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세상을 향해 일어서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부처님의 참모습

2011-03-25     자현 스님

불교 최초의 불탑
불교 역사상 최초의 신자가 되는 제위·파리는 ‘불교 발우의 기원’ 이외에도 ‘불탑의 시원’과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불탑의 기원은 붓다의 열반을 기점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와 함께 전개된다. 따라서 붓다에게 성도 이후의 삶은, 시작부터 끝까지 탑과 함께한 열반의 고요한 자취였다고 하겠다.

 

붓다께서 제위·파리에게 설하셨다는 가르침은 『제위파리경』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경은 『화엄경』처럼 최초의 경이라는 상징을 확보하기 위해서 후대에 차용된 것이다. 사실 다른 제자들이 들어줄 수 없는 상황에서, 상인들에게 전한 가르침이 후대로 유전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제위·파리는 분명 인류의 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찬란한 빛의 현장에 존재했던 복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깨달음의 가치를 담은 불탑

불탑이라고 하면, 흔히 붓다를 화장한 뒤 수습된 사리를 모신 사리탑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불탑에는 조발탑과 같이 붓다 신체의 일부를 안장한경우도 있다.

오늘날 사리라는 개념은 화장 시에 발생하는 구슬과 같은 결정체를 지칭한다. 그러나 이것은 후대에 변형된 개념일 뿐이다. 초기의 사리는 붓다의 신체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도 쓰였으며, 화장 후 남은 뼈 조각과 같은 것을 아우르는 보다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조발탑과 같은 경우도 불탑, 혹은 사리탑이라고 해도 큰 문제는 없다. 또한 6조 혜능 스님이나 구화산의 김교각 스님처럼 수행의 결과로 전신이 썩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는 경우를 ‘전신사리(全身舍利)’라고 칭하는 것도 능히 가능한 일이라고 하겠다.

이 외에도 불탑의 종류에는 붓다께서 친히 사용하시던 발우나 지팡이 등을 모신 것도 있다. 이는 사리탑이라기보다 붓다를 추모하는 기념탑이라고 할 수 있다. 붓다를 그리워하는 민중의 바람이 붓다의 물건이라는 상징적 도구에 투영되어 가치승화를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불탑이나 사리탑이라고 하는 것은 붓다의 육체와 관련된 종교적인상징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붓다의 육체가 하나의 상징물로 자리할 수 있는 것은, 그곳에 깨달음이라는 정신적인 가치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붓다의 육체는 깨달음을 담고 있는 그릇인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에서, 붓다의 정신을 상징하는 경전을 봉안하는 경탑이 후대에 발생하게 된다. 경탑의 발생은 ‘물질적인 사리의 숫자적인 한계’와 ‘경전의 서사(書寫)’라는 두 가지의 문화배경 속에서 기원후에 발생한다. 초기 경탑에는 연기게송(緣起偈頌)이 봉안되고는 하였다. 이를 통해서, 당시 승단에서도 붓다 깨달음의 핵심을 연기법으로 파악했음을 알 수가 있다.

범천의 간청과 인간의 군상

정각 후 깨달음을 반조하던 붓다에게 마지막 7주째 일어나는 사건은 불교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 중 하나이다. 소위 범천권청(梵天勸請)이라고 하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붓다는 수행 완성자에서 비로소 교사로 전환하게 된다.

그리스 신화가 크로노스라는 창조자와 제우스라는 신들의 왕에 의한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인도 신화도 범천(조물주)과 제석천(하느님)이라는 이중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그리스 신화에서 크로노스는 제우스에게 극복되지만, 인도 신화에서 범천과 제석천은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

이 사건은 정각을 성취한 붓다가 중생들에게 설법을 해야 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브라흐만(범천)이 나타나 간청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논리적인 층차가 다른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을 모르는 타자에게 가르쳐 준다는 것은 답답하고도 귀찮은 일이다. 더구나 그것이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자각과 관련된 문제라면, 그것은 더욱더 난해한 측면을 내포하게 된다.

