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입에 밥이 들어간다

삶, 선(禪)과 함께 이러구러/자연

2011-05-27     불광출판사

자연은 진짜 자연(自然)이다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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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형도(1960~1989)의 시작(詩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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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고대인들은 자연이 무서워 신()을 발명했었다. 과학기술로 무장한 근대인들은 한결 만만해진 자연을 마음껏 개발하고 수탈했다. 조상들 탓에 만신창이가 된 자연을 가엾게 여기며 현대인들은 친환경을 외친다. 공포와 천시 그리고 연민.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감정은 이렇게 세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물론 세 갈래의 시선들은 어느 한 시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통시적이고 일상적이다. 야외에서 오리백숙을 맛있게 뜯어먹다가, 때 아닌 천둥번개에 질겁하고, 문득 뱃속의 짐승을 위해 묵념을 할 수도 있는 게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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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진이 휩쓸고 간 경제대국은, 경제대국이어도 비참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순순히 밟혀주고 먹여주던 땅이었다. 자연의 거대한 자유로움 앞에서 인간은 잊고 있던 경외감을 피눈물로 곱씹는다. 누군가는 재앙을 일종의 경고로 읽고 문명에 대한 반성이나 회개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봄은 저절로 온다. 특별한 지시나 요청 없이도 나무는 다시 울긋불긋한 거품을 물고, 냇물은 죽을힘을 다해 흘러간다. 자연재해 역시 그들의 복수가 아니라 그저 본능이란 생각. 남이 나를 두려워하건, 욕하고 깔보건, 아끼고 보듬건 간에, 입에 밥이 들어가는 것과 같이. 자연(自然)은 진짜 자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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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다는 낱말은 편안하다만큼이나 불편하다란 형용사와 조응할 때가 많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은 이유와 목적이 없는 상태다. 야생은 이기적이며 맹목적이다. 지금 살아있으며 앞으로도 살아가리란 것 이외의 잡념을 키우지 않는다. 살생에 명분을 대지 않고 기생에 변명을 대지 않는다. 오직 몸뚱이의 특징과 한계를 이용하고 감수하며 각자 최선을 다하다가, 병들어 죽거나 먹혀 죽는다. 그들의 죽음을 모면하기 위한 죽임은 죄악이 아닌 순리이며, 죽임을 방어하지 못한 죽음도 열패가 아닌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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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의 의미는 중의적이다. 문학에서의 자연주의는 19세기 프랑스에서 나타난 문예사조를 뜻한다. 인간고와 사회현상이 아무리 기가 막히고 극적이더라도, 최대한 중립에 서서 무덤덤하게 서술하는 기법을 일컫는다. 반면 교육과 예술 분야에서는 천진난만이나 자유분방과 같이, 자연의 밝은 면을 부각시켜 활용한다. 이른바 웰빙(Well-being)’이 유행을 타면서 자연주의의 뉘앙스는 더욱 청량하고 화사해졌으며, 이제는 대세로 굳어졌다. 상업광고 속의 자연은 맑음이거나 푸름뿐이다. ‘녹색성장을 부르짖는 인사들도 조경(造景)을 원하지 맹수를 원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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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내부에 도사린 비정과 위험을 봉인하면서, 이제 인간의 자연은 지배의 대상을 넘어 영생(永生)의 도구로 거듭난 듯하다. ‘몸에 좋은 것을 먹는 게 잘 사는 것이상의 담론을 말하지 않는 사회는 몸에 좋은 것을 더 많이 누리는 것이란 권력을 조장하고 추종한다. 하여 웰빙이란 자연으로의 복귀가 아닌 한층 심화된 인위다. 채식뷔페에서 식사를 하고 값비싼 심리치료를 받는 일은, 숲을 남벌해 정원을 만드는 것과 같다. 외려 뙤약볕 아래서 등짐을 지고 위태롭게 계단을 오르는 공사장 인부가 더 자연주의적이다. 그가 지닌 더위와 피로는 가감되지 않으며 또한 정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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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는 참새이므로 부처다?

