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명상문화의 특수성과 야사의 귀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부처님의 참모습

2011-09-02     불광출판사

신체의 방어기능과 명상
대기 온도가 30도가 넘으면 인간은 더위를 느낀다. 그러다 체온인 36.5도 이상이 되면, 밖으로 숨 뱉기가 힘들어지면서 극심한 더위를 인식하게 된다. 호흡을 해도 열이 빠지지 않기 때문에 매우 갑갑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대기 온도가 40도 정도 되면 호흡을 통해서 열이 역류해 들어오는 일이 발생한다. 이때 신체는 호흡을 조절해서 길고 가는 호흡 상태를 유지한다. 이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열을 최소화해 신체에 열이 축적되는 것을 막기 위한 생리적 기능이다. 따라서 더울수록 호흡은 길고 가늘어진다. 열을 빼내기 위해 내쉬는 숨의 비중이 더욱 커지는 것이다. 이것이 인도 명상문화에서 낮고 길게 내쉬는 장출식(長出息)의 기원이라고 하겠다.
호흡이란, 산소의 운반과 소모를 통한 배출과정이다. 신체 안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많은 산소를 소모하는 곳은 뇌이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고 사고하는 전 과정은 뇌가 산소를 태우면서 발생하는 현상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인간의 신체는 체온에 매우 민감하다. 체온이 39도 정도만 되도 몽롱한 혼수상태로 빠져든다. , 신체에 열이 축적되면 치명적인 위험이 뒤따른다. 그래서 대기 온도가 체온보다 높아 체내에 열이 축적되는 구조가 발생할 경우, 뇌는 생각을 최소화하거나 정지하게 된다. 많은 생각은 혈류량을 증대시키고, 이는 체온 상승과 직결되므로 생각을 줄여서 체온 상승을 억제하는 것이다. 또한 뇌의 온도가 과도할 경우 뇌세포가 파괴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런 경우 뇌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혈류량 증가를 차단하는데, 이것이 생각의 조절 혹은 정지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체의 비밀을 통해서, 우리는 인도의 무더운 기후가 왜 명상문화의 배경이 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위빠사나와 선종의 수행법
위빠사나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느림과 관조의 미학이라고 하겠다. 위빠사나는 번역하면 관()인데, 이는 무더운 지역의 수행법이다. 더위는 인간의 생각을 느리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관조라는 것이 훨씬 더 예민하게 작용될 수 있다. 이를 수행법으로 집약시킨 것이 바로 위빠사나인 것이다.
위빠사나가 더운 기후에 의존한다는 것은 이것이 인도문화권의 수행법이지, 불교만의 수행법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초기경전에 붓다가 제자들에게 위빠사나를 가르치는 대목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은 이를 잘 방증해준다. 불교수행법은 4성제와 8정도, 그리고 5·12·18계의 3과설이지 위빠사나가 아니다. 이는 모든 불교개론서들에서조차 공통되게 언급되는 일반론이다.
위빠사나는 미얀마의 마하시수도원에서 20세기에 재정립된 새로운 수행법의 일환이다. 마치 화두선이 중국불교에서 새로운 불교수행으로 창안된 것처럼, 위빠사나 역시 미얀마불교의 산물인 것이다. 그래서 위빠사나를 배우는 사람들은 스리랑카가 남방불교의 정통성을 간직하고 있음에도 미얀마로 향하는 것이다.
요즘 들어 국내에서도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것이 종종 목도되고는 한다. 수행의 성취여부는 둘째치더라도, 수행이 무엇이라는 개념 자체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지 조금은 의문스럽다.
중국으로 불교가 전래된 초전기에 인도불교의 수행법 역시 전파되었다. 이것이 중국불교사의 벽두에 등장하는 안세고의 소승선관(小乘禪觀) 전래이다. 그러나 인도불교의 더운 기후적 수행법은 중국의 추운 기후 조건에는 맞지 않았다. 이것이 후일 중국식의 수행법에 의한 선종의 발생 계기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수행법의 차이는 여래선과 조사선이라는 이상인격의 차이로까지 발전하기에 이른다.
북방의 추운 기후는 체온의 상승을 요청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문화권의 수행법은 들이쉬는 숨에 무게 비중을 두며, 단전호흡과 같이 혈류량을 증대시키는 측면을 파생하게 된다. 또한 춥기 때문에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게 되는데, 이것이 활발발(活發發)한 성성적적(惺惺寂寂)의 수행문화를 파생한다. , 전체적으로 행동주의적 수행론인 것이다. 이쯤 되면, 기후조건이 수행문화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기후에 상응하는 신체의 방어기능이 핵심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혹자는 위빠사나를 통해서 우리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정 정도의 기후 변화가 수반될 때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마치 동양인이 신체적 열세 때문에 육상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어려운 것처럼 위빠사나는 우리에게 그리 적절한 수행법이 되지 못할 수 있다.

