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 할리우드 스타, 리차드 기어에 대한 단상

인연 따라 마음 따라

2011-09-02     불광출판사

지난 6, 마침 연구년으로 한국에 잠시 들어갈 계획이었는데 리차드 기어의 방한과 관련해 통역을 부탁받았다. 그 인연으로 3일간 그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는 티벳불교와 관련해서 몽고에 갈 때 서울에서 비행기를 갈아탔다고 한다. 뉴욕에서 몽고로 가는 가장 빠르고 좋은 루트가 한국의 에어라인이었기 때문이다.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인천공항에서 기다리면서 한 번도 입국해 본 적이 없는 한국이라는 나라는 어떤 곳일까 무척 궁금했다고 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런 상상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본인의 사진들이 서울에서 전시된다는 소식을 접해 들었던 것이다. 전시회를 하면서 본인과 가족을 초대해 준다고 하니, 여름방학을 막 시작한 열한 살의 아들, 부인과 함께 한국으로 여행을 가기로 마음먹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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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을 출발해 서울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볼 수 있는 영화나 음악 프로그램이 많았지만, 그중 5부작 다큐멘터리 팔만대장경이 눈에 확 들어와 그것을 시청했다고 이야기를 했다. 영락없는 불자는 불자이다.
나도 바로 그전 주에 뉴욕에서 서울로 들어올 때 똑같은 프로그램이 유독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여정을 걸어가는 한 사람의 순례자
총무원장스님을 예방하고 어른스님들과 함께 점심을 하는 자리에서 그는 말했다. 본인은 한국 불교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번 기회에 많이 배우고 가고 싶다고. 그러자 총무원장스님은 조계사는 시내 사찰이라 조금 번잡한 반면, 산에 있는 전통 사찰들은 조용하고 운치가 있으니 꼭 방문해서 우리나라불교 전통을 제대로 느끼고 가시길 바란다고 화답했다.
전날 햇볕이 쨍쨍 비추던 날씨와는 다르게, 다음 날 예술의 전당’ VIP룸에서 그를 다시 만났을 때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원래는 서울진관사에서 불교TV 인터뷰를 진행할 계획이었으나, 그가 돌연 오전 일정을 취소했다. 인터뷰 장소로 들어오는 그의 얼굴은 방금 전 기자들과의 공개 간담회 때문이었는지 벌겋게 상기돼 있었고 좀 피곤해 보였다. 의자에 앉아 십여 분을 쉬고 난 뒤에야 본래의 웃음을 되찾고 평온해진 상태로 돌아와, 일대 일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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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편안한 오랜 친구를 만난 듯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할리우드 스타이지만 허세를 부리거나 결코 자만하지 않았으며, 삶이라는 여정을 걸어가는 한 사람의 순례자 같았다. 그가 나에게 한 말 가운데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다. 본인은 할리우드 스타라는 연극의 역할을 이생에서 하는 것이고, 스님은 스님이라는 배역을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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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통도사에 갈 일정이 있었는데, 그는 그 일정 역시 취소했다. 아마도 어딜 가나 따라 다니는 수많은 기자들과 팬들이 부담스러운 것 같았다. 대신 전날 가지 못했던 진관사에 소리 소문 없이 방문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가족여행을 원했는데 모든 스케줄이 공개된 상태에서는 기자들에게 기삿거리는 줄 수 있을지언정, 처음 의도한 가족과 함께하는 조용한 산사에서의 느낌은 가질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진관사에서 오후 시간을 보내면서 부인과 아들이 특히 좋아했다고 하니 그 또한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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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
한국을 떠나기 하루 전날 다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아주 편안해 보였다. 생방송 TV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도 아주 여유로워 보였고 농담도 잘 했다. 프로그램 마지막에 그가 남긴 멘트가 참 좋은 법문처럼 느껴졌다. 8세기 인도의 샨티데바 스님께서 말씀하셨던 사람이 본인의 행복을 구하려고 하면 쉽게 얻을 수 없고 또한 행복을 얻게 되어도 곧 빼앗길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행복을 구하면 분명 본인부터 먼저 행복해 지는 길이다.”라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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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프로그램을 마치고 한국 체류 마지막 일정이 어떻게 되냐고 물어봤더니, 자기가 원하는 것보다 아들과 부인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어본 다음에 결정하겠다고 답했다. 역시 가족을 챙기는 가장의 모습은 할리우드 스타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 혼자만의 결정이 아닌 가족 구성원들이 원하는 것을 해서 모두가 행복해져야 한다는 것 또한, 방금 그가 말한 샨티데바 스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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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기 바로 전에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예정돼 있던 사찰들을 방문하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는 편지를 주지스님들께 쓰고 있는데, 큰스님들 호칭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물어온 것이다. 모른 체하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통사찰을 더 방문하지 못하고 가는 점을, 그는 분명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번이 한국 문화와 또 우리나라 불교 전통에 대해 배울 수 있는 마지막이 아닌 첫 번째 계기였기를 바란다는 말과 함께, 그와 그의 가족은 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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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비서를 통해 보내온 이메일에서, 이번 기회를 통해 알게 되어서 반가웠다는 말과 함께 계획해놓은 스케줄을 변경하게 되어 정말로 미안했다는 내용을 전해왔다. 다음번에 우리나라를 찾게 되면, 부디 조용하고 편안하게 다녀가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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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민 스님 :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버클리에서 종교학을 전공하고, 하버드 대학원에서 비교 종교학 석사를 수학하던 중 출가를 결심하고 2000년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받았다. 그 후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박사공부를 하며, 연구차 북경과 오사카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현재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햄프셔 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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