저 참새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있다.” “불성이 있다면 어찌하여 부처님의 머리 위에 똥을 쌉니까?” “녀석에게 불성이 없다면 새매의 머리에다 똥을 싸겠지
.”
-동사여회(東寺如會), 조당집(祖堂集)


산들늪은 밀양 재약산 정상에 펼쳐진 국내 최대의 고산습지다. 높아서 이고 넓어서 이며 질어서 이다. 밟아보면 잔뜩 물먹은 솜뭉치의 질감을 맛볼 수 있다. 7,000만 년 전 화산폭발 덕분에 생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물들의 장구한 순환과 응축은 이곳을 열리면서도 닫힌 공간으로 만들었다. 물길이 드넓고 깊숙이 흐르면서 전반적인 생태 질서를 구축한 동시에, 특정한 권역에선 물길이 멈추면서 각종 돌연변이들이 양산됐다. 화전민의 자녀가 다니던 고사리분교가 1996년 폐교되면서 산들늪에서 인간은 멸종됐다. 해외 다큐멘터리에서나 접하는 파리지옥까지 서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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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사 숨 쉬는 생물도감이지만, 희귀종들을 직접 목격하긴 어렵다. 그들은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았다. 인기척을 느끼자 냅다 도망하는 고라니에게서, 경쟁과 적응은 여기서도 복잡하고 힘겨움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씁쓸한 소통의 뒤춤에서 발견한 차이점. 이성(理性)을 깨우칠 법도 할 만큼 나날이 걱정이고 사고지만, 억겁의 세월을 지나면서도 비슷한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비슷한 방법으로 먹이를 잡아먹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문명은 보잘 것 없지만, 그들의 번뇌 역시 진화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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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박하고 치졸하기 이를 데 없는 중생들이 뒤엉켜 사는 밀림은 그러나 아름답고 조화롭다. 서로가 서로를 회피하거나 괴롭히는 게 얄궂게도 상생의비결인 셈이다. 죽음과 죽임의 질서는 삶과 살림의 미덕을 도입하지 않고도 건강하다. 다만 멀리서 바라볼 때만 그렇게 보인다. 무정한 자연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뼛골 빠지게 일하다 얻은 신체적·정신적 곤욕의 총체가 인간의 역사다. 구경은 좋아도 체험은 싫은 약육강식. 혹한과 폭서를 맨몸으로 견디기에, 인간은 너무 오래 인간(人間)에 길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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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佛性)은 생명 있는 것 모두가 가진 부처의 성품을 뜻한다. 인간만의 특권도, 나만을 위한 희망도 아니다. 참새들의 사회에선 아무도 불상을 성물(聖物)로 여기지 않는다. 차라리 포식자인 새매에게 삼배(三拜)를 올리는 게 신상에 이롭다. 그게 참새다운 삶이다. 참새의 삶은 참새만이 알고 참새만이 행할수 있다. 참새가 참새로서 살며 부지런히 목숨을 부지하는 것, 그 이상의 덕행이나 귀감을 바란다면 억지고 폭력이다. 정해진 모양이 없는 본성은 비천하다고도 거룩하다고도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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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의 생존을 위한 사냥도, 자아의 불행을 돌아봐주지 않는 타자도, 어떻게든 살자고 모질게 저지르는 악덕도 결국은 불성의 작용이다. 부처님은 세상에 부처님 아닌 것이 없다고 말했다. 단지 그것그것이므로, 궁극적으로는 그저 살아있으므로 부처님이다. ‘(Cool)의 극치를 보여주는, 대자유의 전제조건은 대자비임을 가르치는 법문이다. 아쉬운 점은 비록 절대긍정의 메시지를 꾸역꾸역 인정하더라도 지긋지긋한 화두 하나는 좀처럼 소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론 간사하고 비열하며 가끔은 무지막지한 그들의 불성, 과연 나는 끝까지 견딜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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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불성
을 견디기 위해

요즘 사람들은 이 한 송이의 꽃을 마치 꿈결인 양 바라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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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전보원(南泉普願), 벽암록(碧巖錄)


