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행복하기로 한다

이웃과 함께 떠나는 산사여행/강원도 홍천 수타사

2011-06-28     불광출판사

아이들이 맺어준, 친구 이상의 관계
정우야, 현석아! 바람이나 쐬고 오자
.”
. 그러지 뭐
.”
아이를 앞세우고 만난 이웃이고, 이제는 가족이나 친구같이 더불어 살아가는 지인들과 떠나는 여행의 첫 발이다. ‘어디를? ? 뭐 하러라는 물음보다는 바람이나 쐬는것에 의미를 둘 줄 아는 친한 사람들. 소심한 성격 탓에 관계 맺기가 어려운 내게, 넷이나 되는 적지 않은 아이들은 사람과의 소통에 커다란 문이 된다. 나보다 더 커버린 대학교 3학년 큰애가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만난 친구가 정우이고, 이제 초등학교 6학년이 된 셋째가 다섯 살에 시작한 태권도 학원에서 만난 친구가 현석이다. 처음이 중요하다고, 우리가 정우맘 현석맘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것도 아이들을 통한 첫 만남 때문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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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아이들은 자라서 서로에 대한 아무런 끈을 가지지 않은 눈치건만, 그 이름을 빌린 우리들은 매일을 부대끼며 정을 나누고 산다. 공동의 관심사도 처음엔 아이를 중심으로 한 모든 것일 수밖에 없었다. 학교행사는 물론이고 지역공동체의 모임이나 학원, 시장을 포함한 다양한 정보교환 등 이런저런 일들에 서로 얽히다 보니 이제는 가족을 대신할 만큼 다가와 있다. 가족, 친구, 친척 간에 차마 입에 담기 치사한, 하지만 쌓이면 폭탄이 되고 말 자질구레한 스트레스들은 이웃과 심도 있는 대화(?)를 통해 조금씩 김이 빠진다. 아이들 어린 시절은 한없이 되풀이 되고, 어제 오늘의 여러 가지 생활들을 은밀히 관찰하고 평가하는 뒷담화의 몫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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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크고 나서 정우맘은 바느질 배우느라 항상 손끝이 바쁘고, 현석맘은 새로 일을 시작해 어린이집 1년차 교사가 되었다. 멀지 않은 날 전통 바느질로 화려한 전시회를 열거나, 자신의 사랑을 원 없이 부을 수 있는 유치원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런 날을 위해 바쁜 시간만큼 휴식은 필요하고, 바람을 쐬는 일은 가장 신선한 휴식이 된다는 게 공통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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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100%, 엄마들의 공통 화두
남편이 타 준 커피와 슈퍼표 애플파이 몇 개로 차 안은 수다 방이 된다. 토요일에도 한가한 홍천 가는 국도를 달리자니 새로 생긴 고속도로가 한층 더 고맙다. 정우맘과 현석맘은 가까이 살아서 오가며 눈인사를 할 정도로 서로 존재감은 있었지만, 오늘이 첫 만남이나 마찬가지다. 나를 통해서 이야기를 많이 듣기는 했을 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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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공통점이 많다. 170센티미터를 넘나드는 큰 키와 아들만 둘씩 두었다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나와 친한 친구 이상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딸만 가진 나와는 다르게 정서도 비슷하려니 해서 크게 걱정은 안 했다. 예상대로 차를 타며 처음 인사를 나눴지만, 차에서 내릴 때는 오랜 이웃처럼 스스럼이 없다. 3을 보내는 아들 때문에 바쁜 현석맘에게, 그 시기를 경험한 정우맘과 나는 천만 번 공감 가는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 자식에 대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오직 모를 뿐이라는 공통의 화두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더불어 무언가 주고 또 주어야 할 것 같은 가족에게서 놓여난 찬란한 기쁨(?) 때문이라면 조금은 직무유기이려나
?
이 정도의 지리적인 거리만 있어도 숨길 수 없는 홀가분함이란. 아이들도 엄마와 떨어져 이런 기분을 즐기고 있을까. 모처럼의 놀토(노는 토요일)에 나들이 간다는 엄마를 흔쾌히 보내주며 기뻐하는 아이들 모습을 이야기할 때면,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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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대강 보면 뭐가 보이나

