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도 호떡이고 호떡장사도 호떡이다

삶, 선(禪)과 함께 이러구러/교육

2011-03-25     불광출판사

사람답다면 사람다움을 입증하라

“아직도 날 … 노비로 생각하는가.”(송태하)
“세상에 매여 있는 것들은 말이야, 그게 다 노비란 말씀이지.”(이대길)
-드라마 ‘추노’ 최종회

서울 동북부의 빈촌에 위치한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녔다. 학창시절 추억을 휘저으면 경쟁과 피로, 부당과 폭력만 주걱에 걸린다. 학문의 전당? 병영에 가까웠다. 무언가를 배우기에 앞서 관리됐고, 무언가를 깨우치려면 십중팔구 맞아야 했다. 지금의 ‘갇혀있음’이야 그나마 임금이란 보상이라도 있다. ‘내신’ 때문에 등교했고 교칙을 위해 존재했다. 시험과 진학을 위한 지식은수업보다 문제집에서 더 많이 얻었다. 독서실에 무문관(無門關)을 쳤고, 팔자에 없던 시를 쓰기 시작했다. 사람을 풍경 이상으로 취급하지 않았고, 자의식으로 철탑을 쌓던 면벽의 세월이었다. 오늘날의 자아정체성은 그때 상량(上樑)됐다. 반골의 출발점이었고 철학의 진원지였다. 동시에 현실과 운명의‘등치(等置)’에도 능한 편이다. 무력한 나를 아끼지만, 무력해서 잘 믿지 못한다. 갖은 고생 끝에 대학 문턱을 넘을 때, 마음에 한 가지 집히는 것이 있었다. 나를 가르친 건 팔할이 나였다.
지난해 우리나라 의료진과 중고생들의 국제구호활동 취재를 위해 캄보디아에 다녀왔다. 출발 전날부터 말라리아 예방약을 먹어야 했다. 12월말인데 한여름 날씨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변방이었다. 전기와 수도가 없었고 아이들은 맨발이었다. 7박8일간 봉사단은 맨밥에 반찬 한두 가지로 끼니를 때웠다. 특식으로 컵라면이 나오는 수준이었다. 어둡고 목마른 땅이었지만 아이들은 고향을 욕하거나 서러워하지 않았다. 한국인 손님들은 가난에 연연하지 않는 그들의 웃음과 활기를 흔쾌한 마음으로 함께 즐겼다. 기사의 제목을 ‘베풀러 왔다가 오히려 배우고 갑니다’라고 뽑았다. 기억할 만한 명랑, 명심할 만한 청순이었다. 어느 인솔교사의 한 마디도 지금껏 귓전을 맴돈다.
“고3 올라가는 애들 한 달 과외비가 줄잡아 400만원입니다. 해외봉사로1주일 치 수업을 빠지게 되면 100만원을 손해 보는 거죠. 참가비 100만원까지 포함하면 도합 200만원이 깨지는 겁니다. 자녀를 여기에 보낸다는 게 부모 입장에서는 진짜 쉽지 않은 일이에요.”
정부가 발표한 2010년 초중고생 사교육비 규모는 20조 9,000억원이다. 서울시의 한 해 예산과 맞먹는다. 시민 전체가 오직 사교육만 받거나 사교육으로만 먹고 산다는 의미다. 전국의 학원 강사는 30만8,219명. 출생부터대학 졸업까지 자녀 1인당 평균 양육비 총액은 2억 6,204만원이며, 부모들은 이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인 23%를 사교육에 쓴다. 자식을 위한 사교육인지 사교육 종사자들을 위한 사교육인지 파산을 위한 사교육인지 종잡기가 어렵다.
하긴 교육도 하나의 서비스업임을 인지하면 온갖 폐해를 선뜻 납득할 수있다. 한 인간의 실력과 인격을 계량화해 산술적 가격을 부여하는 일이 대세인 사회에서, 사람답게 살려면 자신이 사람답다는 걸 입증해야 한다. 스스로 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안 되면 주변의 도움을 빌려야 한다. 교육은 사회경제적 사람다움을 돕기 위한 수단이자 비용이다. 귀한 도움일수록 비싸다.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하다 혹은 생명은 값을 매길 수 없다는 호소는, 생업의 현장에서 외면받기 십상이다.



