자나 정승이 존재에 있어서 저 평범한 농부보다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저자는 인간을 물질에 기초를 둔 상대적 가치가 아닌 정신에 가치를 둔 절대적 가치로 대할 것을 주장하면서 “가난한 자나 억눌린 자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내세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현금(現今)에서 인간본연의 가치와 긍지를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인본주의 사상을 역설하고 있다.
호국불교에 대해서는 호국이라는 용어 자체부터 비불교적인 언어이지만 그래도 호국이라 하면 그 방법은 종교다운 더구나 불교다운 방법이어야 할 것이고 색채와 특징이 국민들의 피부에 와 닿는 것이어야 했는데 초점도 사상도 없는 호국이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호국불교는 불교가 사상 부재의 길로 가게 된 다른 하나의 원인이 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 부재로 인해 불교는 개인을 받드는 신념은 약하고 언제나 전체에 복종해왔고 권력과 집단에 약했다. 이것은 불교가 자기사상을 존재론적으로만 수용하고 가치론적으로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휴암 스님은 불교는 권력에 기댈 생각은 말고 오로지 불자의 올바른 신심에 의해 보존될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보다 주체성있는 그리고 위엄있는 종단을 만들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와 같이 과적 인과사상과 호국불교는 한국 불교의 사상을 빈곤하게 만들어 한국불교를 기복적이고 체제종속적인 소아적(小我的) 종교로 만들었는데 이제 불교가 현실과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 인간적 현실을 구제하려면 가치에 기초를 둔 대아적(大我的)종교로 탈바꾼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불교가 원칙,가치,진리에나아가는 순수를 지향함으로써 전체를 위하는 종교가 되어야 하는 것을 말한다.
휴암 스님은 가치와 무아의 불가분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복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지만 보람이라는 언어는 목이 마르도록 들어 보지 못했다. 화복에 대한 언어는 많아도 선악에 대한 언어는 부족했다.’
그러나 복은 무의미한 것이다 보람을 느끼지 못하면 물질이 아무리 풍부해도 우리는 생동감을 상실한다. 우리를 감격케하는 것은 ‘인간성이요, 진실이요, 보람이며, 우애인 것이다. 인간은 이런 진실에 감격하며 소유를 버리는 존재’인 것이다. 가치에의 길은 실로 감격에의 길이며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를 잊게 하는 무아를 실현케 하는 길이다. 깨달음은 가치를 초월하는 것이지만 가치없이 깨달음을 내 보일 수 없다.
이 책을 통해서 스님이 즐겨쓰는 말은 ‘순수’이다. 화복 대신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물질주의에서 참된 저항, 참된 행동은 나오지 않는다. 물질은 권력을 두려워하고 화를 겁내고 있다. 가치만이 참된 저항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휴암 스님은 “모든 용기 중에 가장 본질적이고 뛰어난 용기는 사상의 용기이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그동안 여러 스님들의 법문을 들으러간다고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이해도 되지 않는 어려운 법문을 하면서 깨달은 체 하는 스님도 있고 다 아는 좋은 말이지만 현실성이 없는 법문으로 시간을 때우는 스님도 있다.
한번은 깨달았다는 큰스님이 있다기에 법문을 들으러 갔는데 그 스님은 자기 이야기는 않고 옛날 유명했던 스님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만 늘어놓았다. 깨달았다는 스님이 어째서 자기 생각하면서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고 어째서 큰스님으로 소문이 났는지 궁금하였다.
그러나 그 법당에는 사람이 넘쳐 바깥에서 많은 사람들이 스피커를 통해 그 스님의 법문을 들었는데 그들도 나와 같이 실망했는지 궁금했다.
이런 현상을 직시한 어떤 스님은 “지금 당장의 삶과 아무 산관도 없는 메마르고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가르침은 종교를 빙자한 헛소리이다. 그 누구의 경우 이건 법문이란 이름아래 이런 ‘ 헛소리 ’에 지금까지 우리가 얼마나 많이 속아 왔는지 냉정하게 맑은 제 정신으로 살펴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나는 한국 불교가 크게 개혁되어야 하고 개혁을 위해서 휴암 스님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불교의 개혁 나아가 해탈은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법문을 하면서 권위만 강조하는 큰스님들이 엉터리라고 알려질 때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영험이 있다는 이유로 절을 찾아가는 신도들이 없을 때 이루어 질 것이다.
요즈음 불교가 내분에 휩싸이는 이유도 한국 불교에 깨달음이 부족한 때문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 많은 큰스님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 내분은 오래갈 수 없다. 깨달은 스님이라면 행동으로 이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불교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책이지만 또한 귀중한 사상서이다. 저자는 한국 불교의 문제점을 사상의 부재에 초점을 맞추고 올바른 가치관의 정립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는데, 가치관의 부재는 적당주의와 무관심이 만연한 한국적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우리와 불교는 오랫동안 역사를 같이해 왔기 때문에 우리의 문제가 바로 불교의 문제이고 불교의 문제가 바로 우리의 문제이다. 불교가 제 모습을 찾을 때 한국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수선한 마음이 가라앉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은 이 책 전체를 흐르는 순수가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 머리에 붙이는 말’에서 ‘인연 있는 독자라도 만나 그의 잠자리를 설치게 해주는 사태라도 발생한다면 그로 인해 심술쟁이라고 실컷 욕이나 얻어먹겠다’고 했다. 또한 이 책을 ‘젊은이’만 읽어 주길 바란 다고 했다.
여기서 젊은이란 나이의 적음이 아니라 이상과 진실을 향하여 끊임없는 자기부정을 통해 향상해 나가고자 하는 이를 말한다. 정말 독자 여러분이 ‘젊은이’라면 그가 불교인이든지 아니든지 예리한 통찰력으로 고뇌하고 사유한 스님의 글로 빠져들어가 잠을 설치게 될 것이라 믿는다.

노부호: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와 동대학 경영대학원 경영학과를 졸업하였다. 현재 서강대학교 경상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