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치 삼독심의 업보, 생태계 문제

불교의 자연과 인간관

2007-06-13     관리자
탐진치 삼독심의 업보, 생태계 문제
                                                                                  유정길
인간은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발전하려고 하고 있고, 실제로 발전해왔다. 60년대 초에 자가용을 갖는 다는 것은 특별한 몇몇 개인 외에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지금은 집은 못사 전세를 살더라도 자가용을 사는 사람은 꽤 많은 편이다.

우리나라도 60년 이후 경제발전논리를 펴왔으며 90년대에 들어서는 큰 경제적 발전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당시에 우리나라가 미국보다 20년이 뒤졌다느니 일본보다는 10년을 뒤졌다느니 하는 말이 자주 오고갔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러한 의식은 조금은 다른 형태로 현재까지 우리의 의식속에 경제발전에 대한 열망으로 깊이 자리잡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오늘날 지구적 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오존층 파괴는 반도체산업, 냉장고, 에어콘, 스프레이 등에서 사용되는 CFC가스가 주된 원인으로 되고 있다. 또한 엄청난 화석연료의 연소로 막대하게 방출되는 이산화탄소가 주된 원인은 온실효과, 그리고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1초에 축구장만한 산림이 없어져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막대한 양의 자동차의 증가로 인한 대기 오염, 산성비에 의해 산림과 토양의 황폐화, 각종 농양과 비료의 과다사용으로 인한 곡식의 오염, 토양의 황폐화는 다양하게 서로 연관성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환경파괴의 실상이다.

그러나 한번 찬찬히 생각해보자. 모든 나라가 미국과 같은 생산수준을 발전의 목표라고 생각하고 피땀을 흘리며 노력하고 있으며, 실제로 제3세계 등 많은 저개발국가들은 나름대로의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진정 미국처럼 1.8인당 1대꼴의 자동차를 전 인류가 갖는다고 생각해보자. 과연 그럴 수 있을지, 그때가 올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지금과 같은 정도로도 현재와 같은 공해와 환경문제를 일으키는데 지구 자원의 30%정도를 사용하고 있는, 미국과 같은 소비생활을 전 국가가 유지한다면, 아마 지구의 오존층은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을 것이며, 물은 말라버리고 대기오염이 극에 달하고 도처에 쓰레기가 널려 더 이상의 생존이 불가능하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인간의 발전과 행복은 과거 헝겊 기저귀를 사용하는 것에서 일회용 기저귀를 쓰는 것으로, 걷는 것에 웬만하면 자가용을 타는 것으로 생활이 바뀌는 것처럼 많은 소비가 발전의 척도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이 현대를 지배하고 있다.

헤어스프레이를 사용하면 그것이 대기중에 퍼져 오존층을 파괴하고 오존층의 파괴는 피부암을 일으키고 백내장의 유발을 가져와 곧바로 인간에게 피해를 끼치게 된다. 이러한 윤회의 연관을 모르고, 쓰레기를 버리면 나와는 관계없는 것으로, 농약을 뿌리면 자신에게 피해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의 인간의 무명(無明)이다.

‘프리초프 카프라’박사와 같은 생태주의적 과학자는 이러한 유기적 관성의 무지의 시발이, 데카르트와 같은 계몽주의 철학과 뉴우튼 등 근대 과학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데카르트의 사상은 모든 생명과 우주를 거대하고 정교한 하나의 기계로 파악하고 마치 시계가 고장나면 고장난 부속품을 청소하고 갈아끼우면 되는 것처럼 모든 생명과 자은을 정교한 기계를 분석하듯 나누고 쪼개어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한 사상적 인식이 현대를 지배하는 과학인식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가 과학을 발전시켰지만 인식에 있어서, 우주 자연적 질서와 모든 사물을 단절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나마 당시는 종교가 과학의 영역을 통제했었지만 이제는 과학 기술의 절대성이 종교의 자리까지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것이 오늘날 환경문제의 시발이라고 말하고 있다.