‘쩐’과 ‘쯩’에 대한 사회적 합의

“어떤 것이 부처와 조사를 뛰어넘는 말입니까?”
“호떡!”
-운문문언(雲門文偃), 『벽암록(碧巖錄)』 제77칙

이제는 공부도 매매가 가능하다. 공부를 한다는 긍지, 공부로 얻은 역량보다 공부를 했다는 증거가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세태다. 이른바 ‘스펙’이 능력의 우열을 구분하는 주된 잣대로 등극했다. 구직자들은 자신이 훌륭한 인재임을 알리기 위해 이런저런 학위와 자격증을 딴다. 더러는 사거나 조작한다. ‘쩐(錢)’이 ‘쯩(證)’을 낳고 ‘쯩’이 ‘쩐’을 낳는다는 인식은 바야흐로 사회적 합의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서류상의 아무개가 아무개의 진면목이다. 공부를 했다는 증거는 증거에 걸맞은 인생도 설계해준다. 이력서의 두께와 증명서를 발급해준 기관의 위상에 준하는 직업과 취미, 결혼 등을 지정해준다. 당사자들은 그간 쏟아 부은 땀과 돈이 아까워서라도 순순히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게임의 법칙을 기꺼이 확산시키고 세습하면서 체제는 한결 단단해지고 반듯해진다. ‘서울대 나온 사람은 호떡장사를 해도 잘 한다’와 ‘서울대 나온 사람은 호떡장사를 하면 안 된다’는 명제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운문 선사는 호떡을 입에 달고 살았던 인물이다. 물질로서의 호떡을 즐겨 먹었고, 언어로서의 호떡을 주제로 자주 설법했다. 호떡을 씹으며 중얼거린 “천신(天神)의 콧구멍을 물어뜯는다.”는 말에는 재치와 기백이 번뜩인다. 제자가 자신의 불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끙끙 앓으면 “호떡 값을 되돌려 달라.”며 다그쳤다. 당신이 애용한 ‘호떡’은 평상심(平常心)에 대한 환기(喚起)로 들린다. 깨달음을 묻는 질문에 밥그릇이나 닦고 차나 마시라던 조주종심(趙州從諗) 선사의 대답과 맥락이 비슷하다. 분별과 편견을 걷어내면 만물은 있는 그대로 균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뜻이고, 모든 현상을 긍정하되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곧 운문 선사에게는 천신도 호떡이고 불성도 호떡이다. 서울대도 호떡이고 호떡장사도 호떡이다. 눈에 밟히고 발에 차이는 것은 전부 호떡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밀로 만든 호떡과 쌀로 만든 호떡, 설탕을 넣은 호떡과 벌꿀을 넣은 호떡은 엄연히 다르다고? 천만의 말씀 만만의 호떡이다.
직지(直指)는 선사들의 일관된 교육법이다. 문자와 관념을 거치지 않은, 본성으로의 투관(透關). 유려한 장광설 대신 고함을 지르고(임제할), 번듯한 프레젠테이션 대신 몽둥이를 날리며(덕산방) ‘제정신’을 촉구했다. 이런저런 교육을 통해 이것저것을 배운다지만, 정작 우리가 아는 것은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어휘와 개념일 뿐이다. 대충대충 알면서 다 아는 척 너스레를 떤다. 하긴 남들 앞에서 체면을 세우고 세상을 입맛대로 이용하기엔 그 정도 지식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언어는 말이 되는 것에만 간섭할 수 있을 따름이다.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왜 나는 나여야 하는지… 말이 되지 않거나 말로 풀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말문을 닫는다. 조사선(祖師禪)이란수중에 쥔 ‘쩐’과 ‘쯩’의 수량과 재질로 인간의 됨됨이를 평가하는 ‘매트릭스’ 밖으로의 탈주다. ‘깨달음’이란 글자에 깨달음은 없다. ‘틀림’에 현혹되지 말고 그저 ‘다름’을 보라. 승패(勝敗)가, 진위(眞僞)는 아니다.

