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계를 향한 자유로운 날갯짓

살아있는 명법문/해인사 승가대학 강주 해월 스님

2011-07-25     불광출판사

우리 삶의 제일 큰 문제는 자신을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사실을 본 적 없이 자기 생각대로, 느낌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맹인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존을 두고 서로 자신만의 견해와 주장으로 차이와 대립, 갈등과 폭력을 불러일으키고, 그 결과는 매번 괴로움으로 나타납니다. 반면 도()란 자신을 아는 일입니다. 도를 얻는다는 것은 맹인이 눈을 뜨는 것과 같아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에 자기 생각, 견해, 주장 등 모든 것이 사라져버립니다. 즉 왜곡됨 없이 사실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도를 추구하는 수행자에게 있어 내면관조는 수행의 근간이자,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면관조가 없는 수행은 죽은 수행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초기 경전인 아함경에서는 수행하는 이들이여! 흘러간 과거를 뒤쫓지 마라. 오지도 않은 미래를 갈구하지도 마라. 과거는 이미 흘러가 버린 것,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 그러므로 현재의 일을 있는 그대로 보아라. 지금 여기에 있는 그대로 깨어있으라! 또 흔들림 없이 동요됨 없이 정확히 보고 알고 실천해야 한다.”라고 하여 바른 수행 자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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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는 게 정말 진짜일까
사람이 산다는 것은 느낌이 살아있을 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느낌보다 중요한 게 본질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든 사물이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순수한 눈[如實知見]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흔히 우리가 본다라고 할 때,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은 주와 객으로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그 갈라진 틈 사이에는 언제나 어떤 생각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대부분 문화나 민족, 환경, 혼미, 착각, 전도, 관념, 소신, 신념, 지식, 사고, 경험, 종교, 교육 등 고정관념으로부터 나온 선입견들입니다. 결국 우리가 무엇을 본다고 할 때는, 대체로 이러한 선입견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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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안다라고 말할 때, 여기에도 아는 것과 알려지는 것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체와 객체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것은, 우선 대상을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인식이 달라집니다.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보느냐 하는 방법의 차이에 의해서 알게 된 결과는 마땅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장미는 붉다라고 말하는 것은 색채라는 관점에서 본 장미의 실체이며, ‘장미과에 속한다고 할 때는 분류학상으로 본 장미의 실체입니다. 하지만 양쪽 모두 장미가 갖고 있는 한 단면을 나타낼 뿐, 장미 자체를 다 말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주객이 분리된 상태에서 알려진것은 부분적 진실일 뿐입니다. 지성에 의해서 대상을 파악하고 언어로 표현한들, 그것은 개념에 불과할 뿐 살아있는 구체적 사실로서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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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도 처음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주객으로 분리한 채 물으시다가, 마침내 주객이 일치한 상태[中道]에 이르러 자기의 참모습과 진리를 보게 되었다고 경전에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연에 따라서 만들어진 것이며, 있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무엇이든 멈추어 있는 것이 없으므로, 그 어떤 실체도 없다. 이 사실을 체득하는 일이 곧 선()”이라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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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은 구체적인 그것과 마주 하는 일이요, 본질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지성과 지식을 부정하고, 인위적인 어떠한 이물질도 거부함으로써 세계를 불이(不二)로 인식하고 체득하는 게 선이기 때문입니다. 지성의 작용이 멈추어진 무심(無心)에서 시작하여 무심에 머물고, 무심으로 모든 본질을 체득하는 것. 이러한 체득을 일컬어 깨달음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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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처럼 따가운 여름날, 무심에서 자신을 마주해 볼 일입니다. 자연의 마음인 자연심(自然心), 있는 그대로의 마음인 평상심(平常心), 때 묻지 않은 깨끗한 마음인 청정심(淸淨心)으로 돌아가 산바람 부는 언덕에 올라 서천 노을빛을 봐도 넉넉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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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한다는 건 조금씩 새로워진다는 것
