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에서 소일하다

문학 속에 비친 산사(山寺)/조정래 『태백산맥』

2011-05-27     불광출판사

예부터 매화에는 네 가지 귀한 것이 있다 하여 관상의 기준으로 삼았다.
첫째는 함부로 번성하지 않아 그 희소함이 귀하고
둘째는 어린 나무가 아니라 늙은 줄기의 모습이 귀하고
셋째는 살찌지 않아 홀쭉 마른 것이 귀하고
넷째는 활짝 핀 꽃이 아니라 갓 피어난 꽃 봉우리가 귀함이다
.
-남송 범성대가 쓴 매보
중에서





2008
년 늦가을 여수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벌교로 향했다.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문학관 개관식 행사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책 한 권에 선생님의 싸인을 받고 사진 몇 장을 찍었다. 그날 점심은 벌교에서 꼬막정식을 먹었다
.
이듬해 봄, 한미사진 미술관에서 서해안개인전을 마치고 처음으로 남해안으로 향했다. 구례 산수유마을을 둘러보고 화개장터를 지나 광양 매화마을에 도착했다. 지고 있던 매화를 보고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내 머릿속에 있던, 고고한 자태로 겨울을 뚫고 눈 속에서 피는 매화가 아니었다. 실망감을 안고 남해로 향했다. 그날 늦은 오후 지인으로부터 한 통의전화가 왔다. “선암사 매화가 피었데요
.”
다음날 이른 새벽 공기를 뚫고 선암사에 도착한 우리는 승선교를 보고 강선루를 지나 일주문을 거쳐 무우전 옛 돌담길에 수줍게 핀 선암사 매화와 마주했다. 그렇게 만났다. 함께 간 일행들은 열심히 셔터를 눌러댔지만,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전 한 때를 보내고 그들은 벌교로 향했다. 홀로 남은 선암사에서 하루 종일 유유자적 소일하였다. 그 후 선암사선암사 매화에 푹 빠진 나는 봄만 되면 무엇에 홀린 듯 선암사를 찾게 되었다
.


사철 맑은 물이 촬촬 흘러내리던 개울, 물에
 비치는 그림자까지 합치면 보름달 같은 원이 되던 두 개의 쌍둥이 다리 승선교
, 햇살이 스밀 수가 없도록 울창하던 길고 긴 숲길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본존불, 겨울 새벽의 냉기 속을 슬픈 울음이듯 끝없이 울려 퍼지던 쇠북소리 젊은 날의 기억들을 보듬고 있는 선암사의 모든 것들이 시간의 먼지를 털며 되살아나고 있었다
.
-조정래 태백산맥3





꽃들은 누구에게 후대를 받는 일이 없이, 그렇다고 박대를 받는 일도 없이 가난한 초가삼간이 대부분인 농가의 유일한 치장물로 꽃피움을 하고는 제 계절을 무심한 듯 살다가 갔다
.
-조정래 태백산맥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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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순 : 뒤늦게 사진에 뜻을 두어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 사진디자인과에 입학했다. ‘대동여지도-계획의 첫 출발인 백두대간(1999-조흥갤러리)’을 시작으로 한강(2005-노암)’, ‘서해안(2008-한미사진미술관)’ 등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지금도 남도의 땅들을 밟으며 대동여지도-계획을 이어가고 있으며, 현재 남해안을 작업 중이다. 2007년송은미술대상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성곡 미술관에서 ‘Paradise in Seoul’로 개인전을 가졌다. 경기도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송은문화재단 등에 작품이 소장되었으며 국내외에서 활발한 전시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