육긍(陸亘)은 당나라 황제 헌종을 보필한 벼슬아치다. 지금의 감사원장쯤 되는 어사대부(御史大夫)를 지냈다. 남전 스님 문하에서 오래 공부한 그는 어느 날 승조 스님의 조론(肇論)을 연구하다가 퍼뜩 깨달은 바가 있었다. “‘천지는 나와 한 뿌리이며, 만물은 나와 한 몸[天地同根 萬物一體]’이라는 구절이 나오던데, 매우 훌륭한 말씀이군요.” 평소 친분이 도타웠던 스승을 찾아가 기어이 터득해 낸 한 소식을 으스댔다. 스님은 별다른 대꾸 없이 마당에 핀 모란꽃 한 송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위와 같이 한 마디 일렀다. 한낱 개꿈에 너무 호들갑을 떤다는, 은은한 질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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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설한 연기(緣起)는 지천에 널린 꽃처럼 생생한 현실이란 지적이다. 흔히 연기는 아름다운 지식으로 통용된다. 이웃과의 화합과 빈자에 대한자비를 추동하는 이론적 논거다. 그러나 갈등과 투쟁의 필연성을 가르치는 서글픈 진리이기도 하다. 내가 살아있는 한 너도 살아있고, 너를 줄여야 내가 늘어난다. 삶이 지속되는 한 죽음도 눈감지 않고, 사람은 죽음에서 벗어나려 온갖 번뇌망상으로 삶을 꾸민다. 몸에 병균이 퍼지면 통증을 느낀다. 고통은 나만큼이나 남도 살고 싶어 한다는 신호다. 자살 또한 죽음으로의 회귀 이전에 무엇보다 강렬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삶에 대한 애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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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간데 어디 안 가?” 꽤나 곤혹스러운 질문이다. 가장이라면 가끔 식솔을 데리고 이런저런 인문과 풍광을 관람하고 체험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으로 들린다. 국가주의적이고 ‘4인 가족에 근거한 통념이라고, 속으로 지청구를 씹는다. 자식을 두지 않기로 결심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출장이든 여행이든 똑같이 발품으로 취급하는 편이다. 출장은 발품의 금전적 대가라도 돌아오지만, 여행에 쓰는 발품엔 보상이 없다. 더구나 출장의 형식을 빌린 유람도 제법 재미가 있다. 무엇보다 별나고 맛난 것들을 구태여 찾아다니지 않아도 마음은 충분히 번잡하고 산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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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무시와 체념으로 곰삭은 마음은 외경(外境)에 둔감하다. 신비롭다는 것은 경험해보지 않았다는 것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사람의 탈을 쓰지 않았더라도 삶은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무엇에게나 무겁고 독하다. 내 삶과 비등한 무게와 독성에 공감하므로, 웬만하면 간섭하지 않고 이격(離隔)’의 윤리를 준수한다. 내가 자연에서 느끼는 유일한 경이로움은 존재론적 단순성이다. 죽음을 기념하지 않는 삶, 삶을 동정하지 않는 죽음. 살아있을 때는 살아있음만을 살라는, 가장 위대한 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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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꽃 한 송이[世界一花]’, 꽃 한 송이가 세상의 모든 이치를 품고 있다는 만공 스님의 설법이다. 만상(萬象)의 법칙뿐만 아니라 생각처럼 되지 않는 주식투자,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 등의 곡절들도 포함되겠다. 말로 아무리 으르고 달랜다고 꽃이 진실을 토해낼 리 만무하다. 스스로 꽃이 되기 전엔 꽃을 알 수 없고, 알았다손 헛것이다. 차라리 함께벌판에 서서 눈보라를 맞는 게 낫다. 행여 꽃이 감동을 받는다면 나는 건강을 위해 매일 아침 조깅을 해또는 강남의 어느 정신과 의사가 용하다더라따위의 수준을 뛰어넘는 정보를 내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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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에겐 불성이 없다?
없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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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섭 :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불교신문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길 위의 절(2009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공부하지 마라-선사들의 공부법, 그냥, 살라, 떠나면 그만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