영웅호걸이 무위진인은 아니다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에 초점을 맞추어 언제나 배고픈 아귀가 되지 말고, 자신이 갖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만족하고 넉넉하게 부자로 살아라.
-여천무비(如天無比), 『임제록 강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에 대한 ‘창조적’ 해석의 결말이다. 임제의현 선사의 유명한 법어는 으레 ‘어떠한 상황에서도 중심을 잃지 말고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살라’는 권고로 풀이된다. 어떤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하건, 스스로를 신뢰하며 당당하게 나아간다면 ‘거기’와 ‘그것’이 비할 바 없는 진실이란 격려다. 말은 좋다만 그게 가능할까, 오래도록 불편했던 화두다. 보람과 영광의 순간보다는 나를 믿지 못해 주눅이 드는 상황이 훨씬 잦고 길다. 더욱이 자존(自尊)은 권력이다. 누구나 삶의 주인이고 싶으니까, 이기고 싶고 누리고 싶으니까, 그 자신에도 그의 이웃에도 안팎으로 바람 잘 날이 없는 것이다. 무엇에 대한 그리고 무엇을 위한 나에 대한 관심과 갈애는 얼마나 나를 지치게 하고 못쓰게 하는가. 대자적(對自的) 존재에 대한 치유로서의 즉자(卽自). 작주가 그대로 개진이다. 지금 내가 있다는 것은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절대적이고 우주적인 사건이다. 구태여 사람답지 않아도.
그저 살아있음을 살아있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이 되라고 가르치는 학교는 없다. 교육의 과잉은 겉으로 드러나는 삶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남들에 뒤질까 어학연수를 보내는 부모 밑에, 남들 보라고 명품을 지르는 자녀가 있다. 학부모들은 입시정보와 함께 불안감과 열등감도 교환한다. 진학전문가들은 학생의 인성마저도 비싸게 팔릴 수 있는 인성으로 짜맞춰준다. 내가 그랬으니 혹은 내가 그러지 못했으니 자식이라도 합법적으로 약탈하고 군림해주길 바라는 심리는, 탐욕 이전에 현실이다. 부모를 잘 만나는 것도 하나의 ‘능력’으로 간주되는 시대라면, 교육의 형태는 결국 물량공세이거나 치킨게임이 될 수밖에 없다. 갈수록 순수하고 정직한 공부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윤 창출을 위한 비용이 들고, 차별화를 위한 기술이 낀다. 어느 현자(賢者)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설령 무상교육이 실현되더라도 사교육의 질주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교육은 이념이나 윤리 이전에 시장(市場)이다.
선사들은 능청의 달인이요 딴말의 지존이지만, 상당법문을 할 때만큼은 곧잘 말 같은 말을 했다. 상당법문이란 대중 앞에서의 훈시를 일컫는다. 불법의 요지에 관한 공식적인 발언이므로, 조사들의 어록 첫머리는 무엇이나‘상당(上堂)’이 차지한다. 일정한 논리와 화술을 갖춘 연설이지만, 비법이나 도술을 일러주는 내용은 아니다.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들 각자가 부처이니 굳이 뭘 배우려하지 말라’는 게 천편일률적인 주제다. 때 되면 배고프고 졸린 것 이상의 신비란 이 세상에 없다며,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 이상의 기적을 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자신의 바깥에서 구하는 것은 그게 학문이나 선행이더라도 죄다 도둑질이니, 주어진 일상 곧 주어진 진실에 몰입하라는 게 교육의 전부다. 무엇이 되겠다 또는 어떻게 살겠다는 욕망을 빨아먹고, 부풀려서 또 빨아먹는 세간의 사교육이 들었다면 매우 언짢았을 소리다. 그대 아직도 남은 꿈이 있어 가뜩이나 녹초가 된 삶에 또 다시 숙제를 내주는가. 살아있으면, 그냥 살아있어라.

자족. 내성(耐性)을 넘어 본성(本性)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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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섭 :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불교신문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길 위의 절』(2009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공부하지 마라-선사들의 공부법』, 『그냥, 살라』, 『떠나면 그만인데』 등의 책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