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걷다

인연 따라 마음 따라

2011-05-27     불광출판사

서울에서 시작된 새롭고도 낯선 삶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은 나와 남동생를 데리고 더 나은 삶을 위해 지방도시에서 서울로 이사를 하셨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큰집에서만 살다가, 낮선 서울의 변두리 동네로 이사와 단칸방 집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하니 처음엔 많이 힘겨웠다. 그 전까지만 해도 가족의 범위가 부모님을 비롯한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삼촌, 사촌 형들과 누나들 그리고 종종 방문하는 친지들로 넓었는데, 서울에 오니 좁아진 집만큼이나 주변에 서로를 챙겨주는 가족들이 없다는 점이 나를 많이 외롭고 긴장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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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좋은 점도 있었는데, 엄마와 시간을 더 많이 보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서울로 이사 오기 전 엄마의 모습은 결혼 초부터 시작된 시집살이로 인해 그리 편해 보이지 않으셨다. 시부모님 눈치를 봐 가면서, 그 많은 가족들을 위해 집안일을 해야 했으니 항상 바쁘셨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 나는 엄마보다 더 행복해 보이고 시간 여유가 많았던 고모나 삼촌과 시간 보내는 것을 더 즐겼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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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도 처음 몇 년간은 서울생활에 많이 긴장하셨는데, 특히 평생 집안 살림만 하셨던 엄마는 예전보다 시간적으로는 더 여유로워졌음에도 서울생활을 특별히 즐기지는 못하셨던 것 같다. 대신 나와 동생이 학교에서 돌아올 때쯤이면 항상 간식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셨는데, 그것이 아마 엄마의 낮 시간 동안 가장 큰 소일거리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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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의 장보기
간식거리가 떨어지면 엄마와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걸어서 이십 분정도 떨어진 시장에 갔다. 시장에는 새로 생긴 큰 슈퍼마켓이 있었는데, 동네 구멍가게와는 달리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신기한 물건들이 많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렇게 엄마와 함께 슈퍼마켓으로 장을 보러가는 시간을 무척이나 기대하고 기다렸던 것 같다. 엄마와 같이 장을 보러 걸어가는 동안 오늘 하루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할 수 있었고, 엄마와 단둘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엄마를 도와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올 수 있다는 것이 장남으로서 뿌듯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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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집에서 얼굴을 보면서 생활을 하지만, 그 가족 구성원 중 어느 누구와 밖에서 따로 만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준다. 특히 나이가 어린 아이들의 경우 부모님 중 한 분이 밖에서 아이들과 만나 함께 무언가를 하면서, 아이의 말을 관심 있게 잘 들어주는 것이 아주 특별한 추억으로 남는다. 지금은 누가 나더러 쇼핑을 같이 가자고 하면 손사래를 치면서 도망을 가지만, 어렸을 땐 엄마와 슈퍼마켓을 돌면서 물건들을 구경하는 것이 상당히 재미있었다. 아마도 슈퍼마켓의 화려함이 당시 비교적 어려웠던 생활을 잠시 잊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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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은 외국 영화에서 봤을 법한 신기한 먹거리가 종종 눈에 띄었다. 나는 서슴지 않고 그 음식을 구입하자고 졸랐는데, 엄마는 다른 것들보다 약간 더 비싼 가격이라도 보통 그 음식을 구입해 주셨다. 한번은 그 슈퍼마켓에서잉글리시 머핀 빵을 처음으로 봤는데, 어떻게 먹는 것이지 몰랐지만 무조건 샀던 기억이 있다. 그저 소보로 빵처럼 달짝지근하고 맛있을 거란 생각으로 산 잉글리시 머핀은 토스트를 한 후 잼이나 버터를 발라 먹어야 했는데, 일반 빵처럼 차갑게 먹으니 참 맛이 없었다. 또 한 번은 레몬을 사서 집으로 가지고 와 귤처럼 까먹으려고 하다가 잘 까지지도 않고 맛도 너무 시어서 그냥 버렸던 기억도 있다. 물론 개중에 성공한 케이스도 있었다. 팝콘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옥수수 재료를 사다가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러 팡팡 튀겨진 팝콘을 동생과 같이 먹었을 때는 참 맛있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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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했던 봄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렇게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진학하자 부모님은 단칸방 생활을 정리하고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옮겼다. 자연스럽게 엄마와 같이 장보러 다니던 시간도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다행히 엄마는 수영과 같은 운동을 통해 더 이상가족들을 위한 삶이 아닌 엄마만의 삶을 찾으셨다. 결혼 전 해군을 나오신 아버지의 수영 실력에 반하셨다고 하셨는데, 막상 수영을 몇 년째 배우시고는 아버지 수영 실력이 기본기 없이 동네 도랑에서 막 배운 것인 줄 그제야 알았다고 말씀하시는 통에 배꼽을 잡고 웃었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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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승려로서 삶을 깊게 관조하고 글을 통해 나를 탁마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싶은 뜻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난 20년간 외국에 나가 살면서 제대로 부모님께 소식을 전하지 못한 아들로서의 미안함도 스며있다.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나의 글이 한편 한편 올라왔을 때, 엄마는 승려가 되어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는 아들의 소식을 편지 기다리듯 기다리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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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둘을 데리고 아는 이 없는 서울로 처음 상경하셨던 부모님. 어느덧 내가 그 시절 부모님과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일요일 법회가 끝나고 뉴욕 사찰의 마당에서 놀고 있는 초등학생 어린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엄마와 장보러 같이 걸었던 행복했던 봄날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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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민 스님 :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버클리에서 종교학을 전공하고, 하버드 대학원에서 비교 종교학 석사를 수학하던 중 출가를 결심하고 2000년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받았다. 그 후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박사 공부를 하며, 연구차 북경과 오사카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현재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햄프셔 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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