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업을 이루기 위해 이 밥을 받습니다”

알쏭달쏭 불교생활탐구/사찰의 공양

2011-03-25     불광출판사

수행의 연장선에서 이뤄지는 공양 시간
장삼 위에 오조(五條)가사를 수하고, 큰방에 대중이 어간(御間, 불상을 모신 맞은편 중앙)에서부터 하판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둘러앉아 공양을 하는 모습은 매우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네 개의 발우를 펼쳐 밥과 국 그리고 반찬을 담고, 가장 작은 발우에는 나중에 발우를 씻을 물을 담아놓고 죽비 소리에 맞춰 다함께 공양을 시작한다. 보통 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 서로 담소를 나누며 식도락을 즐기기도 하지만, 사찰의 공양 시간은 그대로 수행의연장선에서 이루어진다. 조용히 묵언을 지키면서 음식을 씹는 소리마저 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원래 공양(供養)이란 범어 푸자나(Pujana)의 번역으로 불·법·승 삼보(三寶)나 스승, 부모 또는 죽은 망자의 영혼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식사하는 것도 공양한다고 말한다. 이는 시주하는 사람이 올린 공양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쓰는 말이다.
이 공양에는 여러 가지 불교정신이 깃들어 있다. 우선 음식이 모두 채식으로 준비된다. 불살생(不殺生)을 계율의 제 1위에 두고 있는 불교에서는, 대승계율이 나오고부터 간접적인 살생도 용납하지 않게 되었다. 육식을 하는 것을 간접적인 살생으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대승의 계율을 설해 놓은 『범망경』에 보면 “고기를 먹지 말라.”는 계율 조목이 나와 있다. 그러나 소승계에는 고기를 먹지 말라는 조문이 없기 때문에 남방불교에서는 육식을 허용하고 있다. 대승불교인 한국불교의 전통 가운데 하나는 승가에서 채식을 해왔다는 점이다. 이는 남방불교의 오후불식 사례와 같은 한국불교만의 특별한 전통이라 할 수 있다.
발우를 펼 때부터 대중이 함께 게송을 읊으며, 공양이 끝날 때까지 네 번의 게송을 읊는다. 수저를 들기 전에 읊는 게송의 마지막 구절은 “몸이 마르는 것을 막아 도업을 이루기 위해 이 밥을 받습니다.”이다.



“춥고 배고플 때 도심(道心)이 일어난다”
70년대 초반만 해도 절에는 먹을 것이 부족했다. 강원에서 학인으로 생활하는 동안은 더욱 공양하는 것이 힘들었다. 큰방에 공양시간이 되면 밥통과 국통을 들여오고 찬상을 운반하는 일이 하판에 앉은 강원 하반들의 몫이었다. 여기에 천수물(발우를 씻는 깨끗한 물)을 돌리고 퇴수그릇을 돌리는 것 역시 하판의 몫이다. 이런 일에 신경을 쓰면서 공양을 하다 보니 밥 먹는 시간이 부족해지기 일쑤였다. 하판에 앉아 있는 몇 사람은 항상 죽비 소리에 맞춰 일어나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발우에 밥을 적게 받는 수밖에 없었다. 발우에 받은 밥을 먹기 시작하면 음식을 남길 수가 없기 때문에, 시간에 쫓기지 않기 위해서는 밥을 적게 받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판을 면해도 젊은 나이의 학인들은 절집 음식에서 영양 결핍을 느끼기가 예사였다. 그럴 때마다 항상 기다려지는 날이 있었다. 바로 한 달에 두 번씩 행해지는 삭발하고 목욕하는 날이었다. 이날은 사중에서 특별히 찰밥을 하고 미역국을 끓이며 김을 나눠준다. 이날이 되면 잔치음식을 얻어먹은 것처럼 배가 부르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었다. 마치 모두가 생일 밥을 얻어먹은 것 같은 즐거움에 젖기도 했다.
봄이 되면 모든 대중이 산으로 나물을 뜯으러 가곤 했다. 이것은 매년 하는 연례행사 중 하나였다. 전 대중이 산속으로 들어가 하루 종일 나물을 뜯어와 후원 앞마당에 풀어두면 나물 무더기가 마치 산더미만 하였다. 이것을 말려 저장해 놓고 일 년 내내 국거리, 반찬거리로 써야 했다.
공자는 『논어』에서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베개 하고 누웠으니 그 속에 즐거움이 있다(飯疎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고 하였지만, 수행이 익어져 안빈낙도를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 전에는 먹을거리 부족에서 오는 힘듦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요즘은 결제기간이 되면 신도들이 선방의 정진하는 스님들에게 대중공양을 올리러 가는 풍습이 있어, 옛날에 비하면 그래도 사정이 많아 좋아졌다고 할 수 있다. 경제가 어려웠던 시절에는 절에도 먹을 것이 부족하여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그런 가운데도 신심이 크게 일어나 밤샘기도나 단식을 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춥고 배고플 때 도심이 일어난다(飢寒發道心).”는 말처럼 실제 가난했던 시절에 수행의 정신이 더 나았던 것 같다. 법당에 들어가 밤샘기도를 하는 경우가 흔히 있었고, 또 1주일이나 2주일 단식을 하는 예들도 가끔 있었다. 성도절 즈음한 무렴에는 대중이 1주일을 용맹전진하여 잠자는 시간을 없애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개중에는 1주일을 정하여 잠자지 않는 것과 단식을 병행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면의 깊은 체험을 위한 단식
불교의 수행은 무엇보다 내적인 체험을 중요시한다. 머리로 하는, 지식으로 하는 수행이 아니라 온몸으로 하는 실천적인 체험이 있어야 한다. 안으로 증득하는 내적 체험에 의해 수행이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때문에 건강을 위해 단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내면적인 깊은 체험을 해보기 위해서 단식을 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단식을 한 뒤에 조리를 잘못하여 크게 고생을 하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아는 어떤 스님은 속효심(速效心, 속히 효험을 얻으려는 마음)에 결제마다 선방정진을 하고, 해제 때 제주도에 내려가 40여 일의 단식을 하던 중 회복기에 조리를 잘 못하여 입적(入寂, 스님이 죽는 것)을 해버린 일도 있었다.
부처님 당시에는 수행자들의 생활 지침에 사의법(四依法)이라는 것이 있었다. 네 가지에 의지해 살라는 내용이다. 분소의(糞掃衣)에 의지하고 걸식에 의지하며, 나무 밑[樹下]에 의지하고 부란약(腐蘭藥)에 의지해 살라는 것이다. 이는 두타행(頭陀行, 탐욕과 집착을 털어내는 수행)의 실천을 강조한 것으로 의·식·주 문제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분소의는 버려진 천을 주워 기워서 만든 옷인데 곧 가사를 가리키는 말이며, 부란약은 아플 때 먹는 상비약으로 약효의성분이 있는 짐승의 똥 등을 주워 만든 약을 말한다.
도대체 수행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살아가는 것일까? 하지만 인류의 역사 속에 이러한 삶은 존재해 왔다. 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현대에도 인도의 자이나교도 사이에는 아직도 나체로 수행하는 단체인 디깜바라(Digambara),즉 허공으로 옷을 삼는다는 공의파[空衣派]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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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 스님 : 1947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으며, 1970년 통도사에서 벽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74년 통도사 강원을 졸업하고, 통도사 강주, 정법사 주지, 조계종 교육원 고시위원 및 역경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조계종립승가대학원장으로서 승가 교육에 매진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조계종 표준 금강경 바로 읽기』, 『처음처럼』, 『학의 다리는 길고 오리 다리는 짧다』 등이 있다.