수타계곡을 끼고 수타사 앞에 차를 세우자, 따뜻한 큰집처럼 아담하고 정겨운 모습의 전각들이 보인다. 봄바람이 거셌는데 계곡 안은 바람 한 점 없다. 수타사는 공작산 기슭에 있는데, 708년에 창건된 일월사가 전신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으로 불탄 후 1636부터 끊임없이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단다. 이 과정에서 발굴된 월인석보는 국문학사에 커다란 의미를 지닌 다고 하여 보물 제745호로 지정돼 경내 박물관에서 일반인에 공개되고 있다. 17, 18 합본이 이렇게 온전한 모습으로 전해진 것은 흙으로 조성된 사천왕상 덕분이라는데, 모든 것을 살리는 흙의 생태적 모습을 재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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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을 대신한 봉황문을 들어서면 흥회루가 있는데, 이 단층누각 안에는 목어와 법고가 자리한다. 뒤이어 대법당이 되는 대적광전이 서 있는데, 비로자나불을 모신 팔작지붕의 다포집 형식이다. 밖에서 기웃거리며 대적광전을 비롯한 전각들을 둘러보는데 구경 잘 하셨는가.”라고 물으시는 스님. “아는 게 없어서. 좀 알려주셔요.”라고 했더니 나도 잘 몰라요.” 하시는 말씀에 박장대소를 하며 웃는다. 덧붙여 그렇게 대강 보면 뭐가 보이나. 들어가서 찬찬히 제대로 봐야지.”란 말씀에 다시 법당을 찬찬히 둘러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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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들어간 대적광전,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아니라 보는 만큼 보이는 걸까. 시간을 가지고 보니 새로운 여러 가지들이 눈에 들어온다. 천정에 저렇게 아름다운 천개(天蓋, 불상이나 불전을 덮는 조형물)가 있다는 걸 조금 전까지 몰랐다는 것이 부끄럽다. 수수하면서도 아름다운 닫집이 있어 고개가 아프도록 쳐다본다. 용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고, 활짝 핀 연꽃이 금방이라도 부처님의 머리로 뚝뚝 떨어질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불상 뒤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는 친구들을 보며, 부처님 전에 삼배로 오늘의 나들이에 감사와 고마움을 표한다.
절 앞으로 조성된 생태공원에는 이미 여린 생명들로 가득하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매서운 추위도 밀어낸 새싹들, 꽃들. 들꽃을 보며 산길을 걷다가 작은 잣 씨에서 솟은 여린 싹을 발견하고 그 안에 든 거대한 잣나무의 형상이 믿겨지지 않아 한참을 바라본다. 모든 존재는 이렇게 작은 것 안에 이미 다 갖추어져 있단다. 연못에는 부지런한 개구리들 덕분에 물 반 올챙이 반으로 왁자지껄하고, 더하고 덜할 것이 없다는 가르침처럼 뭍 생명들이 저마다 자기 것들로 환희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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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과 더불어 행복한 오늘은 다음 생까지 살아가는 힘
봄바람도 맞고 문화탐방도 됐다고 좋아하는 친구들. 교회와는 확연히 다른 절집의 여러 가지 것들을 인정하며 감탄하고 즐기는 모습이 넉넉하다. 사실 절집은 종교 이전에 우리의 전통문화이자 조상의 얼이 담겨 있는 그릇임을 왜 모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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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면서 온전히 나를 위한 나만의 시간을 누리고자 다짐했지만, 정작 홍천의 명물 맛있는 화로구이를 앞에 놓고는 누가 엄마, 마누라 아니랄까 봐 남편과 아이들에게 전화부터 한다. 입이 즐거우면 세상이 즐거워 보인다고 먹으면서 하는 이야기는 훨씬 더 활기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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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힘은 가슴 설레는 기대감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믿는다. 오직 내 속에서 나오는 것만이 온전히 내 것이고, 실망시키지 않는 충족감을 주리라. 행복하려고 사는 인생, 타인에게 거는 기대는 결코 보장받지 못한다. 타인을 향하되 자신을 볼 것. 내가 최선을 다 한 것을 기대하고 타인에게서 찾지 말 것.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에게 기대해야 할 것이다. 자식과 부모와 만물과 더불어 말이다. 부지런한 노력과 끊임없는 성찰로 만들어가는 자신에 대한 기대심이야말로 가슴 설레는 미래를 보장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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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한 술을 온전히 음미할 수 있는 여유와 산야를 바라보며 이름 모를 풀꽃과 자연을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는 행복이 있을 것이고, 거창하고 위대하다고 말해지는 사상이나 가치들도 있을 것이다. 어느 것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해줄까? 금강경 첫머리에 부처님께서 탁발하고 공양하시듯, 평범한 일상이 배제된 위대성은 존재치 않음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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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맞이한 넷째 딸로 인한 정서적 갈등과 스스로 정리되지 않은 감정선 때문에 명치끝이 묵직했었는데, 오늘 바람에 한층 가벼워진 느낌이다. 구체적으로 경험되지 않는 가치와 행복에 대한 높은 이상이야말로 세상살이를 벅차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이웃과 더불어 행복한 오늘은 내 노년을 포함한 다음 생까지 살아가는 힘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행복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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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숙 :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였으며, 죽기 전에 시집 한 권을 내는 게 꿈인 주부. 서울 명일동에 살며, 세 딸로 부족해 올해 아름다운 인연으로 맞이한 막내딸(5)을 키우며 새로운 사랑을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