야사와의 조우
인도인의 사색적 기풍은 기후조건에 의한 태생적 가치이다. 이것은 붓다의 가르침이 매우 강렬한 호소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녹야원을 떠난 붓다가 바라나시에서 만나게 되는 6번째 제자는 야사이다. 붓다는 신분차별이 없는 4성평등을 주장했지만, 붓다의 제자들은 대부분 귀족이나 부호들이다. 이는 가진 자들일수록 더욱더 사색적이기 쉬운 인도기후의 배경문화 때문이다.
존재의 목마름이 있는 자에게 스승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바라나시 부호의 자제인 야사에게 부귀는 더 이상 삶의 가치가 아니었다. 그때 야사는 붓다와 마주하게 된다.
붓다와 조우에 있어 야사는 새벽에 깨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새벽에 홀로 깨어난다는 것은, 언뜻 보면 대단한 종교적 상징이 되는 듯하다. 모두가 잠든 세상에 홀로 깨어 있다는 것은 분명 성스러운 아름다움을 내포한다. 그러나 인도 귀족들에게 있어서 이는 그리 이례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인도를 찾는 것은 겨울이다. 이때 인도 기온은 대략 30도 정도이다. 그런데 여름철 인도는 40~45도에까지 이른다. 이런 더운 문화권에는 낮잠을 자는 풍습이 있다. 이는 인도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크레타 등에서 오늘날도 행해지는 풍속이다.일을 해야 되는 사람들은 낮잠을 어느 정도 잤으면 다시 일어나서 활동을해야 한다. 그러나 귀족이나 부호와 같이 딱히 정해진 일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은 굳이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 이럴 경우 과도한 낮잠은 밤잠을 방해하게 되고, 비교적 선선한 새벽에 깨어나 산책하는 풍토가 만들어지게 된다.
낮에 많이 자서 새벽에 깰 경우 다시 잠이 오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이럴 때 누워있는 것보다, 홀로임을 즐기며 산책하는 것은 분명 소슬한 즐거움이다. 또한 이때는 고요한 주변의 여건상 더욱더 사색적이 되기 쉽다. 야사는 이러한 새벽에 산책을 하다, 멀리서 빛을 보게 된다. 그것은 나무 밑에 앉아서 명상에 잠겨있던 붓다 주변의 후광이었다.
요즘이야 밤에도 빛들이 너무 많아 별 볼 일이 없는 세상이 되었지만, 기름과 향신료 및 염료 등은 과거 전 시대를 통틀어 언제나 고가였다. 그래서 밤에 불을 밝힌다는 것은 특별한 경우에만 한정되는 사치의 문화라고 하겠다. 그러한 문화 속에서 빛을 보게 되니, 궁금해서라도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 아니었을까!

야사 부모의 귀의
야사는 신발을 벗고 붓다에게 다가가 붓다와 대화를 펼친다. 젊은 부호의 아들은 그렇게 존재의 사색에 잠기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여명이 걷히고 새벽이 열리게 되자, 야사는 붓다와의 조우 속에서 진정한 가치를 자각하게 되고 출가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붓다는 야사의 출가를 말리며 거절한다.
동이 트자 야사의 집에서는 야사가 없어진 것을 알고 각 처로 하인들을 보내 찾게 하고, 부모 역시 아들을 찾아 나선다. 그러다 우연찮게 부모는 야사가 간 곳으로 가게 된다.
그때 붓다는 야사와 부모가 상면하는 것이 옳은 결과를 낳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여, 신통으로 야사를 가려 부모들이 보지 못하게 한다. 그렇게 아들 때문에 인도된 야사의 부모는 붓다와 상면하게 되고, 결국 붓다의 웅건함에 감복하여 아들 찾던 것을 잠시 잊고 붓다의 신도가 된다. 이들이 불교교단 최초의 우바새와 우바이, 즉 남신도와 여신도가 되는 축복받은 이들이다.
붓다는 이들이 불법에 믿음이 생긴 것을 알고, 신통을 거두어 야사가 드러나게 한다. 그렇게 부모의 아들 찾음은 해소되었다. 그때 야사는 부모님께 출가하겠다는 의사를 전하고, 부모 역시 붓다를 따르는 일이 의미 있는 일임을 공감하며 출가를 허락한다.
붓다는 섣부른 젊은이의 출가 판단이 부모의 반대에 부딪쳐 문제가 초래될 수 있음을 간파하고, 다소 복잡하지만 일의 순리적 방향을 선택하신 것이다. 야사는 그렇게 축복 속에 출가하게 되고, 야사의 부모 역시 이로 인하여 불교 최초의 재가신도라는 영예를 안게 된다.
올바른 인도자에 의해 모두가 행복해지는 가르침의 전도는 바로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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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현 스님 : 철학박사(율장) 및 문학박사(불교건축). 동국대 철학과 및 불교학과를 졸업하였고,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및 동국대 미술사학과 박사 졸업, 고려대 철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50여 편의 논저서가 있으며, 현재 월정사 교무국장이다. 동국대, 울산대, 성균관대에 출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