어려운 여건에서 자수성가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동정심이 적다. 자신이 피나는 노력을 통해서 어려움을 극복했듯이, 다른 사람들도 더 많은 노력을 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문제가 삶의 현실에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극복해야겠다는 그 사람의 정신자세에 있다고 보기 쉬운 것이다. 붓다 역시 이러한 생각을 했을 수 있다. 이때 각성의 존재로 등장한 것이 바로 브라흐만이다.

브라흐만은 연못에서 자라는 연꽃의 비유를 들어 붓다에게 가르침을 설해주실 것을 간청한다. 이때부터 불교의 상징으로서 연꽃의 가치는 시작된다.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의 청정성은 중생에 오염되지 않는 붓다의, 교사로서의 삶에 다름 아닌 것이다.

세상을 향해 외치는 사자후

연못에 연들이 있는데 어떤 것은 수면 위로 솟아올라 꽃이 피고, 어떤 것은 진흙바닥을 전전하다가 피어보지도 못하고 끝이 난다. 또 그중에는 수면근처까지 올라와 있는 연들도 있다. 이러한 연들은 조금 더 좋은 조건 속에서 보살핌을 받으면 수면으로 올라오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그냥 썩고 만다.

첫째 연과 같은 경우는 붓다의 가르침이 필요 없는 사람들을, 그리고 둘째는 붓다의 가르침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사람들을 나타낸다. 따라서 브라흐만은 붓다께 이 중 셋째 연과 같은 사람들을 위해 가르침을 설해주실 것을 간청하게 된다. 이러한 비유는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유학자 정현(鄭玄)의 성삼품설(性三品說)을 상기케 한다. 이 설은 인간들의 본성을 상·중·하의 세 가지로 구분하는 것이다.

후일 대승불교는 모든 중생이 붓다가 될 수 있다는 평등성을 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인 관점에 의한 것이지 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생명은 동등한 존엄성을 가지지만, 인간과 동물의 생명이 결코 같을 수는 없다. 또한 같은 인간끼리도 얼굴이나 키, 나이, 능력에 따른 차이 등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듯 평등과 차별이 동시에 존재하는 문제를 후일 유식(唯識)사상에서는 “이불성(理佛性)에는 차이가 없지만, 행불성(行佛性)에는 차이가 없을 수 없다.”는 말로 설명한다. 다시 말해 존재의 차별은 없지만, 현상적인 차이는 엄존한다는 말이다.

붓다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려고 서원을 세우신 분이다. 그럼에도 모든 중생을 다 깨닫게 할 수는 없으며,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밝은 햇빛도 깊은 동굴에는 미치지 못하고, 대지를 적시는 단비도 뒤집어진 그릇에는 물을 채울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브라흐만의 간청은 붓다의 자비심에 대한 주의환기이다. 이로 인해 붓다는 마침내 세상을 향해 다음과 같은 사자후를 외치게 된다.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으니, 귀 있는 자는 들어라. 낡은 믿음을 버려라, 이제 너희들을 위해감로의 법문을 설하리라.”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

오늘날 모든 못이 연못이라고 불릴 만큼 중국문화권에 있어서 연꽃이 보편화된 것은 1차적으로는 불교의 영향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유교문화를 거치면서도 이것이 변함없이 유지된다는 것은 일견 납득하기 어렵다. 기실 여기에는 신유학(新儒學)의 시조인 주돈이의 연꽃 사랑이 작용하고 있다.

주돈이는 중국 여산(廬山)의 염계(濂溪)라는 시냇가에 살던, 불교를 좋아한 유학자이다. 주돈이는 연꽃을 일컬어 ‘꽃 중의 군자[花中君子]’라고 칭하며, 이를 사랑하는 글인 「애련설」을 짓기에 이른다. 이 글은 매우 유려한 명문으로 『고문진보(古文眞寶)』 「문편」에 수록되어 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결과적으로 연꽃은 불교와 주돈이를 통해서 모란과 더불어 중국문화권의 대표적인 상징과 문양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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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현 스님
철학박사(율장) 및 문학박사(불교건축). 동국대 철학과 및 불교학과를 졸업하였고,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및 동국대 미술사학과 박사 졸업, 고려대 철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약 50여 편의 논저서가 있으며, 현재 월정사 교무국장으로서 동국대, 울산대, 성균관대에 출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