삶 속에서 나눠줄 수 있는 사람,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사람, 움직일 수 있는 사람, 말하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행복한 사람입니다. 히스크리프의 품에 안겨 죽어간 캐시(폭풍의 언덕 여주인공)의 마지막 말은 나는 행복합니다(I’m happy).”였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죽어가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행복을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줄 수 있으면서도 주지 않고, 말할 수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은 마음 하나를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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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한 신도님께서 갈대를 부처님 앞에 공양 올리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산속에서는 너무나 흔한 갈대였지만, 여태껏 저는 산속에 살면서 그 흔한 마음 하나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그 신도님의 소박한 행동 하나가, 마음 한 번 일으키면 모든 것이 부처님께 올릴 수 있는 공양이 된다는 사실을 제게 일깨워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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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담배를 끊는 것은 참 쉽습니다. 술잔을 들지 않고, 성냥을 켜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습성에 빠진 우리에게 잔 하나 들지 않는 일이, 성냥 하나 켜지 않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마음을 일으키고 있는 마음을 쓰기도 어렵지만, 몸으로 실행하기는 더욱 어려운 법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을 수행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움은 항상 작은 것에서부터 일어납니다. 조금씩 자신을 바꿔가는 수행을 계속해 나간다면, 어느 순간 달라진 스스로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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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또 다른 삶을 향해 간다
제가 일본에서 유학할 때, 가난한 유학승 신분에 햇빛 드는 비싼 집을 구할 수 없어서 빛 없는 집에서 4년을 살았습니다. 그때 생각하길, 다음에는 절대로 햇빛 들지 않는 집에서는 살지 않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해인사 승가대학에서 강의하면서, 해인사 근처에 혼자 공부하는 처소 하나를 장만하고 사방을 유리로 만들어 햇살 넘치는 집을 지었습니다. 그 후 대구 동화사 승가대학에서 강의하게 되어 가끔 오고가는 형편이 되었는데, 작은 결벽증이 있는 탓에 갈 때마다 유리를 깨끗하게 닦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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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 날 처소에 도착해 보니, 많은 참새들이 집 앞에 떨어져 죽어 있었습니다. 유리가 허공인 줄 알고 날아가다가 충돌한 것이었습니다. 한두 마리가 아닌 여러 마리가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모습을 본 뒤로, 이전만큼 유리를 깨끗하게 닦지 않게 되었습니다. 너무 청결한 것도 마냥 좋기만 한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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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죽은 새들에게 미안해하며 해당화 나무 밑에 고이 무덤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집이 워낙 고지대에 있어서 그간 꽃을 피우지 못했던 해당화 나무가, 이듬해 너무나 예쁜 꽃을 피워 올린 것입니다. 어떻게 된 영문이지 궁금하여 꽃을 자세히 드려다 보았는데, 그 순간 꽃 속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 참새들아. 너희들이 해당화 뿌리로 들어가 봄날에 꽃으로 되살아났구나. 눈앞에 죽음은 죽음이 아니구나. 너희들은 죽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존재는 해체의 과정을 통하지 않고서는 새롭게 거듭날 수 없다는 사실을,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윤회하는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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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하찮은 잡초일지라도 새로운 세계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가시덤불이 타서 맑은 쪽빛을 만들고, 호랑이가 푸른 하늘 새가 되어 날 수도 있습니다. 며칠 전 신도님 집에서 죽은 백구는 개의 몸을 버리고 꽃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조그만 나비의 날갯짓이 거대한 태풍의 씨앗이 될 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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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죽음과 탄생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끝없는 해체와 탄생 속에서 잠시 서 있을 뿐입니다. 집착과 아집과 교만, 착각과 전도로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윤회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새로운 세계로 가는 과정이기에 또한 이 삶을 비관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고해 같은 삶이라 하여도, 고해 속에도 희망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마음과 행위는 새로운 세계를 열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온전히 스스로의 몸과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죽음에서 자유로울 때, 비로소 내일의 탄생도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꽃은 피고 지고 또 피듯이, 언제나 새로운 세계는 우리를 향해 활짝 열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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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스님 : 1978년 종범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해인사 승가대학 강사와 동화사 승가대학 강주, 대구불교대학 학장, 동화사 수련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해인사 승가대학 강주로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