불교는 의보(依報-인간주체) 정보(正報-환경),불이론(不二論)이라 하여 본래 인간과 환경을 둘로 보지 않았다. 인간의 내면적 정신이 사막화되면 현실세계도 사막화가 진행되고 현실세계의 사막화는 인간정신의 황폐화를 가속시킨다.

너와 나를 구분하고,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고, 인간과 동물, 인간과 식물, 무생물을 구분하여 인간본위의 삶, 인간의 자기중심적 가치만이 지구상 유일한 가치라고 생각할 때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환경파괴와 인간간의 대립과 소외 등 생명의 위협은 시작되는 것이다.

불교는 불살생이라는 계율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뜨거운 물을 땅에 함부로 버리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인간도 악업을 지으면 동물과 같은 미물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생태학적으로 볼 때 대단히 중요한 관점임이 현대과학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자연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불교적 가르침을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뱀이 사악한 동물인가, 그렇지 않다. 뱀이 사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관념일 뿐이다. 돼지는 미련한가? 그것도 인간의 관념일 뿐이다. 토끼는 본래 귀엽고 쥐는 본래 징그러운 동물인가? 그렇지도 않다. 쥐란 동물도 하나의 동물로서 지구의 자연 생태계 속에 자기존재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인간도 자연생태계 속에서는 다른 동물과 다름없이 하나의 동물중에 속한다. 해충이라는 것도 사실은 인간 본위의 생각일 뿐이다. 본래 더럽고 깨끗한 것이 없으므로, 추하고 아름다운 것도 없다. 좋고 나쁨이 본래 없다는 가르침, 그에 근거할 때 자연을 올바르게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지나친 인간중심적인 사고와 가치가 바로 환경생태계의 파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농작물을 재배하는데 있어 해충을 죽이려 엄청난 양의 농약을 투여한 결과 일정한 효과도 있었지만 또한 반대로 해충은 강한 해충으로 자라게 되었고 또한 그를 죽이는 더 강력한 농약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예이지만 지구상에 있어 인간만이 스스로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인간이 존재하야지만이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인류로서 인간도 자연이 없으면 존재 할 수 없다. 저명한 물리학자인 장회익 교수는 자연을 가리켜 ‘보생명’ 이라 하여 하나의 생명개념으로 파악 하였다.

인간이 자연과 친화력을 갖고 동물과 모든 식물, 무생물 등을 진정 함께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야 말로 금강경의 가르침처럼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없애고 인간본위의 편견과 가치로서 자연을 대할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의 의미를 인식할 때 진정 자연과의 교합을 이루게 되며, 이러한 가치관으로서의 전환만이 오늘날 심각한 환경문제시대에 올바른 삶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암환자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에는 암으로 죽는 사람이 전체 30%를 넘는다고 한다. 이것은 그간 누적된 식품오염과 대기 환경오염 때문으로 보면 거의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암과 같은 질병은 다른 세포와 같이 상처난 부위에 적당히 세포분열하여 원상복귀될 때까지만 종식하다가 멈추는 것이 아니라, 무한정 세포증식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암
자체로 볼 때는 번영이요, 발전이지만 우리 몸 전체로 벌 때는 질병이요, 급기야 사망에 이르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지구 속에서 인간의 역할은 암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모든 생명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삶의 번영을 위해 모든 자연을 파괴하고 급기야 스스로를 죽이는 존재로서 말이다.

자동차는 그것이 없었던 과거에는 아무 불편없이 살았지만 오늘날 그것의 사용을 포기하는 것은 어려운 결단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오늘날 탐진치() 삼독심을 끊는 수행은 전 사회적으로 중요한 시기라고 새삼 느끼게 된다.

오늘날 환경문제를 푸는 길은, 욕망을 조절하고 끊어나가는 수행과 함께 환경문제를 야기시키는 집단과 기업들에 대한 집단적 대응이다. 이것만이 심각한 생태위기를 풀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유정길:현재 한국불교사회 교육원 사무국장으로 있으며 '88년 부터 「불교사상의 사회화」를 위한 교육과 연구 활동을 해오고 있다. 최근에는 「생태학」,「불교와환경문제」등의 강좌를 개설하여 환경운둥의 화산을 위한 강의, 교육 들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